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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은 제자들의 근심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시작했다. 제자들은 지금 자기 눈에 보이는 이 예수님의 모습이 생소해져서 근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근심은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의 안목 역시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본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에서 비롯된 근심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본체로 보듯, 예수님이 왕이신 이유도, 또한 메시아인 이유도 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보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으니 근심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이다. 왜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지는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이유로 인함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이 땅이 넓고 건물이 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누구나 될 수 있는 지경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라도 사람이기만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기 삶의 정체성으로 삼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그 육신의 모양이나 삶의 형편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자리(정체성)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인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의 운명이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기에 예수님을 자기 정체성의 본질을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으면(믿으면, 순종하면, 사랑하면)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고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일

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관계성)는 결국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역시 그렇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또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말씀으로 증거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예수님 같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같은 정체성의 자리(처소)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무엇이든 들으신다고 말씀을 하셨다. 이름이란 정체성이기에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계획이 그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본성과 생명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표현하고 이루어내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자기가 삶의 목적으로 아는 것을 구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삶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름)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삶의 목적을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사람이 예수님과 같아지면(세상의 모든 사과를 다 사과라고 하듯)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같은 삶이란 삶의 모양이 같다는 것이 아니다. 사과가 어디 모양이 다 같고 색이 다 같은가? 이는 다양한 육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아들의 삶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세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천지에 충만하신 것이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 곧 같은 정체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그것이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뜻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생명과 같이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생명이고 산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리의 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진리의 영)를 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어야 세상이 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예수님은 당연히 세상이 보지 못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실제로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안에 없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서 알고 신학으로 공부했다고 안다고 해도 다 거짓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외식이라고 또 노릇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그런 상태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과 같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세상의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니 어디를 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처럼 보였겠는가?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는 것이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영화 아바타에서 네이티리(원주민 여주인공)가 영화 막판에 주인공 제이크를 보고서 “I see you.”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그날 처음 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더욱이 제이크가 원주민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가 보인다.”고 한 것은 “너의 본질, 정체성, 근원이 보인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 역시 그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몰라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을 몰라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과 공명을 이루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다.





곤경에 처하는 것은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사람들이 상대성 이론을 들어서 아는 것 같이 성경에서 예수님을 읽었고 그것을 학문으로 공부했고 또 교회에 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뇌까리듯 하니 안다고 확신하는 것일 뿐이다. 그 증거는 다른 것이 아니다.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것이 증거다. 계명은 지켜지는 것인데 지키려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되는데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 그 생명이 자기 안에 유전자와 같이 있어서 그것으로 살다보니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누구나 사람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사람과 같이 살기에 사람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생각도 느끼고 사람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사람 안에> 서로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보려면 예수님의 일과 말씀이 자기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아니 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이 보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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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도, 또 다시 오시지만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시험에 오직 여호와만 경배하라고 하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본질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심청전에 효(孝)라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그 본질이 효가 아닌가? 그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이 육신이 되심 같이 그들의 삶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을 보는 것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오신 주님을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로 아는 세계라는 뜻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성인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이 우리에게 임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삶이 되는 삶이 바로 부활신앙이고 거듭난 신앙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몸을 제자들이 만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직 제자들의 정체성이 부활하신 주님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성령의 강림(잉태하심)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십자가로 가신다고 했을 때부터 그들을 혼돈스럽게 했던 예수님의 정체가 제자들의 심령 안에서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제사를 지낼 때 소와 양과 같은 제물의 머리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안수하는 것은 그것이 같다는 의미인 것과 같다.)


그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달리 표현하신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같이 그들의 심령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그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들 안에서 생명이 되어서 그 생명의 본성이 그들의 삶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이루었고 그들의 삶을 보고 믿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었다고 하셨다. 즉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성령의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삶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과 같이, 또한 성령의 강림으로 삶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이 된 사람들과 같이 되는 생명의 번성함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세상에서 있는 일이었지만 세상은 이를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들을 핍박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과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의미다. 즉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귀로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순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주님을 본다면 재림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재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의 본질이다. 물론 그 본질이 언젠가 형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본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오시는 것 그것이 재림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안목을 가진 세계를 살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일 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 본질은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 존재 목적이 삶으로 표현된 사람이 바로 아들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와 혈통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아닌가?


세상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분명하다. 하나님이든 산신령이든 가서 구하는 것이 모두 자기 육신과 같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자기 육신의 삶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한다. 선교가 다른 것 같지만 선교지에 가서 전하는 것이 결국 그것인데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아래 있는 것이다. 즉 세상이다. 그런 가치관으로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다. 세상이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이라 하심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았고, 제자들도 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살았다는 것은 육신이 숨 쉬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살았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을 때 살아있다고 하고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시계의 존재 목적이 바로 시간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 존재 목적이 드러난 곳이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십자가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법으로 성공이라고 하는 것의 정점에 사람이 섰을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을 볼 때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느냐?’ 하는 그 십자가의 자리에 섰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이 육신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살아있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과 같이 살아 있는 같은 세계의 존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하나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사과나 마트에 있는 사과나 다 사과 안에 하나인 것과 같이.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그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그 존재의 목적대로 그 삶을 살게 될 것이니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세계에 있는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삶인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보리라’고 한 그 제자들이 예수님과 또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나님께 기도(요 17장)하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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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제자들도 잠시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은 아예 예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8-19)


예수님께서 가신 곳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다. 그리고 다시 오시겠다는 것은 부활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다. 즉 세상이 예수님을 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이것을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으니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제자들도 보지 못할 것이고, 오늘날 우리는 더더욱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가신 예수님과 오시는 예수님은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가시는 예수님은 예수님의 육신이고, 오시는 예수님은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이 육신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그 몸을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육신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육신으로 표현되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다. 그것을 어떤 이는 볼 수 있고 어떤 이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내용과 형식>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즉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육신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이고 그것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 구조는 성경의 절대적인 구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 그것을 보는 것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예수님>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만을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이나 안목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육신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목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금식을 마치시고 사탄에게 받으신 세 번째 시험에 나온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고서 그것을 얻으려면 사탄에게 절하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것을 얻고 싶다면 나(사탄)에게 절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희 여호와만 경배하라”고 하셨다. 여호와는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법을 예수님께서 직접 육신으로 말씀을 표현하시므로 우리에게 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표현된 예수님의 정체성 그 본질, 그 내용을 만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이제 가실 것(부활 승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에게 전하실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해야할 존재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시고 나면 제자들은 그것을 결국 보게 될 것이지만 세상은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마치 향유 옥합이 깨어지듯 온 세상에 나타날 것인데, 그것이 가룟 유다에게는 낭비로 비쳐졌지만 예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전해질 일이라고 하심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제자들은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본질, 곧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그 말씀이 제자들의 심령 안에서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자기 생명이 될 것이기에 예수님을 만난, 더 정확히는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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