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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5-31) 여기를 떠나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5. 16. 08:34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14장은 제자들의 근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여기를 떠나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여기>는 ‘근심하는 자리’일지 모른다. 아니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떠나시는 일, 곧 제자들이 근심하는 그 일이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심을 알게 하시는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서 근심하는 자리를 떠나자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 14:3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을 떠나실 것인데 제자들은 따라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고 따라가겠다는 베드로에게는 ‘나를 부인 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크게 요동케 했다. 예수님과 함께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고, 오천 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시는 예수님이 모든 가난을 해결하실 것을 기대하며 그 놀라운 나라에 예수님과 함께 갈 계획으로 들떠 있었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오지 못할 곳’으로 간다고 하셨으니 그들의 근심은 심각한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도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이 성경을 볼 이유가 없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성경의 어떤 말씀도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이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제자들의 근심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근심을 해 본적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유익’ 아버지께 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신 그 ‘유익’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신앙이 참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 자기 귀에 들리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그날까지 자신이 가졌던 신앙, 그날까지 믿었던 예수님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의심이 들고 근심이 든 적이 없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익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어느 날 지금 설명해가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과 같은 말씀을 들을 때에 그날까지 자신이 예수님께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 지와 같이 육신의 문제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일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익 곧 성령이 자기 심령에 오시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의심했고,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정체를 온전히 깨닫게 하실 것이니 근심하는 모든 것이 밝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근심하는 자리에서 떠나자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시고 나면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기에 근심할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근심이 근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알고 계시기에 근심할 필요가 없으니 나를 믿고 근심하는 자리를 떠나자고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다고 또 너희는 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에 근심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예수님을 그런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님으로 믿고 기대했던 마음들이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근심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정확히는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유익이라고 하셨다. 그 유익들을 정리해 본다면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으신다.(14절)
  •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할 것이다.(26절)
  • 처소가 예비 될 것이다.(2,3절)
  •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1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모든 유익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야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가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십자가의 자리로 가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인생의 목적>이다. 사람이 왜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 그것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자기 안에 땅에 씨가 심기듯 심겨진 사람에게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 

  • 그 깨달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는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에게서 회복된 것이다. 
  • 그것이 회복된 것을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 그렇게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표현하시고자 한 뜻이 나타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게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인생의 존재 목적은 사람에게 있어 근원적인 유익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용되어지는 것 만한 영광과 유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했더라도 자기의 존재 목적과 다르게 취급을 받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대머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드라이기가 선물된다면 그것은 모욕하는 것에 쓰이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비밀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면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또 기대했었던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의 참 정체성과의 괴리가 해소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그 때가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아셨기에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어 그 깨달음이 이끄는 삶은 생명의 유전자가 생명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고,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거하실 곳에 계신 것이다. 그것이 안식이고 평안이다. 그리고 그것인 인생에서 유일한 유익이자 최고의 유익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모든 것을 이루러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보이지 않아서 근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자리를 떠나자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기에 근심하는 자리,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믿는 그 자리를 떠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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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며, 우리 인생들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육신이 사람이기만 하면 다 성령이 오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을 알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 즉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내용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 즉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 사람들, 그러니까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자신과 상관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이다. 이 너희는 요15장에서 분명하게 한정하신다. 즉 너희가 아무나 너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너희는 성경을 읽는 독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가 자신의 운명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목적을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다. 문맥으로 본다면 성령이 모든 것을 알게 한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령이 심령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평안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시는 것과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은 바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있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원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평안은 ‘에이레네(Eirene)’이다. 이것은 ‘합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있어야 할 자리와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있어야할 것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상태를 평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느끼는 평안, 그리고 집에 오면 편히 쉬는 그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집, 자기 고향에 왔을 때의 그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다.


사람들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가장 안정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제자리를 찾도록 늘 애쓰는 것이 사람이다. 이는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로 가야하는 운명이기에 사람의 본성 안에 그런 본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육신이 기대하는 것, 육신에 필요한 것이 풍족하고 걱정하지 않는 상태를 평안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자리(정체성)를 회복하면 삶이 평안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흔들고 옮기지 않듯,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면 흔들릴 이유가 없는 온전한 평안이기에, 돈이 풍족하다가 줄어들면 불안해지는 세상의 평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은 존재의 평안이다. 반면에 세상이 주는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와 공로에 관한 평안이 세상이 주는 평안인 것이다. 정체성이 평안하다면 육신이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의 행동이 어떠해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 관계, 그 정체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곧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이 가진 근심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다양한 걱정을 해도 결국은 <왜 사느냐?> 그 하나에서 모든 갈등과 근심이 있는 것이다. 돈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 돈이 잘 벌리지 않거나 부도가 나면 이상하게 사람들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즉 사람의 모든 문제는 왜 사는지를 몰라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흑임이 혼돈하다고 했고, 예수님께서(정확히는 요한 사도)는 어둠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빛이 왔으나 어두움이 알지 못했다고 하시는 것이 그것이다.


즉 사람이 왜 사는지가 분명하면 근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누구며, 아버지는 누구시며, 내가 어디서 왔고 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의 인생은 근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모든 근심은 그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근심의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살면서 육신의 일로 근심하겠지만 그것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근심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이자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이 그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로 기대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런 것은 모르겠고 가시겠다고 하니 가지게 된 근심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과 관련된 문제로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그것이 아니라, 너희(앞에서 말한 너희)가 왜 사는지를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기에 근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있어야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반대로 자리를 떠난 것이 바로 죄다. 죄의 어원이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의 ‘하말티어’임)


제자들의 근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만 같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걱정은 몰라라 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우선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육신의 문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근심에서 무엇보다 ‘그런 것을 해결해 주시는 주님으로 예수님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니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근심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누리게 되는 평안이 있으면 다 근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의 그 근심들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났기에 하는 근심이기에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로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을 알게 하시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깨달아서 자기 자리를 회복하게 되니 평안한 상태가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이고 동일한 근심이며 동일한 평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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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신앙인들)은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흔히 체험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일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방언을 한다거나 암 환자가 치유된다거나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평소와 다르게 기도하는 중에 가슴이 뜨거워진다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이 오신 증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체험들이 성령이 오신 결정적 증거일까? 그러니까 그것이 성령이 오시는 것의 본질이고,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성령의 본분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은 성령의 본질적인 본분이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기계로 철을 깎으면 열이 나는데 그 열이 본질이 아니라 쇠가 깎여서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 본질이듯이.


성령을 이야기하려면 자연스럽게 삼위일체가 거론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하나님인가 하는 것을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마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서로 다른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이 합쳐지면 또 다른 것이 되거나 둘이 합해진 만큼 질량이나 부피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는 말씀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운동은 몸에 좋다.’라고 아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운동하기 때문에 운동의 효과를 자기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자가 남자를 경험하였을 때 ‘남자를 안다.’라고 말한다.(마리아)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자기 삶으로 체휼한 사람은 삼위일체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뜻을 가지고 계시고, 그 뜻(말씀)이 자기 삶으로 나타났고, 그렇게 삶으로 살게 된 것이 성령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보여주신 것이 자기의 생명이 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또한 작가가 쓴 책으로 비유할 수 있다. 성부는 작가의 생각과 같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쓰고자 하는 글의 계획이요 의며 모든 것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작가의 생각이 표현된 책이 바로 성자와 같다. 그리고 성령은 그 책을 보고서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게 하는 감동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그것을 육신을 가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 보게 하니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본질로 순종하는 감동을 주는 분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성령의 잉태하심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과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그것이다. 삼위일체란 그런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에게 전하신 뜻과 의(말씀)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영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사람이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고, 스스로 그것이 자기 운명이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하게 하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정체성인 것이다. 방언이나 기적이나 가슴 뜨거워지는 것은 성령께서 그 정체성의 본분을 따라 행하심에 따라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확정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다 생각나게 하시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인 것이다.

보혜사 성령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물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산상수훈을 전하시는 것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 끝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 세상이라도 그것을 두기에 모자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일일이 다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도 예외 없이?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되는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문장이나 말씀하신 단어나 말로는 수없이 많은 것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존재로 만들었으니 그 자리를 지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행복이며 평안이라는 것, 그것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사람, 그 말씀을 깨달아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 삶의 목적과 의미가 그것임을 알고서 육신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시는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생명만 있으면 그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은 무한할 정도로 많은 것이기 하고, 또 역설적으로 생명체가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자기가 자기 생명의 이름(정체성)을 나타내는 것 그것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에게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형상, 이미지)을 존재로 지으셨기에 육신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내용이며 의요 진리이시고, 그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몸 가진 사람이라는 만들어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말씀을 표현하시겠다는 계획대로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는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지으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인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어디로 오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마 16장)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 베드로가 유명한 답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이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마 16:17)이라고 하셨다.


이 대화를 잘 살펴보자. 베드로가 주라고 고백한 예수님은 베드로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아주 크게 칭찬하시고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을 한다는 것은 고백을 하는 사람 안에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안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을 고백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고백은 베드로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뜻하신 고백을 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성령은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하심이 이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안에 받아 들여서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람 안에서 그 하나님의 법이 깨달아지는 잉태하심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이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생명으로 잉태되는 거듭남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봐야(보고 들어야) 한다. 결혼한 여자가 남자의 유전자를 받지 않고 생명을 잉태할 수 없듯 인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높이 달리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듣게 표상이 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는 것이 바로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남자의 유전자가 여자의 몸 안에 가는 것이고, 땅에 씨가 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성령께서 그 순종(믿음)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전에 자기가 알고 있었던 사람의 정체성,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았던 육신의 안목을 좇던 자기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고, 이것이 구원의 역사며, 이 역사하심으로 거듭난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우리 모든 인생)에게 유익이고,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심에서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하시는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을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있는 세계로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로 가셔서 달리심이 있어야 사람들이 볼 것이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예수님의 모습(말씀)이 있어야 그것을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 삶으로 회복되는 역사하심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인 것이다. 성령의 오심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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