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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서 요셉이 해석한 바로의 꿈과 같이 7년간은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7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애굽뿐 아니라 온 세상이 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요셉이 총리로서 7년간의 풍년 동안 곡식을 잘 저장해 두어서 흉년을 견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흉년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먹을 것이 없는 것을 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외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눈에 보이는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인생의 배고픔은 단지 육신의 배고픔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본질적인 배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라는 존재는 다 어떤 것에 대한 배고픔과 갈함이 있는데 그것이 육신의 배고픔과 갈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표현하는 모든 것이 사람 안에 있는 본성과 생각이듯이.


요셉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 그 삶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될 때 애굽의 왕 바로가 요셉을 일컬어 사브낫바네아(Zaphenath-Paneah)라고 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말하시고 살아계신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요셉은 바로의 꿈에 대하여 꿈은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보이신 것이라고 했습니다.(창 41:25) 그러니까 꿈은 바로의 꿈이지만 그 꿈에 대한 의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서 그 꿈이 애굽, 곧 세상에서 나온 부유함이 세상에서 나온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에게 이르기를 총명한 자를 세워 그것을 대처하라고 했고, 바로는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그 꿈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9-40)

그래서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이름을 주고 하나님이 꿈으로 보이신 하실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모든 인생이 가진 배고픔, 바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은 애굽의 젓줄인 나일에서 나온 암소와 같이 우선은 세상의 풍요함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시 세상에서 나오는 배고픔이 그것을 다 먹고도 부족하게 되어 결국 사람은 늘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세상에서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될 것이기에,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총명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그 일을 해결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요셉이 감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셉에 대한 말씀을 대할 때면 예수님과 오버랩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그 정체성,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람이란 존재의 본질이 바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풍년으로 넘치는 곡식을 잘 관리하여 흉년에 대비한 것입니다. 마치 전도서의 말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과 같이 우리가 아직 육신에게 힘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사용할 여지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찾는 것에 수고하여 육신의 존재 목적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 말씀과 함께 안식일에 대한 말씀도 같이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 하실 때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성경에서 육일 혹은 여섯은 언제나 사람을 나타내는 사람의 수입니다. 엿새 동안 수고하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모든 것을 안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에 소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안식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고, 하나님이 안식하시니 우리가 안식하는 관계이므로 우리가 안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배고픔도 갈증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육신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소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상의 풍족함, 세상의 모든 것, 또 우리 육신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도록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인 바로가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꿈꾸고 그것이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그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삶의 의미에 배고프고 목마른데 그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의 풍족함,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에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존재 정체성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꿈과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한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생각해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우리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심을 성경을 통해서 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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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로마서 5장 서두의 말씀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나니’라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느끼는 곤고함을 환난이라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인내하면 신앙과 삶이 연단이 되고 그 연단의 과정을 거쳐 자기가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 쓴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에 대하여 오해가 있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은 인생의 존재 이유에 대한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 존재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다가 그렇게 갈망하던 자기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 삶의 모든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가서 자기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던 그 신앙의 프레임 안에서 소망을 봅니다. 육신의 곤고함을 이기고 어려운 일들을 해결 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보면 그 곤고함을 이길 힘과 삶을 육신의 삶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으로 해결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열쇠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이 소망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에 있어 목적은 예수님이나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문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그 해결의 답이 예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소망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문제나 해결해 주려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차를 삽니다. 그리고는 세차도 하고 기름도 넣고 정비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자기가 차를 산 목적을 위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동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차를 삽니다. 자기가 가고 싶을 때 편안하게 가기 위해서 또 빠르게 가기 위해서 차를 삽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름을 넣고 그 목적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세차도 하고 정비도 합니다. 그런데 차에 기름 넣어주고 세차해주고 정비해 주려고 차를 사는 사람을 본적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을 먹이고 입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육신을 주신 것도 괜히 육신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을 두심으로 사람이 육신의 한계 안에서 자기 생각을 이루지 못하여 겪는 곤고함을 만드시고 그것에 신음하고 어려워서 하나님을 찾으면 인간의 능력 이상을 자랑하시며 그것을 해결해주시는 재미를 느끼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함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므로 그 존재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없기에 그 영광과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할 형식을 가진 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동이라는 무형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고 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육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육신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을 이동을 위하여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이 하나님께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겪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하신 것은 미물의 생명도 아끼신다는 것에 한정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물학적 생명을 귀히 여기셔서? 아닙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파리처럼 죽인 사람이 몇인데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시려는 목적을 가지셨기에 먹이시는 것이지 그 생명이 귀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육신의 문제에 매몰되어서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인생의 본질을 두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안목은 육신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 알고 보면 그 문제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 그 세상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강제하는 것을 환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편히 일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려면 새벽 일찍 나서야 하고, 또 매달 염라대왕처럼 날아드는 카드명세서, 각종 고지서에 맘 조리는 일들, 그리고 자신이 계획한 사업이나 취업이 되지 않는 일, 그리고 원치 않는 건강의 악화나 사고와 같은 것을 환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육신으로 살면서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에 반하여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일어나면 다 환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인생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인생이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이 선함이고 소망이라면 우리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여 삶을 시작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겪게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이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나 우리 인생이나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어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결국은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내어야 하는 존재의 목적과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존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데, 그 소망의 실체이자 그 소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바로 환난이고 인내를 요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실 분으로 예수님을 소망으로 두는 것과 인생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기에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환난도 겪고 인내하여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본성과 신념의 차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이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겪는 곤고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아플 때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에 경제 한파가 닥쳐도 예수 믿고 교회에 충성하는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신앙의 최상위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육신의 존재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대한 관점과 안목이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평안하고 원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소모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인생을 살면서 육신을 때 빼고 광나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나 성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이 육신은 어디까지나 소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소비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드러내신 것에 그 육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된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소망이 있다하고 예수님을 믿노라 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사람은 이 육신이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육신을 사용하고자 하면 이 육신은 언제나 종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니, 십자가의 도와 같이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하면 이 육신은 끊임없이 수고, 항상 천하게 되며, 항상 죄인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피하려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연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어가 산란을 위하여 알래스카로 회귀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입니다. 그 회귀로 인하여 연어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연어들은 그 길을 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본성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그것이기에 그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 자기 소망인 것입니다. 연어가 신념으로 알래스카까지 가려 한다면 그것은 아마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연어가 그렇게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연어라는 DNA가 그렇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소망인 사람, 하나님의 의와 십자가의 도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은 육신이 겪는 모든 것을 다 소망 아래 둡니다. 그들이 겪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 같지만 그것을 소망으로 여깁니다. 십자가의 도가 자신을 그렇게 이끌고 가는 것을 스스로 봅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 않아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힘든 것이 운명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그 소망이 그 삶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하신 예수님도 하늘의 천군을 불러 이길 수 있었음에도 끌려가신 것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가 생명이고 본성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예수님을 그렇게 이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셨기에 아프시고 죽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었기에 육신을 그렇게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소망으로 두는 사람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인생의 곤고함을 이기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소망하기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자기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되었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내입니다. 그 인내가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소망인 사람만의 본성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축구할 때 숨차지 않겠습니까? 좋아하기에 더 많이 뛸 것이기에 더 숨찹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숨차지 않고 축구하기를 바라는 것을 소망이라 하겠습니까? 숨차더라도 축구를 하는 것이 소망이겠습니까? 


그와 같이 이 육신의 삶에 속한 모든 곤고함과 사람들이 환난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소망 안에서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인내고 그 인내를 가졌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이신 것이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임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신령한 은사를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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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1-11) 그리스도인의 소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6. 06:03 Writer : 김홍덕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2-6)


바울 사도는 이제 로마서 5장에 들어서면서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율법으로 무장한 이들이 와서 미혹케 하는 것에 대하여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겠다(롬 1:11)고 한 그 신령한 것을 이야기 해 가고 있습니다. 그 시작이 믿음이라는 것도 함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을 만든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인생에게 은혜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가 같아지는 화평을 이루고 이제 그 화평함이 어떤 삶을 살게 하는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신령한 은사인지를 말씀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은사의 본질을 설명해 감에 있어 먼저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의 모든 소망은 예수님께 또는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많은 하나님께 자신의 소망이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소망,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육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니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만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육신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인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건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고, 시험이나 취업이나 사업과 같은 세상의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니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두고 인생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의지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인생에 대한 소망,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얄팍한 속셈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몸으로 지키는 것으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복권을 사면서 복권 수익이 가난한 사람을 돕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듯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소망을 오해하는 근본 이유는 바울 사도가 경계하고 있는, 아니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이유와 같습니다. 즉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안목이 그렇게 소망을 오해하게 하고 성경을 오해하게 합니다. 그 안목은 늘 인생의 본질을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무엇인지에 따라, 무엇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인생의 일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살아가는 동안 육신에게 일어나는 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늠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뭔가 자신이 살아가는 일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은 없는가 생각하고 돌아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그와 동일한 안목을 가진 목사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무당에게 물어보듯 묻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위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근본 곧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합니다. 그런 가치관이 바로 바울 사도가 경계하고 있는 이들,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요 회칠한 무덤과 같이 그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것 같지만 율법이란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서 표현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의 소망 역시 자기 육신의 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라, 자기가 본질로 생각하는 것이 형통하려면 어떤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 형통함을 돕는 소망,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자기 육신의 일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런 일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소망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 마음에는 원하는데 육신과 세상의 일이 자기 주관 아래 있지 않기에 세상과 또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가 자기 소망과 희망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참고 견디려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참고, 자신과 달리 생각하는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참습니다. 마음에는 분이 있지만 겉으로는 참으면서 그것을 환난이라 하고 그것을 억지로 참는 것(자기 육신의 소망을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을 인내라 여깁니다. 그래서 그런 연단을 거치면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소망이라며,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소망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소망은 많은 경우, 아니 대부분의 경우 실패합니다. 자기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 입시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고 합시다. 모집 인원보다 지원하는 기독교인의 수가 많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공기업 입사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항상 모집 인원보다 작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야 합니까? 헌금 더 많이 한 사람? 아니면 그런 어려운 입시 준비 중에도 예배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봉사한 사람? 과연 그런가요?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그런 시험을 앞두고 교회에 와서 충성하는 것 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 둔 소망을 가진 사람이 부끄럽게 된 것입니다.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 소망은 하나님의 우리 마음에 그 사랑을 부은바 된 것이기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망을 품은 것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이나 취업과 같은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여 소망을 품었다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과 같은 것은 이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소망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아주 큰 확률로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자기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또 같은 소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그런 소망이 100%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부끄럽게 되지 않는 소망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또 바울 사도가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하시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한 소망입니다. 인생으로 우리가 살게 된 이유와 목적, 알지 못했던 그 존재의 목적과 이유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생들은 모두 사는 동안 자기 삶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모든 이의 소망이 자기가 누구인지 왜 사는 것인지를 아는 것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소망이라는 것은 이 육신의 일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설명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 그것이 모든 인생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컨대 경부선 위에 놓인 부산발 서울행 열차가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진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놀라운 운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바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예수님과 같은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이유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인생의 소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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