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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6. 11. 15. 17:19 Writer : 김홍덕

몇몇 분들이 '덕이의 신앙 이야기' 연재를 요청하셨지만 다른 글들을 쓰기에 바빠서 죄송하게도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이번 주는 대입 수능이 있는 주간이고 저의 둘째 아들도 이번에 수능을 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이전 생각에 대하여 정리해 봅니다.


사설이 길게 느껴지실지 모르지만 이 카테고리는 지극히 저의 사적 이야기를 하는 곳이니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본다면(덕이의 신앙이야기와 금방 밀접하지 않더라도) 이제 블로그를 운영함에 있어 매일 7시에 글이 게시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블로그는 알람 기능이 없기 때문에 제 블로그의 새 글이 올라왔다고 여러분께 알려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물론 페북 친구로 등록하신 분은 예외지만)


아울러 이 <덕이의 신앙 이야기>는 페북이나 다른 SNS로 발행하지 않고 저의 블로그에 직접 접속하시는 분들만 보실 수 있도록 간혹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하여 글을 쓰는 저도 여러분과 같이 인생의 희노애락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 대부분은 여러분과 비슷하고 또 많은 것에서 여러분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마음들 이야기 하고 싶은데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디다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늘 카페를 잘 운영해볼까? 하니면 이 블로그를 완전히 홈페이지로 만들까 생각한답니다.



정말로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고등학생일 때는 세상에 저보다 더 어른이나 똑똑한 사람 없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오직 교회에서 잘난 인간으로 인정 받는 것 뿐이었고, 그런 저의 기준으로 볼 때 저의 바람은 충분히 충족되고 있다고 착각 아니 완전한 망상 속에 살았습니다.


이제 저의 둘째 아들이 수능을 치고 나면 저희 집의 애들도 어느 정도 다 자란 시대로 저의 삶이 접어 들겠군요. 그래서 오늘 저의 그 시절을 돌아보니 정말로 철도 없고, 아무 개념도 없이 살았습니다. 학력고사(지금의 수능)는 그저 다른 학교에서 치는 모의고사 정도로 생각했고, 학력고사로 인생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이나 중압감 같은 것은 엿바꿔 먹은지 오랜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가 늘 하고 있는 이 신앙생활이 저를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딱히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는데 그런 개념과는 독립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 안에는 그렇게 공부하지 않고 살아도 하나님께서 먹여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적어도 결과적으로 볼 때 삶의 겉모습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방의 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대학생활은 그야말로 더 개판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교양 영어 교수님이 부친의 제자였는데, 동창회에서 저의 아버지를 만난 그 교수님은 다음 수업시간에 저를 호출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대출을 시키고 교회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대출한 친구는 처음 출석 부를 때 대답을 한 죄로 출석을 다 부르고서야 저를 부른 교수님께 불려 나가서 저희 아버지께 전해달라는 인사말을 듣고서 그날부로 저의 아바타가 되었습니다. 1년간.


그렇게 교회에 몰입했던 저의 생활은 교회 안에서 당연히 눈에 띄는 존재였고, 군에 갔다 온 선배들까지 위로 최대 7,8년 선배들이 있는 대학부에서 저의 존재는 뜨거운 감자 그 자체였습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둥이였습니다. 욕을 하고 다녀서가 아니라, 다들 예수 믿겠다고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에 대한 지적과 예수 믿는 것에 대한 잘난 체에 쩔어 있는 저의 모습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상당한 부분의 행위 규범을 지켜내는 저의 모습은 달리 역공할 수도 없어서 오히려 사람들을 약 오르게 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당시 대구에 막 태동하기 시작한 IVF가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저도 초기에는 수련회도 같이 가기도 했는데, 왠지 저는 주일까지 겹쳐가며 수련회를 해대는 IVF를 용납할 수 없었고, IVF방식으로 대학부를 이끌어가는 세력에게 대항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1학년 여름, 대구, 경북 및 울산지역 전체 IVF 수련회를 대구 가창의 한 수련원에서 가졌는데 그때 강사로 나선 간사라는 선배(지금으로 보면 그냥 고참)가 구원에 대하여 말하면서 '흔히들 천국에는 면류관 구원과 개털모자 구원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강의하는 것을 듣고, 평소 교회에서 듣는 것과 다른 소리를 한다 싶어 강의 중간에 손을 들고서 '그러면 한 달란트 받은 자의 한 달란트를 뺏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준 것은 어떻게 해석하냐?'고 물어 강사를 당황(답하지 못했음-정확히는 '성경을 그렇게까지 상세히 볼 필요는 없다'고 함)하게 하였고, 저희 교회 리더들이 저를 그 강의장 밖으로 끌어내기도 했었습니다.


저의 그 싸가지 없었던 대학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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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아스닷(이방인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5. 07:00 Writer : 김홍덕

이번 글에서는 요셉의 아내 아스닷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요셉의 아내 아스닷은 창세기 41장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 외에는 성경에 달리 언급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아내를 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통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이 요셉은 그 이방인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 이스라엘 지파가 되고 에브라임은 후에 북왕국의 왕족이 됩니다.




에서는 안 되고, 요셉은 괜찮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의 형 이삭의 장자 에서(창 26:34)도 이방인 아내를 취했습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는 그 아들 에서가 이방인 아내 취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동생인데 그 일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 곧 이스라엘은 나중에 자기에게 손자가 되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양자로 삼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취한 일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요셉은 이방인 아내, 그것도 애굽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지파로 편입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까요? 특히나 애굽 제사장이라면 태양신이나 바알을 섬기는 신앙을 이끄는 제사장이고 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히 이방인 여자 이상의 의미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요셉은 아내를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므로 총리대신이 되면서 바로 왕이 그 나라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닷을 아내로 주므로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강제로 결혼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요셉이 결혼을 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바로 왕이 일방적으로 혼인하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자기가 가서 자기가 좋은 대로 이방인 아내를 취하므로 그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 이삭의 염려는 곧 하나님의 염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이방인의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래도 좋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남자 안에 있는 의를 여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



결혼이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란 주제로 쓴 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자는 내용인 의를 의미하고 여자는 그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얻으면 그 성을 남편의 성을 따릅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여자가 임신하고 그 몸에서 자라다가 여자가 낳는데도 그 성을 남자의 성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남편 집안의 아이가 됩니다. 즉 남편의 혈통으로 대표되는 의, 그 내용이 여자인 아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시고 교회가 또 성도가 신부로 말씀하시는 것 역시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혈통, 즉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본성과 성품이 각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고,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곳이기에 그리스도는 신랑이 되고 교회와 성도는 신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도 요셉도 그 본성 안에 있는 정체성이 그 아내를 통하여 아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가진 신앙 정체성이 세상의 형식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의를 표현해야겠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날 교회가 세상의 법칙인 경쟁의 방식에서 성공한 사람을 목사로 청빙하고 또 장로로 선출하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좀 다릅니다. 요셉이 이방인 아내를 얻은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닙니다. 바로가 주선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상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좀 추측해 본다면 바로가 자기 통치를 위임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사람을 아내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요셉은 약간의 시차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옥에서 막 풀려난 신분인데 바로 왕이 주선하는 것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자, 아내가 형식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셉은 자기의 의사가 아니라 바로 왕, 곧 세상이 요구하는 요구에 의하여 아내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인데 굳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애굽을 구해야 하듯, 죄에 빠진 육신을 가진 인생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자기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과 예수님께서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연약한 육신을 입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일까요?




우리의 육신은 아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



그것은 우리가 육신이라는 아내와 같은 이 형식을 가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사용법, 목적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육신이 편하고, 보통 사람들이 육신으로 하기 힘든 일들을 많이 일들을 할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구나 굶으면 힘든데 금식 기도를 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잠을 자지 않는 철야기도를 많이 할수록,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또 누구나 어려워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또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좋은 신앙, 세상에서 영광을 얻은 결과를 가지고 대우를 받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그 어떤 분야에서라도 더 가진 것이 있게 된다면 그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를 위하여 그 육신을 수고하여 섬기기 위한 것 그것뿐입니다. 신앙이 더 좋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보고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고, 세상의 어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그 역시 이기지 못한 이들이 보고서 스스로 깨닫고 얻을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을 위하여 육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표상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자 아들이시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아내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진 삶에서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즉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그 의미를 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요셉이 이방인인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애굽에 닥칠 기근에 대비하는 자로서 세움을 받는 것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방인, 그것도 애굽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는 혼인을 하게 된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그 존재의 이류를 찾지 못하는 기근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가치관을 형식으로 취하여 그 기근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 삶에서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회사생활과 교회의 일정이 겹치면 고민을 합니다. 그런 갈등에서 많은 경우 교회를 선택하면 좋은 신앙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 이외의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회사 야유회로 등산을 간다고 하면 신앙을 떠나 산이 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회사가 아니라 교회를 선택하면 교회에서 칭찬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이 요셉의 이야기,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닌데 이방인 아내를 맞이하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이방의 것을 덧입게 되는 모습은 회사와 교회가 겹칠 때 회사를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시면 되었는데 굳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앞의 예로 돌아가 본다면, 회사에 같이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가고 싶어 하고 또 좋은 신앙(평소에 그리 살아야겠지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지간하면 알 것입니다. 그런 그가 회사에 급한 일이 있고, 다른 직원이 힘들어하거나 어려워하는 일을 하러 교회를 뒤로 하고 나왔다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떤 사람은 ‘저 사람도 별 수 없구나! 먹고 살려니 신앙을 버리네.’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신앙이 있을 텐데 우리 일을 도우러 왔구나! 저런 신앙이라면 나도 가질만하네.’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육신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들, 그 사람들 마음에 ‘나도 저렇게…’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원치 않게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 자기 의를 표현해 낸 것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진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회사일과 교회일이 겹칠 때 회사에 일하러 간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부장은 그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교회 다니는 사람이 회사 직원들을 도우러 왔을 때 그것을 보고 ‘나도 저런 신앙이라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사람처럼. 구원의 대상은 그런 사람들이고, 또 그런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서 양 99마리를 버려두고 찾으러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이 세상의 형식을 덧입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이라는 것은 놀라운 비밀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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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로마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바울 사도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한 사람 곧 아담으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아담의 죄가 곧 모든 사람의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쉽게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늘 선하지 않기 때문에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 없다.’는 말을 늘 합니다. 자신도 어떤 것이든 죄를 짓고 산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해서 자신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게 왜 아담으로 인한 것인가?



먼저 사람들 누구나가 인정하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이 어떤 것에서든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세계는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그 행위는 육신에 관한 것인데, 사람들에 따라서 아니 많은 사람들은 그 육신 안에 깃든 생각이 가진 부정함도 다 죄로 여겨서 부정하고 악하게 생각하는 것조차 다 죄로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다 육신의 생각과 행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가 때로 죄를 범하는 것이 왜 아담으로 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믿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것조차 아니고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것은 더 인정하기 힘든 것입니다. 아담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한 문제, 혹은 괴리가 생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죄에 대한 기준으로 인함입니다. 어떤 것이 죄가 되려면 그것을 죄로 여기는 법이 있거나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률적으로는 ‘죄형 법정주의’라고도 합니다. 법이 있어야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괘씸죄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하는 양심의 가치를 벗어난 탓이 큰데 그렇듯 꼭 법이 아니라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양심적 기준도 죄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죄가 되려면 법이 있어야…


어쨌든 죄가 되려면 법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죄를 짓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그 인정하는 죄는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행동과 마음의 생각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죄가 되려면, 행동과 생각에 대하여 죄를 규정하는 법과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생각도 행동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은 행위를 죄로 보시지 않아…



그렇다면 하나님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죄들, 행동이나 생각들에 관한 것을 죄로 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을 죄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행동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 안에 있으면 그 사는 것이 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은 모르고 인생의 목적이 자기 생각 안에 있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선하고 양심적이어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는 법과 기준은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당연히 인정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의 법에도 이런 기준이 있습니다. 법조계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으로 죄가 되려면 실질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강해도 죄가 되지 않지만, 별다른 마음 없이 한 행동이 사람을 죽게 만들면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같은 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마음만 먹으면 죄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것, 간첩 행위를 기획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헌법이 정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에 살려면 우리나라 헌법의 의에 동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반대하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우리나라 국민이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많이 예로 든 것인데, 간첩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간첩이 평소에 너무 착하게 살고 이웃 주민들에게도 친절할 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 기부도 하고, 또 지역 학교에 장학금도 내는 등 누가 봐도 정말로 법 없이 사는 사람, 누가 봐도 선하고 착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그가 죄가 없을까요?


만약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간첩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지역사회, 기부를 받고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까지 다 큰 일이 나는 것입니다. 적어도 국가정보원이나 경찰에 불려가서 한 번은 조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의 죄인 것입니다.


반대로 아들이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딸도 좋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어떤 행위를 하면 그 부모의 자식이 되고, 어떤 행위를 잘못하면 자식의 지위를 박탈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간혹 호적에 파버린다는 식의 경우도 있지만 그런다고 유전적인 부자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적용하는 죄의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가 아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번이 더 위력적입니다. 도토리 열 번 구르는 것 보다 호박 한번 구르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능력이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들의 한계를 모르실리도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부족한 인생의 행동을 기준으로 죄를 삼는다면 살아날 인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야박한 분이 아닙니다. 달리 긍휼의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존재의 목적 안에 사람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에 분명히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를 바라심으로 지으시고, 지으신 다음에 보니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너무 잘 만들어져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가져오고 드리는 방향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는 방향을 가진 목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가 죄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말의 어원인 하마티어라는 말이 가진 ‘의미가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냐 아니냐는 사람이 어떤 해동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행동은 존재가 정해지면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게 본성으로 나타나는 결과와 현상이기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사람의 죄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려 하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자기 안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그것으로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려 하는 자리로 가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의 죄입니다. 바로 그 아담의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그런데 그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 안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나고 자라면서 배운 것을 기준으로 자기가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스스로 규정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로서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죄가 들어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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