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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후반부에 아주 감동적인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한 고백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이는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 왕 바로 앞에서 문안할 때에 바로 왕이 야곱의 나이를 물은 것에 대한 야곱의 고백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름 신앙의 여정을 보낸 사람들이 읽으면 뭔가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의 삶은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출생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다툼을 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장자의 권한을 빼앗고자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했지만 기껏 얻은 것은 이삭의 재산이 아니라 하늘의 이슬과 포도주 즉 하나님의 의를 얻을 뿐인데 형에게 쫓겨서 돌베개 베고 자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수고했으나 라반이 속이고 레아를 주어 또 7년을 일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유케 되자 라반의 아들들과 다투고, 그리고 다시 본토 아비 집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여정을 떠나고, 그 마지막에 천사와 싸워 환도 뼈가 부르지는 일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들이 그 형제를 팔아버리고 아비인 자신에게 죽었다고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세월을 보낸 야곱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의 여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곧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사람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야곱이 보내는 그 험난한 세월 역시 우리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여정이 다른 곳이 아닌 애굽에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좇아서 산 세월, 하나님께서 후손으로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온 삶의 여정과 세월을 자신의 후손들이 어떤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비옥한 땅을 얻어서 정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생 말년에 기근에 힘들어 하다가 결국은 애굽으로 이주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야곱 곧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그 수가 너무 많아지므로 오히려 세상과 같은 애굽의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종으로 삼고 그 종된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신원하므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하여 내시는 출애굽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차피 애굽에서 건져 내실 것이고, 또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면 애굽이 아닌 야곱에게 기근을 이길 기적을 주셔서 처음부터 가나안으로 안착하시게 하시면 될 텐데, 그랬다면 아들 요셉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기도 한데 왜 이런 힘든 여정을 거치게 하셨을까요? 비슷한 여정으로 출애굽을 할 때 광야를 40년이나 거치도록 하셨을까요?


창세기,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야곱까지의 여정은 왜 성경에 있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것은 남의 나라 신화나 역사 정도의 가치 밖에 없을 수 있고, 창조론도 진화론과의 논쟁에서 압도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이 성경을 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냥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의 능력을 믿어 나도 그 능력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니면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내용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일어난 실제적 사건이라고 그 객관성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면 사람은 어느 한 구석 의심을 하게 됩니다. 단순합니다. 자기도 그렇게 해 보면 됩니다. 물 위를 걸어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나도 예수님과 같아진다고 하셨으니 해 보면 됩니다.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병은 고사하고 자신의 두통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공동체의 신앙으로



야곱의 여정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 관한 것이고,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 곧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동의하게 되기 위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경륜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서 야곱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여정, 한 개인으로서의 여정을 마치고 민족과 나라로서의 여정으로 전환하는 시점이 바로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시점입니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천지창조의 시작 전에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도 인생의 목적도 알 수 없는 자리에게서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야곱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으로 전환되려 합니다. 창세기가 한 개인의 자아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말씀이라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지는 말씀들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이제 자기 외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다른 사람과 함께 신앙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함께 누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여정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는 사람이 단체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공동체에 대한 안목이 열리는 것, 하나님은 믿는 신앙이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을 서로 수용해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다름을 서로 섬기면서 가는 것이라는 것이 열린 안목으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야곱이 한 개인으로서 또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의 여정을 마치는 곳은 세상의 가치관이 의가 되어 다스리는 나라 애굽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보게 되는 세계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혼자서 굴속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길 것 같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서로 의지하게 살도록, 그리고 또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 곧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경영하시는 뜻을 가지신 분인데, 단지 자기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사람과 세상과 접촉을 끊고 고고한 듯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나 신부나 수녀 그리고 또 외딴 곳에 거할 곳을 짓고서 그야말로 서로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서로가 마음에 죄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규율을 정해서 그것을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신앙은 대우를 받을 것이 아니라 회개가 필요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등을 지려하는 것 역시 같은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세상 사람과 함께 있으면 죄를 지으니 가급적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온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휘둘리는 정도로 빈약하고 허약한 것입니까? 그렇게 휘둘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이지 세상과 어울려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 그리고 오히려 세상에 가서 종살이하듯 그들을 섬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여정이 애굽에서 마친 것은 민족으로서의 새 세계의 시작을 위한 경륜



야곱으로 인하여 애굽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그곳에서 처음에는 대접 받는 삶을 살지만 그 수가 많아지고 출산하는 능력이 애굽사람보다 월등하여 그 수가 많아지자 애굽의 두려움을 사게 되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 삼고 노역을 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노역이 가중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애굽에서 올려지는, 즉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시게 됩니다.


이는 천지창조의 때에 셋째 날에 세상의 모든 물이 한 곳으로 모이므로 땅이 드러나듯,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어서 시작되는 또 다른 여정, 애굽에서 시작되는 여정은, 또 하나의 창세기와 천지창조와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사람이 나오는 여정이라면 출애굽은 민족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되는 세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의 상징인 야곱의 여정이 애굽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 이후는 민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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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11) 또 하나의 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1. 07:00 Writer : 김홍덕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율법에 대한 개념을 흐리게 한 것



우리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은 율법, 곧 행위를 지켜내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인가 하면, 먼저 하나님의 법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이 생명의 본성과 같이 있어서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었을 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는데 그와 반대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시도, 곧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을 잊고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이 육신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그런 마음 때문에 자꾸 뭔가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사람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율법이 정죄를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잊고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이 주신 이 인생의 모습과 육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보고서 그것을 자기 기준으로 바로잡고자 생명이 표현되는 법인 율법을 하나님의 법과 다르게 해석하여 율법을 지켜서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행함으로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죄를 낳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제 죄를 씻고서 의롭게 된다는 의미인데 다시 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가치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거꾸로 세상에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은 이렇습니다. 모두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이고 의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성공의 기준, 그 의의 기준으로 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인생의 연약함을 극복하는(사실은 감추는 것) 것이 의로운 것인데, 그것은 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의에 대하여 반역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반역이 예수님의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으면 스스로 권능으로 내려와야 하고,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육신을 가지는 것인데, 잘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는 하찮은 인생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반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종교적인 규례를 잘 지켜내어야 하는데 지키기는커녕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예수님은 그 어떤 모습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길만한 것이 없기에 흠모할 것이 없는 존재인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며 세상에 보이시니, 육신의 능력을 극복하고 화려한 권능으로 높은 곳에 올라야 성공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반역자 그 자체요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할 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고,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법으로 율법의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법, 즉 하나님의 의가 행동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모양을 보니 율법과 같더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의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심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인생들,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의롭게 되는 것이 인생이고 성공이며 의라고 여기며 끊임없는 노력을 하던 인생들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모습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달은 것과 같이.


그런데 그 예수님의 모습이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른다는 가치관으로 볼 때 터무니없는 괴변이었기에 예수님은 다시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아니라 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죄인이 아니신 예수님께서 인생들이 가진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실체를 보이심으로 육신을 가지고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심에도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는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의로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히셨다는 것은 우리가 또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기준으로는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므로 율법을 주신 의로움을 회복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인이 되는 또 다른 죄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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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9. 07:00 Writer : 김홍덕

아들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은 그것이 족하다고 하고 죽기 전에 가서 아들 요셉을 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요셉을 보러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 애굽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제국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시는 사람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애굽은 내려가는 곳



이러한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 어쩌면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올라간다. 내려간다.’는 말은 위도에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장소와 출발하는 장소의 규모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 당시 주변에가 가장 큰 제국인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야곱이 거하는 곳이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애굽보다는 훨씬 크고 높은 지역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는 것을 내려가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셨다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니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이 높고 큰 성읍이고 도시고, 세상의 가치관이 다르시는 곳은 그 성읍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낮고 작은 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문제로 넘어 가보겠습니다. 애굽이란 하나님이 보실 때 낮은 곳이고,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인데 왜 그곳으로 자기의 사람 야곱이 내려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나 신앙을 떠나서 세상의 가치관이 대접받는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터부시하고 있고 심지어 다른 성도가 그렇게 가면 걱정이나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데 그것을 두려워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 또 아비인 이삭도 다 애굽으로 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내려간 이유도 다 같습니다. 기근 곧 흉년이 들어서 갔습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먹거리가 고갈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먹거리를 육신의 먹거리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 흉년이 들고 먹거리가 줄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줄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내려가는 것과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가는 사람이 애굽보다 높은 하나님의 의안에 있다는 것이고, 행여 애굽으로 올라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굽으로 가는 사람이 가진 의보다 애굽의 의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의를 자기 왕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내려간다는 것은 애굽의 의를 왕으로 삼는 것, 세상의 가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창 46:2-4)고 하신 것은 애굽에서도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야곱은 세상에 살아도 하나님의 의가 삶의 목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일을 두고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 46:4)



신앙은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 같은 것



많은 신앙인들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어떤 사업을 도모한다고 하면 다들 두려워하고 터부시합니다. 주일이 아니라도 세상의 가치관에 빠진 것을 심히 두려워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는 (그 교회가 평소에 주일날 돈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곳도 아닌데) 젊은 새댁들이 주일 예배를 다 마치고서 백화점에서 쇼핑한 것을 두고 세상 것을 좋아 한다며 뜨끔할 정도로 문제를 삼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기독교 신앙 안에 상당히 넓게 퍼져 있습니다. 세상과 함께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엄청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사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커지면 모여서 살려고 하고, 그런 생각은 많은 경우 사회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을 아주 무시하고, 심해지면 모여 살면서 사회와 격리된 삶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과 연관이 있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유명한 복서인 알리는 전성기에 팔로 자기 몸통을 가리지도 않고 싸웠습니다.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경계하고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없으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지속적으로 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게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신앙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결국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과 같습니다. 세상과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이란 항상 세상으로 내려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고 또 다시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또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다 애굽으로 내려가거나 팔려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애굽에 내려가서 아름다운 아내로 인하여 죽게 될까봐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부자가 동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교회의 시대를 맞이하고 또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정체성을 회복하는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기근이라는 것은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어야 사는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먹을 것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자기 본성에 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살고자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심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존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들인데 형식이 없고 의만 있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에는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당연히 그곳이 어디든 형식이 있는 세계이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큰 본성이시기도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위대한 영적 존재인 신으로 계신다는 그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세상을 또 사람을 만드셔서 그 존재의 영광을 표현하려 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쓰고 보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런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세계를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게 하시겠다는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형식이 없는 영적 세계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늘 하신 말씀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늘 나타나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당연히 세상이 있어야 하고, 애굽이라고 터부시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아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등지고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듯 살아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저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신앙 생활하는 것, 세상과 등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 아니고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지 애굽의 의를 네 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니 선생과 같이 가르치고 모르면 책망하라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종이 되어 섬기는 법입니다. 그 섬김을 본 사람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가르침을 받은 온전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비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고, 반드시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면 세상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는 것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분리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려가서, 그 세상을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아내기에 충분한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니 그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보고 그 생명이 자기가 온전히 주인 삼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에 아무런 지장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경계할 일도 터부시할 일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온전히 누리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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