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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자주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는 것이나 선교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때로는 남들이 하기 힘든 일을 자청하는 것도 그렇게 여기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 조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산 자와 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산 자는 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지체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그렇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모든 인생 중에서 먼저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산 자는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사셨는지를 알아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 우리 지체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사셨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아니 상식이 아니라 과학과 모든 지식으로 볼 때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니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일까요?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도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냐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으려면 먼저 어떤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



부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맛보려면 먼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일이 되기를 바라고 믿는다면 절대적인 조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죽음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 이 땅에서 교회에 다니며 육신으로 살다가 그 수명이 다하여 죽고 나면 하나님께서 부활을 시켜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수명이나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고 난 다음에 다시 육신으로 혹은 영으로 부활시키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은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효도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은 죽으심이 아닙니다. 대속했다고 하니 다들 그렇게 알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인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보이시고자 하신 것은 우리 인생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죄를 지은 분으로 정의하는 세상의 법과 그 법으로 표현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인생은 누구나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다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인생은 자기 스스로를 볼 때 세상에서 옳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면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는 일이 잘 되고 또 착하게 사는구나! 그러니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지!’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기 위하여 차를 산 바보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그러기 위하여 거하실 형식으로 만드신 것이지 이 육신이라는 형식이 형식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을 가진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빛나게 되도록 후원이나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죽음, 즉 세상에서 옳다고 여기고 성공이라고 여기는 가치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죽음이 자기 인생에, 또 신앙의 여정에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을 위한 것이지 육신의 수명이 다한 사람을 위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 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 (로마서 1:1-7)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자는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사람, 곧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옳은 것이라고 여기고 주장하며 사는 사람들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죽은 것과 같이 자기 육신을 섬기는 것에 내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보고서 그것이 옳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 –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


바로 이 부활, 이렇게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세상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고서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일에 자신의 육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자기 지체를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으로 죽었다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다시 살리신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지체를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우리 지체를 드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는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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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23) 종과 아들의 차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7. 07:00 Writer : 김홍덕

빚(debt)



성경에는 <빚진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빚’이라고 하면 재물에 관한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으로 한정하지만 이 ‘빚’이라는 단어는 옛날부터 ‘죄’와 ‘종’과 연관이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빚(debt)은 단순히 재정적인 채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세계에 있어 의무를 맡아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그 빚 혹은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죄가 된다는 개념적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죄’는 실제로 debt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이 말하는 ‘죄(하말티어:자리를 벗어나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해준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대하시는 바가 있고, 목적하신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빚’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과 삶의 의미는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떠나버렸기에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처럼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빚은 존재의 목적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나고 살고 있지 않다면 분명히 자신을 존재하게 한 이가 바라는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 할지라도.(물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스마트폰은 우리가 전화를 하고 인터넷 서핑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고 삽니다. 그렇다는 것은 스마트폰은 그 제조자나 구매자에게 좋은 전화품질과 빠른 인터넷 사용을 제공할 목적을 가집니다. 만약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죽었다, 맛 갔다, 고장 났다.’고 합니다.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망



죄는 곧 목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옛날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을 하는 군인이나 나라는 자신의 의를 관철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지면 그 목적을 관철시킬 수 없게 됩니다. 그것 역시 죄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국민으로서, 군인으로서의 모든 의미가 사라집니다. 곧 사망이라는 의미입니다. 목숨이 붙어있다고 해도 다 종이 됩니다. 전쟁에서 지나, 채무를 갚지 못하거나 종이 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사망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사망은 외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시계가 멀쩡해도 시간을 알려주어야 할 목적을 이행할 수 없게 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은 목적을 상실하면 생물학적으로 또는 의학적으로 아무리 살아있다고 해도 그것은 곧 사망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망과 죽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이가 가진 존재의 목적이라는 빚이 있는데, 이 빚을 갚는 것, 그 지은 이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상태가 바로 자기 존재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죄인 것이고,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는 존재의 목적을 이행할 수 없는 상태, 곧 죽음이요 사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이란 어떤 목적 아래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또는 사람이 만든 물건이든, 그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지은 이나 만든 이나 소유한 이가 기대하는 목적 아래 있으면 그 목적이란 빚을 갚는 종이 되는 것이고, 그 목적의 자리를 떠나서 죄 가운데 있게 되면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누구의 종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종은 어차피 자기 존재의 목적과 생사여탈의 권한을 주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존재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행하는 사람, 그 목적대로 사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의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것은 곳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 진 빚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빚을 진 것은 우리가 의도한 것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히려 은혜인 것입니다. 나는 존재할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적이 나의 빚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로 여긴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빚을 지게 되었다는데 그것을 은혜로 안다? 이것은 상식적은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이것을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입만 열면 감사한다고 말할지라도 감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것이 은혜가 아닌데, 살면서 얻게 되는 얼마 되지도 않는 육신이 입는 삶의 이익을 은혜나 감사로 여겨본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육신이 시험에 합격했다고? 사업에 성공하고, 아프다가 건강해졌다고? 그게 감사한 일일 되려면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 은혜인 것을 알고 감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박물관에 잘 칠해져서 전시된 자동차가 아무리 차체 관리를 잘 받는다고 한 들 진흙탕을 달리는 자동차보다 감사할리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자동차는 달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란 빚을 갚기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았었는데 만유의 주재를 표현할 존재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자기 존재와 삶의 목적으로 알고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기신 목적의 빚을 갚는 신실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서 볼 때 그 목적에 빚진 자, 그리고 그 목적의 빚을 갚아나가는 종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아들이면 아들이고 종이면 종인 것일 텐데 말입니다.


실은 이것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산다는 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뜻과 생각이 형식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육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모가 가진 생각, 생물학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보전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을 때 비로소 아이를 가지게 되고 또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던 일을 이어갈 아들을 얻기 원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 와서 희석된 듯 보이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사람의 일을 직업으로만 볼 때 그런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 아들을 얻으면 누구라도 자기가 하던 기업은 물론, 자기가 가진 생각과 의와 철학을 이어가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과 바람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 다시 말해서 아들이 그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준행하고 살 때 아버지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입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타나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란 어떤 신이고 존재인지를 표현해야겠다는 의와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과 뜻과 의를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존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만물이고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주의 광활함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표현된 것이고, 자연의 놀라움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형상이란 모양이 아닙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들입니다. 딱 보았을 때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들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그렇게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삶을 사는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의 모습과 오신 목적이 나의 모습이고 나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로 살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또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고 아들인 것은, 존재의 목적 안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사는 존재의 정체성은 다름이 아닌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알고 그 안에서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도 하고 또한 아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패자로서의 종이 아닙니다. 이 종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한 삶은 진정한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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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2-23) 다시 종이 되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6. 07:00 Writer : 김홍덕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신 15:15-17)


위의 말씀은 안식년에 대한 말씀의 말미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안에서 7년째가 되면 그 전에 종이 되었던 사람이라도 다 자유케 된다는 것을 율법으로 주셨는데, 그 중에서 혹시 7년째가 되어서 자유할 수 있음에도 그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는 종이 있으면 그 종의 귀를 문에다 대고 뚫으면 그 종은 영원이 그 주인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 신명기의 말씀을 로마서와 연결해 보는가 하면,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이 더 이상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안식년이 돌아와서 자유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려면 하나님과 그 사람은 이제 서로 안식하는 관계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오해하면 안 된다고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라는 것은 자신이 시인할 때 은혜가 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 있을 때 은혜가 된다는 말씀이기 때문임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죄를 더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죄를 짓지 않아야지!’라고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여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안식년을 맞아 자유케 된 사람이 다시 종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런데 바울 사도는 다시 종이 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7-19)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말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평생 세상의 가치관에서,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에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죄의 종살이 하던 세월을 청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나름의 선택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도 아니고 또 세상의 종도 아닌 사람으로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죄가 아닌 의에 종으로 드리므로 거룩하게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구분>된다는 것에서 보면 다른 삶을 살기를 권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문에 자기 귀를 송곳으로 뚫은 종과 같이 말입니다.


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 안에 살 때는 세상에서는 의인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죄인이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의(義) 안에 살고자 하면 세상의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세상의 의와 가치관 안에서 사는 것은 세상의 법을 좇아 사는 것이니 종으로 사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의에 종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선택이 있다면 <세상의 종으로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 의의 종으로 사느냐?>의 문제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 살자고 권면하는 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구원 받은 삶,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자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의로 자유함을 얻고서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한일일까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과 자유함을 얻고서 하나님을 떠나서 의롭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요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자신의 주님으로 알게 된다면 주인의 문에서 귀를 뚫고 그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의로움에 영원한 종이 되어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움의 종이 되어 살라고 지으신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 의의 종이 되고, 하나님 의에 순종하고, 하나님 의에 자신을 드리려면 먼저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쟁할 때 손해가 날 것 같아도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결정의 순간, 방법의 선택에 있어 성경에 있는 대로 결정하고 방법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과 이 블로그에서 너무나 자주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곧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려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가치관으로 정죄하는 사람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도 그들을 섬기는 것에 우리 몸을 사용하므로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육신으로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자 한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오히려 그 가치관에 사로잡혀 세상의 종살이 하는 사람들을 섬기며 살면,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이게 되고, 왜 사는지 몰랐던 인생의 목적이 깨달아지며, 중풍병자와 같이 삶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머리의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육신의 삶이 목적을 아는 삶이 되고, 감각 없는 문둥병자와 같이 온 천하로 표현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목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의가 그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어디에 순종하고, 어떤 의에 종이 되어 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하여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목적에 대한 빚을 진 것이고,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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