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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을 죄로 보기에 의문이 많은 신앙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이 명제, <인생이 연약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상태가 연약한 상태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상태를 어떻게 받을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어려워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언제나 “좀 더 열심히!”라는 식으로 노력하고 애쓰면서 힘들어 하는 것, 그리고 늘 의문에 싸여 있는 것은 진정한 어두움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무작정 노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의 선후가 분명해져서 바로하고 쉽게 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어두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신앙인들은 늘 예수 믿는 것을 열심히 하려 노력하고 애쓰며, ‘어디까지 가야 그래도 좀 된 자리가 될까?’ 궁금하고, 살면서 행여 하나님 앞에 범죄 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간수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고 사는 것의 열매가 무엇이냐고 바울 사도는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바로 창세기 1장2절의 말씀과 같이 혼돈스럽고 어둡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늘 신앙에 의문이 있고, 그래서 교회에 가서 목사에게 늘 묻는 것이 ‘이렇게 해도(do) 되는지? 무엇을 해야(do)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를 묻습니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 하나님의 안목이 열리기 전이라는 고백일 뿐 전혀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 행동에 대하여 관심과 의문을 가지고서 늘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두움 속에 사는 것은 육신 가진 자신의 삶은 연약하고 불온전하기에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보완하고 상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육신의 연약함 자체를 죄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행동으로 그 죄를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무화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 한 것과 같이. 이것이 바로 죄에게 순종하고, 죄에게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이 인생을 보는 안목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온전합니다. 따라서 사람도 온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은 상태를 회복하면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은 인생의 모습을 자꾸 정죄합니다.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쌓아서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대로는 죄가 있기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경건해지려는 마음으로 육신의 연약함을 바로 잡으려 하고 노력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더 의지력을 가지고 기도를 빠지지 않기를 구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본성을 이겨서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쩔까요?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의 연약함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히 만드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온전하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으로 여김과 같이 자신도 그렇게 인생을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목을 가진 것입니다. 생명이 같아야 안목이 같은 것이니 육신을 하나님과 같이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육신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시는 것에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생명이 내 안에 거하실 수 있도록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대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본다는 것은 자기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내 육신의 것을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순종은 바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삶이 된다는 것은 죄가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있는 형식 안에 거하시겠습니까? 괜히 하나님께서 거룩한 곳에 거하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한다는 것은 거하는 자리와 거하는 존재의 격이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신다면 그 사람의 정체성도 하나님과 같은 격을 가진 것입니다. 콜라병에 콜라가 담기면 다 콜라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부정하다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드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드린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본 사람들이 육신이 선교사가 되는 것이나, 심지어 이교도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육신의 삶의 모양이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바치는 삶이 된다고 믿는 것이나, 산 사람을 제물로 죽여 바치는 것이나 육신이란 형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형식을 갖출 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삶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 하나님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여기시는 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부족함과 부정함으로 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보기에는 선해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의로운 것이었겠습니까?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연약함,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므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표현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지으신 목적 안에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연약함을 허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인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그 사랑을 인하여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아들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나타나면 아버지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연약함을 보는 시각은 이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이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고, 그것이 의로운 삶이며, 그것이 다시는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삶인 것입니다.





구글에 의한 번역본(Translated by Google)



A questionable faith to view weakness as a sin


The weakness of our flesh is at the heart of our faith in God. That is to say, this proposition, "How do you understand that life is fragile?" The state God made is a frail state. Therefore, this is a question of how to receive the condition of the person God has made.


It is a real darkness that many people have difficulty in believing in God and are constantly struggling with struggling and trying hard in the way of "living harder!" Jesus is the light. When the light shines, everything becomes clear, not just the effort, but the end of all things must become clear and easy to do, but not because it is dark.


When we think about it, believers always try to work hard to believe in Jesus, and wonder, "How far will it be a place to go?" The apostle Paul is asking, "What is the fruit of living all of your care in protecting your actions while you are nervous?"


And the answer is confusing and dark as Genesis 1: 2 says. So there is always the question of faith, so going to the church and asking the pastor all the time is' do? What do we do (God) pleases? ' I do not know. It is doubtful. It is not only a confession but a revelation before God's world is created, before God's eyes are open.


It is in so much darkness that people do not know what to do in front of God because they have concerns and doubts about their own actions. This is because they have to worry about how they can compensate and compensate for their weaknesses and weaknesses . That is, the weakness of the body itself is regarded as sin. And to hide that sin by an act that can be forgiven. Just as Adam tried to cover up shame with figs. This is the obedience to sin and the giving of sin to sin.




As God sees it, the eyes that see life


God created man. And God is perfect. Therefore, what God has made is perfect. Therefore, people are also perfect. If God restores the state he has created, there is no sin. However, people continue to condemn the appearance of God's life. There is sin. That is why we are trying to cover up our sins by building some kind of action. Just because there is sin, you have to do something.


Ironically, however, it is sin. I am trying to correct the weakness of the flesh with a heart to be devoted to God, and I hope that God will help me. I try not to fall in prayer with more willpower and try to be a good man by overcoming the nature that arises from the heart. And what do you do? It is God who made man so ...


Therefore, we must change the perspective of the weakness of this human body. That is to acknowledge and believe in God. It is believing that God made man whole. It is God who has the eyes of God to see his life so that God is perfectly good at his life. Life is the same, and the eyes are the same. It is the life of God to see the body as God. It is God's righteousness. So it is truly true to God.


And so having God's eyes is that God uses his life. It is because I give my body to what God sees in the eyes of God. It is because God's righteousness and life are to give in to dwell in me. That is obedience to God. That is to give ourselves to God.




The true meaning of giving to God


Therefore, giving yourself to God is no different. It is God's purpose to see man as he has made man. To see it as it is is to acknowledge and obey God's purpose and meaning in your life. That is to believe in God. It is not believing in God to believe that God is the one who listens to my flesh like a buggy bat.


That obedience is to give oneself to God, and it is a sinless life that God lives. Will God live in sinful form? It is not that God is living in holy places. To live is to live in the same place as the living being. If God dwells, his identity is the same as God. If you add coke to a coke bottle, it is like being a coke. Can such a person be guilty of sin? Is God unfair? I can not.


It is no different that we give ourselves to God. That is what we live for as God created us. The people who have literally seen the word "do not know" say that the flesh becomes a missionary, or even the pagans even sacrifice a person. It is not only that there is such a difference, but that the appearance of the body of the flesh is a life given to God to be a pastor, a sacrifice of living people, or a sacrifice to give sacrifice to God. It is the same in that it is considered.


It is God who gives us our lives according to the purpose God has made for us, and the life that is obedient to God is to be like God in the eyes of this fleshly life that we have given to us in the end.


The weaknesses of our lives that God considers perfect are seen as lacking and denying, and overcoming them is seen as goo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Jews who crucified Jesus, how rightful was their deeds? It is the same thing.


Therefore, we have to live in the purpose that we have in order to live a life that expresses love, the character of God, because of our weakness, because we love each other because of it. Not because of weakness, but because of its weakness, because we love one another, because of that love, people know that we are Jesus' disciples.


Knowing that you are a disciple of Jesus means that you will eventually become a disciple of the Son of God, and that is what God reveals in the end. When the son appears, the presence of the father appears naturally. The image of God is expressed. That is what God lives for our purpose. The point of view of weakness is this. It is a obedience, a gift to God as a weapon of righteousness, a life of righteousness, a life in which it is impossible to sin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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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의에 대한 이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으면 죄가 없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늘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육신의 행동에 관한 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가진 육신은 늘 연약해서 자기가 선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고 다짐을 해도 예기치 않은 불이익이나 무시를 당하면 돌변하듯 하는 것이 인생인지라 그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경건한 것 같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가보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하다고 한 것을 사람이 부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주장하고 논쟁하겠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을 같은 급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으니 그 또한 큰 죄악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자꾸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할까요?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데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이 의로운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겸손이나 경건함이라고 생각해서 일까요?


그것은 육신의 연약함을 인함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이 있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 사랑



육신은 연약합니다. 하늘을 날지 못하고 물속에서 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연약함을 말할 것도 없고, 몸을 위해 먹는 것 조절하는 것과 같은 것도 의지가 약해져서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뭐 어렵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 대단한 의지력으로 뭔가 성취해낸 사람들을 볼 때 존경하는 마음은 들지만 사랑으로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다. 자기 의지로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씻을 물을 떠 주고 씻겨 준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데 왜 이러냐고 도리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연약해서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수고하면 그 수고로 인하여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연약한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은 그럴 때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늘 감추려 합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으로부터 지속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연약함을 개조하려고 무단히도 애를 씁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에 널려 있다시피 한 강좌들, 학원들, 그리고 미디어에 자기 개발이나 연약함을 극복하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정보와 활동이 넘쳐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세상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기에 사람들이 아무리 세상을 재해석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또 위대하게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근원이고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연약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의 연약함을 극복하려는 세상의 노력보다 훨씬 중할 뿐 아니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떠나서도 연약함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와 불법 아래 있던 죄의 종



바울 사도가 우리가 원래 죄의 종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이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감추고 개조하려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가 아닌데 사람이 그 자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내가 정한 사람의 자리에 있지 않고 어떤 자리에 네가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이 그랬기에 우리가 오늘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그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 가진 이 삶을 너무 연약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대책을 늘 수립합니다. 언제나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할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하느라 인생을 다 소비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이란 늘 그 주인에게 종속되어 전전긍긍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흔히들 “돈(money)! 돈! 돈!” 하는 사람을 보고 ‘돈의 노예’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연약하게 여기고 늘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바로 그것에 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떠난 것에 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종이요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부정과 불법에 드렸던 것(롬 6:19)>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과 다른 법을 가지고 사는 것이니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사는 것이 불법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반문합니다.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고 그것의 답은 바로 창세기 1:2절입니다.

땅(흙-사람)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


(계속)





Discrimination against sin and righteousness



It is not the right understanding of the Bible that God teaches, learns, and learns that it is from repentance when he confesses himself as a sinner before God and praying always before God. That is because it does not recognize the Bible,


It is because people count God's righteousness on the basis of the act of the flesh, even though God has spoken clearly, that he always considers himself a sinner. In other words, the body of life is always weak, so that if you are willing to live a good life, and if you are willing, you will be unfairly disadvantaged or ignored. This is because it is exciting.


It seems to be very godly in some ways, but rather to blaspheme God. For what God said to Peter to go to Cornelius is to claim that "man is unclean what God said to be righteous." To claim and argue with God is a great sin, because it can not be done if we do not see God and ourselves in the same class.


Why do people say they are not God, but they are still sinners? Of course, it is not justified to live without knowing God. If you believe in God, you must have confidence that you are a righteous person, but why you can not. Is it really because we think that having such a mind before God is humility or reverence?


It is because of the weakness of the flesh. Because God and man are seen from different angles about the weakness of the flesh.





God's character and love appear in weakness



The body is fragile. Not to mention the weakness of not being able to fly in the sky and not living in the water, it is the person who does not do well because of the weakening of the will to control eating for the body. That's hard to do.


But paradoxically, because of its weakness, we depend on each other and love each other. When I think about it, I feel respect when I see people who accomplish something with something that ordinary people can not do, great willpower, but I do not want to wrap it with love. People who can do well with their will will not like it if they wash it and wash it. I may be angry if I can do this because I can do it myself.


On the contrary, if we labor our flesh for those who can not be weak, we will know what love is due to their hard work. The man is so fragile that God saw it very well because it is when the love of God is revealed.


But people are ashamed of their weaknesses. So I always try to hide it. It is the image of a man who continued from Adam who ate the fruit of choice. In addition, I try my best to remodel its frailty. I do not know how much information and activities are overflowing in the courses, the institutes, and the media overcoming self-development or weakness that we have been living around. All of that is because the world demands it.


But the source of this world is God. Because God created the world, no matter how people reinterpret the world, beautify the world, and strive with greatness, they can not go beyond God's righteousnes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e source and fundamental. The righteousness and will of God, who made man weak, is far more than the world's efforts to overcome the weakness of man, but it can not be overcome. That is why we do not throw stones at people who accept the weakness even when leaving the Bible.




A species of sin under injustice and illegality



Paul's apostle told us that we were originally slaves to sin, that all of us were in positions to overcome, hide and remodel the weakness of this body according to the values ​​of the world. It is not the place of God's appointed person, but the person has gone to that place. To Adam, who is so embarrassed to eat the good and bad, God asked him, "Where are you?" God asked Adam, 'Where is I in the place of the man whom I have appointed?'


It was not Adam that we did today. We are all so God has explained it to Adam. Everyone feels very weak in this life with the flesh that God has made. Therefore, I always establish measures against this. I always consume my life trying to find a way to overcome the weakness of the body. That is to live as a servant of sin.


Slavery is always dependent on the owner and living a life of prejudice. Commonly called "money! money! Money! "And it is called" slave of money ". It is imperative that people look at their physical appearance as weak and always try to do it. God is bound to what he has left. I am a slave to sin and I am under sins.


This is what the Apostle Paul says is that it was given to injustice and unlawfulness (Romans 6:19). It is illegal to live in a different world than God in the world God created. It is like illegal to live in a democratic country, a person who espouses communism i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Apostle Paul speaks. The answer is Genesis 1: 2, "What fruit did you then get?"

The earth (earth-man) is chaotic and empty, and darkness is on the deep ... (Genesis 1: 2)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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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이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삽시다.’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 믿으니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힘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지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지으려고 해도 은혜 아래 있으면 그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시는 의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씀은 비단 이 한 구절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의로운 것이고,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더 이상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줄곧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예 그것이 언제라도 기도를 시작할 때면 먼저 회개부터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순간,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이 되면 그 이전에 하나님을 만나거나 종교적인 상태 안에 있다가 그렇지 못했던 동안 죄를 지을 수 있기에 기도할 때는 항상 회개부터 하고 시작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가르치고 또 그런 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합당한 의문을 가져야…



사람들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말씀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의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므로 하나가 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대로 믿지 않고서 자꾸 이상한 논리를 더해서 늘 회개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등 이상한 말들을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까지 하신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한번쯤은 <‘왜 그럴까?’>라고 고민해 봐야 하는데, 그저 인생은 연약하고 육신도 약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성경과 같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시고 있는데, 오늘도 자신을 돌아보면 수많은 죄들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 상충됨을 인하여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왜 오늘 죄를 지었지?’라고 생각을 하던가, 아니면 ‘내가 사람으로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라든지, 그게 아니면 ‘하나님과 나는 죄에 대한 개념이 다른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왜 오늘 죄를 지었지?’


바울 사도는 뒤 이어 나오는 로마서 8장에서는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정죄함’ 자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의 여부를 떠나 누구도 예수 안에 있는 이에게 죄가 있다고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은혜인데, 그 은혜를 알고도 누리지 못하는 자신, 뭔가 그곳에 다다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마냥 연약해서 그렇다고만 하고 있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죄도 은혜도, 율법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죄, 사람이 생각하는 죄



이렇듯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인도 아니고,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누구도 정죄할 수조차 없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있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헛수고 했구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죄를 지을 수도 정죄함도 없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스스로는 늘 죄가 있다고 여기며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죄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에 대한 생각 하나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죄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고,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법이 다르다는 것이고, 법이 다르다는 것은 의가 다르다는 것이며, 의가 다르다는 것은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죄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다른 두 존재 사이의 관계입니다. 누가 주인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도, 죄도, 선과 악도, 법도, 의도, 정체성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 곧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을 지은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곧 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시는데 사람이 날마다 회개하고 있다면 누구의 시각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사람이 죄에 대하여 또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생각, 하나님과 다른 그 생각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스스로를 늘 회개하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것을 죄로 여기는 법이 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 법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인 스스로나 또 다른 지체를 죄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온전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바른 견해



그것은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다짐도 하지만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육신을 가진 삶이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질로 여기시지 않는 것을 자기가 본질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그 존재에 대한 주관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자기 육신의 삶의 어떠함을 본질로 아는 사람은 ‘어떤 기도를 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 늘 하나님께 육신의 것을 기도합니다. 그것도 기술이라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제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성공한 모습을 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도모하는 일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일입니다.’라고...... 하나님을 속이려 합니다.


반면에 은혜로 아는 이는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적으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없던 존재였는데 생명으로 되었다는 것을 은혜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존재하게 된 목적을 본질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목적,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육신의 어떠함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하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위하여 주신 삶에는 당연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부족한 것 없이 이미 주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지고 주인을 맞은 자동차가 그 주인에게 기름을 넣어달라고 기도할 리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은혜를 아는 이는 사람의 행위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므로 그 행동으로 인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죄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떠나는 것, 그것이 유일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아는 사람,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고 삶이 되고 행동이 되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니 도무지 죄를 지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육신으로 실수도 하고, 자기가 사는 세계의 법을 어길 수 있습니다. 그때는 그 법에 따라 육신을 드리면 됩니다. 수고하기도 하고, 벌도 받기도 하고, 희생하기도 하며, 또 때론 법의 혜택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여긴다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할 죄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지금도 죄인으로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서 비롯된 죄에 의하여, 그 행동과 언행이 죄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것을 피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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