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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레위의 집에서 먹고 마시는 일로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논쟁이 있었고 이어서 요한의 제자나 유대인은 금식하는데 왜 먹고 마시느냐는 논쟁이 이어졌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신랑이 있으면 금식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함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씀으로 시비를 일갈했다.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신랑이 있으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답도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데, 이어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씀은 더 어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어색한 예수님의 답변 안에는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혼인 잔치 속 신랑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남자인데 제자들이 신부, 곧 여자로 비유된 이유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비단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신부와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육신이 십자가에서 향유 옥합처럼 깨져 쏟아진 말씀()과 피(생명, 그리스도의 본성)를 본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면 여자의 몸에 남편의 유전자가 들어가듯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심기고 그 말씀을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게 하나님의 법이기에 성경이 말씀하시는 결혼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신랑이다.

 

그리고 금식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게 없을 때 간절함으로 구하는 의식이다. 존재를 인식하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건 존재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금식해야 할 상황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인생의 존재 목적 아닌 다른 게 것을 비워내고 간절하게 구할 것이 있을 때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금식할 이유는 없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음식을 먹고 활동하게 만드셨고, 먹고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함께 있다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이 신랑을 빼앗길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는 이 말씀 속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설명되고 있다. 더 깊은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신 변화산 사건 이후에 하겠지만, 여기서도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 자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그리스도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기대하고 믿었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그런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는 메시아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그런 그리스도라 여겼다.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은 그리스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신랑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므로 자신들이 생각한 그리스도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제자들의 믿음과 무관하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고,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변함없었다. 다만 그리스도는 십자가 따윈 지지 않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유대인의 왕이 되어 가난한 사람 하나 없는 나라를 만드실 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제자들의 신랑은 그렇게 빼앗긴다.

 

빼앗기는 신랑은 사람의 그리스도

 

문제는 오늘날 신앙인들 역시 제자들이 빼앗긴 신랑인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되게 해 준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속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된 분 정도로만 생각한다. 기도하는 게 증명한다. 하지만 그런 그리스도는 반드시 빼앗긴다. 그렇다면 금식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신랑, 곧 모든 사람에게 존재와 인생의 목적을 알려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과 의와 뜻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이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체성,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냐는 또 다른 문제다. 당시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아닌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가난도 질병도 없는 나라의 임금으로서의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신랑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신랑을 빼앗아 간 것이다. 더욱이 신랑인 그리스도를 빼앗아 간 이는 다름 아닌 자신들, 자신들이었다. 자신들 맘대로 생각한 그리스도의 기준이 신랑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의 기준이다. 진정한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이 신랑은 반드시 빼앗긴다. 진정한 그리스도를 간구하는 금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그랬다.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변화산 이후 제자들은 한 번도 웃지 못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그들의 마음은 신랑 있는 혼인 잔치 같진 않았다. 자신들이 생각한 그리스도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그리스도가 없어진 것은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을 버려두진 않았다. 성령이 오신 것이다. 성령이 오시자 제자들은 달라졌다.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갔던 제자가 아니라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케 하는 사람이 되었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로 다시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로 목욕한 사람의 진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성령이 오신 제자들이 바로 새 술이 담긴 새 부대다. 새 술은 이전에 없던 그리스도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이긴 자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세상 기준에 가장 천하고 악한 죄인이었다. 십자가를 그 이유로 지신 것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세상에 없던 새 술과 같은 분이 그리스도고, 성령으로 인하여 그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으로 거듭난 육신 가진 사람이 새 부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십자가를 지는 본성, 너 옳다고 인정하게 되는 본성,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신랑 없는 신부다. 인생이 혼인 잔치처럼 아무리 즐거워도 껍데기일 뿐이다. 세상에서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를 믿어 풍요롭고 평안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들 아무 소용 없다. 오히려 금식해야 한다. 낮아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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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대표적인 죄인이라면 세리와 창녀였다. 창녀야 어느 시대나 죄인의 부류에 넣지만 세리는 꼭 그렇지만 않다. 다만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 상납할 세금과 무관하게 세리의 재량으로 징수한 뒤 자신의 부를 축적했기에 지배국 로마에 세금을 내는 유대인들은 세리를 매국노로 여겼다.

 

의가 같지 않으면 밥도 같이 먹지 않는 유대인들의 문화상 세리와 함께 먹는 것, 그것도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는다는 건 난 이들과 같은 의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세리 마태와 함께 먹는 예수님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다. 죄를 사하는 의로운 자가 죄인과 함께 먹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에게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므로 이들의 비난을 일갈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이 짧은 사건은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이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병자를 고치는 의사가 같은 병에 걸릴 것까지는 없는데,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중요하다. 그런 예수님이기에 지금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 취급한다는 것을 아심에도 죄인과 먹고 마시고 계신 것이다.

 

의인이신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이건 의롭다면서 죄인과 먹고 마시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다른 하나님의 법이다.

 

그런즉, 기독교인들이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과 말씀에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법리가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일반적 상식, 세상의 지식으로 보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건강한 의사가 병자를 돌보듯 의인인 상태에서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면 된다. 이것이 세리와 먹는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 가치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고 외친 사람들의 가치관과 맥을 같이한다.

 

이 말씀을 단순하게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명제 아래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법이 그대로 녹아 있다. 자신을 구원받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이 법이 그대로 보이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과정을 거친 사람이어야 이 말씀 속에 있는 예수님 구원의 법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육신은 우리와 같으나 그 육신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만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육신이 십자가에서 옥합처럼 깨어지니 그 속에 있는 물(말씀)과 피(생명)가 드러났고, 그것을 본 사람이 자신도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가진 말씀과 뜻이 자기 삶이 되어야 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의인이심에도 죄인이 되신 것이다. 자신은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니지만 세리, 창녀와 먹고 마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 속에는 죄인들의 자리에 함께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이기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죄인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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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병든 것이 비정상, 안정되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반대는 정상적인 상황, 안정되고 평안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을 일반적으로 안식이라고 하고, 안식의 상징은 이다. 여기서 한 가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죄가 사함받았다는 말씀하심으로 낫게 했다. 누가 생각해도 병을 낫게 하는 방법으로서 쉽게 이해되는 표현은 아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것이 쉽다고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병든 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예수님은 육신의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이 죄를 사한다는 말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마음으로 참담하게 여긴다는 것도 다 아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는 상대적으로 일반상식적인 표현보다 죄를 사한다는 말이 더 쉽다고 했다. 더 쉽다는 건 더 적합하고 맞는 말이란 의미다.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의 반발을 아신 예수님께선 다시 네 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관점에선 더 쉬운 말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선 더 어려운 말이라며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이 말이 예수님께서 태도를 바꾼 걸 의미하진 않는다. 이건 안식이란 관점에서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안식을 얻는다는 말이고, 안식을 얻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에게 있어 안식은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 거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존재 목적 안에 들어갈 때 안식을 얻는다. 어떤 일이든 목적대로 완료되면 쉴 수 있고, 일이 끝나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집이기 때문에 집이 안식인 것처럼.

 

죄는 자기 자리,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죄가 있으면 안식할 수 없다. 이상하고, 고장 나고 병든 건 쉴 수 없다. 자기 자리, 자기 본연의 존재 목적 상태를 벗어나면 안식을 누릴 수 없다. 학생이 수업 시간에 오락실이나 당구장에 있으면 불안한 이유다. 그러므로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인의 상태인 병자에게 집, 곧 안식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죄사함 받았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이 낫는 기적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이들(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 문둥병자 등을 치유하는 걸 봤다. 단순하게 병이 낫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영광으로 여기시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영광이란 말의 뜻을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먼저는 만약 육신의 병이 치유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신다면 병이 나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광은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이치를 생각하고 성경을 봐야 한다.

 

그리고, 영광의 의미다. 영광은 헬라어로 독사’(δξα)‘라고 하는데, 생각하다, 나타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마라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는 의미다.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과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나타내고자 하신 일을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창조 목적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것이다. 즉 자기 자리를 떠난 죄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안식이다. 죄인의 모습을 대변하는 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집이라는 안식으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 목적을 떠난 사람이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얻는 것

 

중풍 병자가 고침을 받는 모습, 그것이 죄사함이자 안식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이 나타난 것이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인 병자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사람을 안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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