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6

(마가복음 2:1-12) 중풍과 죄사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24. 09:10 Writer : 김홍덕

육신은 멀쩡한데 정신을 빼앗긴 귀신 들린 것,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고 깨닫지 못하는 문둥병,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 같은 육신의 삶. 성경에 나오는 병들은 이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 곧 죄로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의 상태를 죄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런 병들을 고친 것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 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생명이 되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받았다.”고 하신 것같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하지만 어지간해선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유는 자신을 볼 때 죄 없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죄라 하지 않는다. 행위는 존재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행위 이전에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다.

 

여기서 죄의 개념까지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람의 생각처럼 행위가 아니라 정체성이 죄의 기준이다.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 아담에게 물으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하나님이 보시는 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다면 중풍 병자와 죄사함이란 관점에서 조명해 볼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 같은 죄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의 죄는 당연히 하나님의 개념이기에 예수님께서 사하시는 죄 역시 정체성에 관한 죄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사람은 행위를 죄의 기준으로 삼기에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니 다른 사람도 죄인인 상황에서 누가 누구의 죄를 사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마주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이것을 보여준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사람, 그것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데, 그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사했다고 말하니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신으로 인식하는 지금도 죄에 대해선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앞서 전도를 이야기할 때, 전도란 거듭난 사람,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과,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자 자기가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모습으로 깨닫고 믿으면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또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임을 설명했다.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역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보고 믿음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이 거듭남이고 전도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에게 죄가 없듯,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을 보고 거듭난 사람 역시 죄가 없다. 죄가 있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먼저 그리스도로서 삶을 산 사람의 삶은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의 삶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하고 죄 사함을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자, 곧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 2:10)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보이셨음에도 사람은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심지어 오늘날은 다른 사람의 죄는 고사하고 자신도 죄가 없다고 믿지 못한다. 교회에서 기도를 가르칠 때 먼저 회개부터 하는 것은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믿지 못함이다. 회개는 죄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같이 분명하고 쉬운 복음 앞에서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 거듭남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신앙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희망 사항일 뿐 자신도 자신이 죄 없는 존재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를 거듭난 상태라고 하는 모순과 어두움 속 희망 고문일 뿐이다.

 

또한 이 어두움 속 신앙인들은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치유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으로만 본다. 병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상태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그 관계의 회복, 곧 죄를 사함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듭남과 구원과 죄와 예수님 치유의 본질적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게 죄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서 노력하는 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이 된 말씀이 없기 때문이고, 삶을 이끌어갈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죄다. 그리고 우리 육신 곧 삶이 돼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인생의 목적이다. 이것에 대하나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죄인의 모습인 중풍 병자 같은 모든 사람 말씀이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육신이 깨어지므로 육신이 된 말씀을 드러내셨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신을 발견하면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님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다른 사람의 죄도 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래서 중풍 병자에게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고치신 중풍 병자의 모습에서 말씀이 삶이 되지 않은 자신이 발견될 때 구원이 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신 일이 자기 일이 되고 또 남의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신앙의 여정과 고백 없이 구원은 없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 문안하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감사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이 문안에는 주목할 게 있다. 고린도 교회에는 모든 구변과 지식이 풍족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며,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걸 언급한 점이다.

 

바울 사도의 이 문안은 칭찬성 문안과 권면인 듯 보이지만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십자가의 능력을 대비시키는 고린도전서 흐름을 고려하면 구변과 지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은사도 견고하고 풍성하다는 언급은 액면 그대로 칭찬이라 보기 어렵다.

 

구변과 지식과 증거와 은사가 견고하고 풍성하다면 신앙적으로 안정적이고 분쟁보단 화합하는 모습이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지식과 증거와 은사가 풍성한데 분쟁에 휩싸였다. 그것도 신앙적 관점에서. 그들이 가진 신앙적인 지식, 간증의 증거 그리고 많은 은사가 화목이 아닌 신앙적 주장을 펼치며 대립하는 분쟁의 도구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아주 귀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귀함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을 세상의 꼭대기에 두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이 존귀함은 낮아지는 데 있다는 걸 사람이 모른다. 이 어두움으로 인해 신앙적 가치 기준으로 더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을 높이 올려놓는다. 신학적 자격을 가진 사람을 강단 높이 세우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알고 보면 하나님 말씀의 존귀함은 낮아지는 것

 

고린도 교회도 그랬다. 지식과 증거와 은사의 풍요 정도가 상대에게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의 생각과 가르침을 상대가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주장이 부딪혀 분쟁이 되기 때문이다. 세례는 침례가 옳다는 것과 안수만으로 된다는 주장이 교단이 갈라진 것도 맥락이 같다.

 

이런 분쟁은 풍성한 신앙적 지식, 증거, 은사의 존귀함이 낮아지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열어보면 십자가로 낮아지는 것임을 모르면 신앙적인 많음이 권세가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성령만 오시면 알게 되는 말씀을 몰라서 공부한 신학을 수학했다고 대접받는 목사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의 어떤 요소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려 하고 우위에 서려 하며 대접을 받으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른다는 증거다. 귀한 것은 높아지고 대접받는다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귀한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라는 낮고 낮은 모습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신앙적으로 갈라지고 분쟁하는 이유가 세상의 지식을 좇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가복음 2:1-12) 중풍 병자의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20. 05:00 Writer : 김홍덕

이제 예수님의 소문은 온 유대 땅에 널리 퍼졌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또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예수님 계신 데로 몰려왔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도를 전하셨다. 예수님이 전하신 도는 십자가의 도다. 그렇게 전하신 도를 마지막에 직접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자 예수님을 만나기 힘들어졌다. 이에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 계신 곳 지붕을 뜯고 병자를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치셨다. 그러나 핵심은 그게 아니라 병자를 고치실 때 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에게 큰 문제가 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이 핵심이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죄를 사한다는 말은 사실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보이셨음에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사람들마저 죄를 사한다는 말을 심히 경계하고 터부시하는 건 지금도 같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건 사람이 쉽게 용납하기 힘들다. 그때의 서기관들이나 지금의 기독교인이나 가치관은 같다.

 

사람이 죄를 사하는 것에 앞서 먼저 중풍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중풍은 귀신 들린 것과 반대다. 귀신 들린 것이 머리를 빼앗긴 상태라면 중풍은 반대로 머리의 생각이 육신을 주관하지 못하는 병이다. 머리에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어도 육신이 전혀 그 머리의 생각과 뜻을 이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혹은 엉뚱하게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중풍이다.

 

모든 병이 그렇듯 병명을 알고 병을 고치려는 의사가 있어야 나을 수 있다. 자신이 중풍이란 것을 알고 이를 고치려고 해야 고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이전에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달리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고치려 한다. 이 중풍 병자는 그것을 알았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으려 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기 전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도를 전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들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도와 자기 삶이 상이함을 발견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중풍 병자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중풍 병자 역시 예수님의 도가 자기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중풍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 이를 고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것이 이 사람의 믿음이다.

 

믿음은 사람의 생각을 예수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되도록 순종하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셨고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과 자기 삶이 다름을 깨닫는. 자신이 중풍 병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중풍임을 깨닫는 회개고 믿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인하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이다.

 

그러나 이 병자는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인 만큼 예수님을 찾는 게 당연하고 가장 온전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자기 삶이 예수님의 말씀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게 회개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게 믿음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도를 따르면 자신이 회복된다는 걸 믿는 이것이 믿음이다.

 

중풍 병자의 일을 보면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삶이 성경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성경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자기 생각처럼 육신이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모두가 중풍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지붕에서 달려 내린 중풍 병자와 그 일행과는 다르다. 자신이 중풍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건강하고 구원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대로 살려고 여전히, 항상 노력한다. 노력하는 건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둡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죄와 사망의 상태다.

 

곤경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