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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0-45) 문둥병자를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17. 09:16 Writer : 김홍덕

한 문둥병자,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꿇어 엎드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 간청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니 문둥병이 사람에게서 떠나갔다. 아주 중요한 게 아닐 수 있지만 이때부터는 예수님이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이후다.

 

문둥병은 몸의 감각이 없어지는 병이다. 그래서 몸이 썩거나 심지어 잘려 나가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이제는 거의 치료할 수 있는 이 병은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느끼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병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사람에게 그 뜻을 말씀하시는데 사람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썩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병이 문둥병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찾으면 만나리라말씀하신다. 이건 숨바꼭질 같은 게 아니다. 하나님은 숨어 있거나 사람에게 그 존재를 감추지 않는다. 그런데 찾으면 만나리라 말씀하신 건 사람이 마음만 바꾸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 수 있도록 말씀하고 있고, 표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언제라도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 만날 수 있다. 단 육신의 성공을 돕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생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자기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늘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 그게 문둥병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 너의 존재 정체성이 무엇이며, 너와 나는 어떤 관계인지를 물으신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 여호와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늘 무엇을 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육신으로 성경을 지킨 공로를 드리려 한다. 그렇게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 곧 장사하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느끼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멀어져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심각한 문둥병의 상태가 이것이다.

 

흥미로운 건 문둥병자가 찾아와서 예수님이 원하시면자신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며 간청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내가 원한다고 답을 하시니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둥병에서 회복되는 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무감각하지 않고, 민감하게 듣고 순종하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이다.

 

문둥병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병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문둥병이 고쳐지기를 원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당연함이 당연하게 느끼는 이유가 육신의 건강이란 관점이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과 그 목적을 기반으로 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걸 예수님이 원하신다는 이해 안에서 당연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고치기를 원하는 문둥병이란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시니,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상태가 회복되어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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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001 - 개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2. 3. 14. 06:45 Writer : 김홍덕

고린도전서는 바울 서신중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경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명한 사랑장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앙의 현실적 부분, 제사음식, 결혼, 이혼, 간음, 헌금 등에 관한 말씀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는 기독교가 간과하는, 어쩌면 간과하고픈 말씀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바로 신앙적 이유로 인한 교회의 분열, 복음의 분열과 다툼이 고린도전서 주제의 뼈대라는 점이다. 바울 사도는 서신의 시작에서 짧은 인사 후 바로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는데, 그 책망의 핵심인 분열의 이유가 신앙적 문제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례의 방법 등의 신앙적 이유로 갈라진 게 이와 같다.

 

그런데 현재의 기독교는 고린도전서의 핵심적 책망의 원인과 문제를 제대로 가지고 있음에도 그 책망의 원인은 해결하거나 반성하진 않으면서 태연하게 바울 사도가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만 이야기한다. 근원이 썩었는데 회칠만 계속하고 반추하지 않는 심각한 어두움 속에 있다.

 

고린도전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 5~10장 그리고 11~16장 이렇게 나눌 수 있다. 1~4장에서는 바울, 게바(베드로), 아볼로, 그리스도파로 분열되어 다투는 분쟁의 원인은 신앙을 세상의 지혜로 복음을 투영하기 때문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한다. 교회가 세례의 방식과 같은 신앙적 주제를 이유로 교단이 나뉘고 분열하는 것이 바로 이 책망의 대상이다.

 

그리고 5~10장에서는 세상의 지혜로 살기 때문에 겪는 신앙적 혼란에 대한 복음적 시력 조정, 즉 올바른 관점과 방향을 제시한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신앙적 기본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해도 되지만 자신은 하지 않는 몇몇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같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이 녹을 받는 게 가능하지만, 자신은 받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것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11장부터 끝까지 신앙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권면한다. 세상의 지혜가 아닌 신령한 심령, 곧 성령과 사랑을 설명하고 소망을 제시한다.

 

정리하자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계기는 신앙적 이유로 인한 교회의 분열로 인한 분쟁과 원인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원인은 나는 바울, 나는 게바, 나는 아볼로, 아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는 분열이 신앙적 이유다. 이건 오늘날 대표적으로 세례의 방식을 두고 세례와 침례로 나뉜 것처럼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고린도전서를 상고하고 설교하려면 자신들이 이 문제의 당사자라는 성찰과 반성 그리고 돌이킴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로 복음을 투영하기 때문이라는 바울 사도의 진단에 자신들을 비추어 봐야 한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세상의 각종 지식으로 설교의 설득력을 얻으려 하고 교인들은 그것에 반응하는 모습을 바울 사도는 이미 알고 권면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를 통해 책망하고 권면하는 모습 그대로지만 어떤 반성이나 성찰도 없다. 오늘날 신앙이 바울 사도의 진단대로 세상의 지혜와 가치관으로 복음과 성경을 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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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5-39) 전도하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13. 05:00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 사이에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것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것이 육신의 병을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과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육신의 건강과 복락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 하시고 제자들을 만났다. 그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시면서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앞서 가버나움 회당과 같이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았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을 때 사람들은 새 교훈이라 했고, 전도하러 가자고 하신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았다. 그러니까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도하시는 예수님의 일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배울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전도는 교회에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다. 이 저변에는 교회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말하는 구원이 과연 예수님이 전하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는 것이다. 회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당이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귀신 들린 자가 들어왔었다. 처음 들어 온 것이었다면 바디메오를 막듯 소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드나들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고, 예수님의 전도 여행에서도 회당에 귀신 들린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교회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회가 가진 구원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고, 구원의 능력이자 법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가 말하는 구원은 육신의 곤고함과 어려움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하고 압박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뜻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을 이기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이 가하는 어리석음 앞에 육신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 낮아진 십자가가 구원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은 제대로 귀신 들린 것이다.

 

전도, 곧 전할 도는 바로 십자가의 도다. 십자가에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형식 가진 존재로서의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로 드러난 곳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보았다면 낮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면 성령께서 육신이 그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사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니까 전할 것은 십자가의 도고, 십자가의 도는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고 자랑하는 세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끌고 가는 세상 앞에 육신의 수고와 생명을 내어주는 모습이다. 그게 전도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 아니 거짓되고 가증한 전도를 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이 목적에 수렴한다. 그리고 오신 목적이 완벽히 집적된 곳이 십자가다. 낮고 낮은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정수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이 목적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예수님의 구원이나 도움을 바랄 것이 아니다. 당연히 낮아지는 것과 달리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고 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복음,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이 도가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없는 걸 전하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삯꾼 목자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도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삯꾼이다. 이름만 목사나 전도자일 뿐 삯꾼이며 속이는 자며 예수님의 십자가 본질과 다른 것을 전하니 적그리스도다.

 

예수님은 그 삶이 전도다. 공생애 동안의 말씀과 기적과 능력도 전도지만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전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세상의 주장 앞에 예수의 이름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수고와 삶을 내어 줄 때 그 모습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전도다.

 

결국 전도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외치는 것, 교회에 안 가면 지옥 간다는 것과 같이 사람을 겁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 모습이 인생의 목적임을 알게 하는 삶을 전하는 것이 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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