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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6-10)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4. 09:41 Writer : 김홍덕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오히려 육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육신 가진 인생을 받은 이유는 육신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이 찔리시니 흙으로 만든 옥합이 깨어지니 향기가 넘쳐난 것처럼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육신이 깨어지면, 그러니까 종과 같이 섬기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면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려면 육신이 성령에게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헌신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이신 말씀이 심령에 믿음으로 심긴 사람을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이게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씀은 근본적 의미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이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게 도우시며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로 연결된 하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은 자신보다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육신의 큰 수고로 자신과 같이 어두운 사람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성령을 인함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육신의 수고를 한 사람과 같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육신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시도록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자신을 가르친 사람에게 좋은 모든 것으로 함께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3)

 

이러한 법을 알면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당연함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도록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고, 또 이 거듭난 생명의 본성,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거듭나도록 육신으로 수고한 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형제같이 자신도 수고하는 육신으로 헌신하며 사는데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이것은 신학으로 공부할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에서 시작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라는 자기 짐을 지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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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6-10)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2. 04:00 Writer : 김홍덕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은 썩은 것은 거둔다는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육체는 나중에 썩으므로 육체를 위하면 썩을 걸 거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제다. 거두는 것이야 나중 일이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 곧 거두는 때에 육체가 썩을 것이니 지금 육체를 위한 것이 의미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나중에 얻기는 얻는데 이미 썩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육체를 위하는 것은 위하는 그 자체로 이미 아무 값어치가 없다는 말씀이다.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영생은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다. 수명이 유한한 육신에 거하면서 수명의 한계를 허무는 것을 영원으로 생각하는 개념에서 세워진 영혼의 영원한 존속이 영원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신 뜻도 여기에 근간이 있다.

 

그렇다면 육신을 위해 심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미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육신을 위하여 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쉬지 않고 설명해 왔다. 그것은 바로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세상을 살 동안 세상의 가치로 성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의 수혜자는 바로 썩을 육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육신이 평안해지고 세상에서 삶이 성공적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크게 착각한다. 그건 착각을 넘어 자기 합리화다. 바울 사도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된 줄로 아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하심도 이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속여봤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만에 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해 두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사람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이유는 육체의 어떠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지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어떠함이 세상의 기준이라데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잘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불의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는 육신이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영광스럽고 본받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가치는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임을 잊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을 가치로 여기는 이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은 반대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듣고, 그 들은 바를 인하여 소망하고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과 육체의 평안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떼로 몰려가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우겨도 하나님은 그것을 신앙이나 믿음이나 의로 여기시지 않는다. 그들에게 하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도무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씀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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