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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5) 짐을 서로 지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1. 12:02 Writer : 김홍덕

앞서 바울 사도의 서신 속에 너희저희가 있는 것을 설명했다. 성령의 열매를 설명한 다음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 것이라고 말씀한 뒤 성령으로 사는 삶을 포괄적으로 이어간다. ‘형제들에게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하는 말씀이 그것이다. 형제들은 너희, 사람은 이전에 설명한 저희로 볼 수 있다.

 

사람들과 기독교인 대부분조차 인정하지 않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범죄는 도둑질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나서 사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이므로 그 상태에서 도둑질이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도둑질과 같이 사람들이 공통으로 죄로 여기는 것은 죄인들의 삶 속에 있는 죄가 심화하거나 드러난 것일 뿐이다.

 

바울 사도가 사람이 범한 죄가 드러났을 때라고 하신 말씀 속의 죄 역시 그렇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드러났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라는 말씀이다. 주목할 것은 죄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실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기에 달리 드러날 것도 없는데 드러나거든이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을 본 사람은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처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때 성령으로 사는 형제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잡는다는 것은 어긋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로 사람이 벗어난 존재의 정체성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회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 다소 생소한 관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렇게 서로 짐을 지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설명한 의미가 확정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육신과 수고를 종과 같이 내어주는 법이고, 또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이자 자신 역시 그렇게 사는 게 자기 존재의 목적임을 깨닫는 자를 회복시키는 법이기에 이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종과 같이 짐을 지는 것이고, 서로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면 서로가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살기에 서로 짐을 지는 삶을 산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또 하나 우리는 이 에서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것은 죄를 시인함이고, 이 죄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짐은 형제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한 아버지의 본성을 가진 형제들이 지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남을 위한 수고가 아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이 주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또 그것을 인함이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 이 짐 역시 그렇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형제들에게만 있는 짐이다. 이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짐이다.

 

이 짐은 두말할 것 없이 십자가, 곧 자기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이 짐은 쉽고 가벼우니 지고 따라오라 하신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라는 짐을 지시니 그리스도의 법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성취되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보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인생인 자신에게 보이신 존재의 목적임을 깨달을 때 그릇된 자리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므로 죄가 드러남과 동시에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형제가 된 사람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렇게 산다.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를 위하는 본성이다. 그릇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목적을 깨닫도록 자기 육신의 수고와 또 육신을 종과 같이 내어주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이자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짐을 지는 것이다. 이 짐을 서로 지려면 서로가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본성대로 사는 것이고, 또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도 없다고 했고,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자 그 본성이 이끄는 삶을 자기가 보므로 자기에게만 자랑할 뿐이다. 이 말씀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이므로 너무 당연하지만,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 행위로 공로를 쌓아 의롭게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남을 통해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 성령으로 살고 행하는 사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이같이 자기 안에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으므로 그 삶이 짐을 지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언제나 자기 짐을 지라고 하신 것은 괜한 수고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면 누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의 자리를 떠난 그릇됨에서 회복되도록 예수님과 같이 자기 짐을 지고, 그런 형제들이 모여 서로가 되면 서로가 짐을 지는 관계가 되며, 그 짐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기에 자기 짐을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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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성과나 공로를 열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는 마음의 표현이다. 성령의 열매는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위로 당신 앞에서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생각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즉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분명하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온전히 구속하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보이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보고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을 바라실 리는 없다.

 

성령의 열매는 열매라는 말을 통해 생명의 개념이고 생명이 본성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분명히 했고, 또 생명이 그 본성을 나타내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도 금할 수 없다는 말로 그 온전함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많은 이들에게 연결이 멀어 보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은 결국 육신의 욕심과 육신의 정욕에 이끌린 것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는 앞선 여러 글에서 사람이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여기시는 마음이 육체의 형편으로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육신이 평안하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육신을 깨끗하게 하면,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면 육신이 평안해진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정과 욕심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같이 육체로 의로워지거나,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는 증거로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함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증거라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된다. 이런 단순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에 이끌린 어두움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령으로 행하려고까지 노력한다. 그러나 이같이 어두움 속에서 구하는 모든 것이 바로 헛된 영광이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갈 5:26)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다투는 이유는 육신의 평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은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되었고, 한 육신이 평안하려면 다른 육신이 수고해야 하기에 욕심이며, 그런 욕심이 충돌하기에 서로 다툰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툰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들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주시며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서로 다툰다. 그러고도 자신을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한다. 헛된 영광에 매몰된 사람의 모습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람,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도구나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삶을 표현하는 실존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곧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의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 그 자체다.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 난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기쁨이 육신으로 보답받기 위해 육체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살면 되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모습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순종하여 들음으로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있어야 일어난다. 성령이 난데없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심기려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한 약속, 계획, 창조 목적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그 믿음이 있어야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할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거할 수 있다. 그 믿음으로 심긴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하시면 그 사람의 삶이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되고, 그 삶의 모습이 바로 성령의 열매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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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주제로 다룬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씀하고자 한 의로워지는 행함과 믿음이란 주제 속에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을 쉽게 망각한다.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말씀 속에 있는 말씀이다. ‘열매라는 단어가 그 연결고리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는 모두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 인식된다. 즉 성령의 열매는 곧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열매들을 맺으려고 <노력>한다.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성도들은 노력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거룩한 열매를 맺으려는 그 일반적인 모습이 오늘날 신앙인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열매를 노력으로 맺으려 하기 때문이다.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은 생각보다 이렇게 뿌리 깊다. 이것은 부지불식중에 범하는 어떤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어두움 그 자체다. 이 상황을 정말로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은 단순히 신앙의 부족함이나 미숙이 아니라 구원을 얻지 못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의 법인 율법은 범법자를 위한 것이라 선언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교회의 예식으로 세례 문답을 했다고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태연하게 있을 문제가 아니다.

 

앞서서 열매는 생명의 속성임을 설명했다. 이런 단어 하나하나를 간과하면 안 된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에 의미가 달라지는 말을 할 리가 없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모두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열매다. 노력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육체의 행위로 이루는 것은 그 자체가 성과고 공로지 열매가 아니다. 그런 신앙관과 신앙 그리고 그에 따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받은 줄로 여기는 것은 망상일 뿐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다. 그런 자신이 어둡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면 구원의 기회조차 없다.

 

열거된 열매들은 바울 사도의 때나 지금이나 성도들에게 경건과 의로움의 상징인 것은 같다. 바울 사도가 사람들이 의로운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을 열거하면서 이것은 열매라고 말씀한 것은 이런 것은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난 생명이 자아내는 것임을 분명하게 강조한 것이다.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이처럼 틀린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법,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이 아니다. 그런 신앙은 하루라도 속히 떠나야 하는 어두운 신앙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어디까지나 열매다. 생명이 가진 본성이 형상으로 나타난 게 열매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성령의 열매들은 맺으려 노력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성령으로 진정 거듭났다면 노력해서 이른다는 말을 이해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성령으로 난 생명이기만 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기만 하면 맺히는 것이 성령의 열매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씀했다. 이 세상이 창조된 이래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을 금할 법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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