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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부르심을 입는다라는 말은 어떤 부르심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는 의미다. 간혹 어떤 이들은 부르심을 사회적으로 반복된 실패를 신학을 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고, 그 목적이 자기 삶이 되고,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을 권면하면서 하나님께서 미련한 자, 약한 자 그리고 천하고 멸시받는 없는 사람을 불러서 있는 자들을 멸하신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성경에 이런 맥락의 말씀이 많아서 간혹 하나님은 Underdog를 좋아하신다는 착각을 낳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방신학이다.

 

하나님께서 없는 자로 가진 자를 이기게 하신다는 건 가졌다는 육신의 어떠함이 자랑거리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나 세상 가치 기준으로 강한 것이나 세상의 부유함은 육신의 어떠함이지 하나님께서 본질로 여기시는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나 강함, 그리고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신 본질이 아니다.

 

우리가 눈여겨볼 건 이 말씀을 분열을 겪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권면에 인용한 사실이다. 이는 세상의 지혜로 신앙을 투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세상 지혜가 옳다고 여기는 걸 하나님은 어리석게 여기심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세상의 지혜는 세례의 형식, 어느 사도를 옹립하는지로 신앙을 가늠한다. 어떤 것이 더 높고 좋으며 강한 것인지를 따지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에게 책망받는 고린도 교회나, 세례의 형식으로 교단이 나뉜 오늘날의 기독교가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례를 형식 아닌 본성이 죽고 다시 살았는지 본질을 보신다.

 

이 세상의 지혜를 십자가를 매우 어리석게 여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세상 지혜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게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부르심을 입는다는 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그 생명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다. 이 생명으로 나는 게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낮아지는 생명만을 자랑한다고 했다.

 

부르심을 입는다는 건 높은 곳을 앙망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낮아질 수밖에 없는 생명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란 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본성에 이끌려 낮은 자리에 가치를 둔다. 이 생명은 낮고 낮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이 드러나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그리고 가치를 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긴다는 가치를 안다. 그래서 이것만 자랑한다. 자기 생명의 본성이자 가치며, 인생의 목적이다. 또한 낮아지는 본성은 분쟁이나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 ‘네가 옳다인정하는데 분쟁이나 다툼이 일 수는 없다. 분쟁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 부르심과 십자가의 도를 권면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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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과 귀신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예수님께선 시비를 거는 이들을 성령 훼방이라고 강하게 책망하신 이후 특별한 시비는 줄고 예수님이 주도하는 시간과 사건들이 이어진다. 비유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시며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등 주도적으로 복음을 전하신다.

 

특히 복음을 비유로 전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눈에 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어떤 이들이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 말씀이 그것이다. 마가복음의 구성으로 본다면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을 겨냥한 말씀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그들로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막 4:12)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께서 특정한 이들을 배제하는 모양새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성령 훼방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아니라 상태다. 생각해보면 성령의 훼방하는 상태나,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는 같은 상태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결과도 같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에서 배제하시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죄와 사망에 빠져 있다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성령을 훼방하는 상태, 예수님을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인생을 산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형성되는 만남 이전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이고 말씀을 들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둘로 나뉜다. 자신의 가치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살아왔던 자기 삶이 그릇된 것임을 알고 돌이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돌이키는 사람은 구원받고 비유의 말씀도 자기 것이 되나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에 머문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으므로 지금 인류는 그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건 오늘날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상태다. 누구나 동의하듯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받은 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구하고, 육신의 정욕에 속한 먹는 것, 시험 치는 것, 연애나 자녀 그리고 육신의 건강과 같은 걸 구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걸 보면 대부분이 이런 사람이다.

 

육신의 필요를 구하고 세상에서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기 전이나, 다니는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의 것을 구하는 사람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변화가 없는데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는 없다. 먹이가 같고, 본성이 같으며, 소망과 평안과 안식이 같은데 다른 생명이라고 할 순 없다. 이같이 육신의 정욕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건 거듭난 게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빌미로 세상 사는 자기 육신의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들에겐 비유를 포함한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은 자신이 구하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얻는 방법, 도구, 지혜, 가이드일 뿐 자기 본성에서 비롯된 삶의 모습은 아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전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

 

이처럼 너무나 아쉽게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대부분은 구원도 없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서 알아듣지 못하게 하겠다는 사람에 속한다. 너무도 분명히 예수님은 낮고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음에도 세상에서 높여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이게 바로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낮고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게 예수님을 보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은 복음을 차별적으로 전하시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만 구원하시겠다는 고약함을 가지셔서가 아니다. 비유든 직설적 화법이든 예수님과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란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성령께서 역사할 여지가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바로 심기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방식의 설명도 의미 없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이상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그들에겐 바로 이야기해도 비유로 들린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어두움이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안목, 같은 생각을 하는 존재로 났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하나님께선 낮고 낮은 십자가에서 사람 지으신 뜻을 보이셨는데, 그 십자가를 이용해 세상에서 높고 평안한 곳으로 가려는 생각으론 그 어떤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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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영상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세상의 지혜 vs. 십자가의 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 중반에서부터 세상의 지혜에 대해 말씀한다. 생각해 볼 것은 교회에 분쟁에 대해 권면의 말을 하는 중에 세상의 지혜를 논한다는 점이다. 그건 세상의 지혜가 교회 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겐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리한 바울 사도는 그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지혜를 멸한다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했다. 십자가의 도와 세상의 지혜를 대립시켰다.

 

이를 종합해보면 고린도 교회가 분열에 휩싸인 건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따랐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세상 지혜를 좇는 게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도와 세상 지혜는 반대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낮은 곳에서 영광을 얻었고 세상의 지혜는 높은 곳에 영광이 있을 거라는 허상을 좇는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 사람 곧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십자가의 도는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의 반대쪽에 있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위를 앙망하는데 나 홀로 낮은 곳에 존귀함과 영광이 있다고 반대로 가는 것을 는 세상 사람은 당연히 미련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게 드러났고, 이를 보고 사람이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걸 발견하므로 구원받아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 십자가의 도는 이렇듯 낮고 천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거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지혜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 세상의 지혜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하나님의 지혜는 낮은 데 감추었으니 높은 곳에 올라가는 묘수를 지혜로 여기고 좇는 세상 사람과 지혜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높여 올려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주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좇는 자들을 멸망하는 자들이라 하시고, 그들의 지혜를 미련한 것이라 하신다. 그리고 또 이를 멸하신다고 수없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와 이를 앙망하는 사람이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 구원하시는 걸 기뻐하신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지혜가 판단한 하나님 아들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다.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심판한 세상 지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죄악이다. 반면에 세상의 지혜로 볼 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심판받아 처형되는 건 어이없을 정도로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십자가의 도>.

 

이렇듯 십자가의 도를 알고 보면 세상의 지혜는 어리석게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 지혜가 가진 가치 기준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다.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에서 나서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먹고 마시던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을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볼 수 있는 세상 지혜는 없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렇듯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비난할 수밖에 없는 길을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건 흔히들 이야기하는 인류 구원의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본성이 아닌 사명감이나 신념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다. 그리고 본성은 생명에 종속된 고유한 성질이다.

 

예수님을 이렇게 세상 지혜와 반대의 길로 이끈 그리스도의 본성은 곧 우리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을 보이신 이유가 여기 있다. 누구라도 그리스도로 나야 한다. 세상 지혜가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선 영광으로 여기신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영광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자기 생명으로 순종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창조 목적 안에 들어오기를 항상 부르시고 있는데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 부르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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