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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 <신도수 뚝뚝, 개신교계 긴장> 긴장이라는 기사가 났다. (뉴스 원문 클릭) 한마디로 기독교인의 수가 점점 줄어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의 그 주된 이유가


'목회자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19.6%), 

'교인들이 배타적이고 이기적이어서'(17.7%), 

'헌금을 강조해서'(17.6%) 등의 이유라고 한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뉴스 원문>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교인 수가 감소하는 것을 개신교계가 긴장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긴장해야 하는 이유가 말씀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교회의 정치가 잘못되어서인가? 아니면 교회의 신인도가 떨어져서인가? 아니면 교인수 = 교회 수입 이라는 측면에서 긴장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 때문에 그런 것인가?


말씀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라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 쇠약해지고 무능해 지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교회의 정치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교회가 신앙인이 아니라 정치 단체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고, 교회의 신인도가 떨어졌다는 것으로 본다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윤리 도덕을 가르쳐 왔다는 점에서 이 또한 교회가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교인수의 감소로 교회 수익이 감소되기 때문이라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이유이지만 대 놓고 그렇게 답할 수는 없는 입장일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모든 이유를 다시한번 살펴보면, 교인수를 교회 수익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고, 교회의 정치 세력화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 교과서로 만들어 버린 것은 오히려 교회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한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정치나 경제나 도덕에 관한 말씀이 아닌데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떠나는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본질 자체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그들만의 말씀이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닐 것 같아도 사람들은 다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한 없는 갈증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 말씀의 본질은 그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인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저 사회를 살아가는 도덕 윤리로, 또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부자되고 높은 자리에 이르는 투자로 보고 그 수익을 교회 유지와 목회자 치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를 것 같지만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정체성을 해갈하는 것에 있지 않고 변질된 것에 대하여 교회에 다니고 다니지 않고를 떠나 다 느낄 수 있고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교회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큰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 죄명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인들이 떠나는 이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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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이고 그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곧 하나님의 형상은 도무지 뭐란 말인가? 그것을 알아야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통하여 하나님 당신을 표현하셨다. 바위를 쪼개는 바람도 하나님이고, 흙을 불 사르는 화염도 하나님이시며, 바다를 가르는 능력도 하나님의 이미지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이미지, 천둥과 번개도 다 하나님의 이미지다. 욥기 후반에 나오는 욥과 하나님의 변론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기이한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현상계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들이며, 온 천지 자연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다 단 하나의 존재가 나오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존재에 수렴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 세상 만물로 표현된 것이 단 하나에게 수렴이 되는데 그 수렴되는 존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천지창조의 과정도 빛이 있기 시작해서 결국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것으로 집약되고 수렴되고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천지창조 과정의 목적이 사람이 나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르 지으시고는 안식하신 것이다. 목표하신 바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고로 사람은 천지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이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아있다고 여길 수 있는 존재이다. 시계의 세계에서 살았다는 것은 보석 박힌 시계가 아니라 시간을 알려 줄 수 있는 것이고,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스마트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듯, 하나님의 천지,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이 고스란히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빛을 만난 사람, 자신이 마실 물과 마시지 못하는 물을 구분하는 사람, 즉 하늘의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물과 같은 것으로 구분되는 사람, 궁창 아래의 물에서 땅이 드러남과 같이 바다 같은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 고백된 사람, 그리고 그렇게 고백된 자기 정체성 곧 땅이 드러남과 같이 자신이 흙과 같은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 고백 위에 먹을 수 있는 채소가 나고, 또 그 고백으로 인한 모든 것이 마치 가축이 주인에게 목적을 두듯 자신의 모든 삶의 목적이 주인에게 있다는 것이 고백된 사람,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수렴되어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이런 모든 과정이 먹어서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로서의 사람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하셨다. 생기는 호흡이고 말씀이다. 즉 천지창조의 모든 과정이 땅에 씨앗을 심듯, 하나님의 생기가 그 안에 들어와서 생령이 된 존재,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고, 하나님의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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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라는 성경은 그냥 보기에는 세상, 현상계의 시작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세계의 시작에 관한 것이고, 그 세계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는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요즘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따지고 들면 다를 수 있겠지만 이것에 대한 효시는 대부분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스티브 잡스로 말미암아 스마트폰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이것을 창세기 처럼 표현하면 <태초에 스티브 잡스가 천지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천지는 바로 스마트폰의 세계인 것이다.



<스티브잡스로 인하여 스마트폰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부터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관 안목 습관이 달라진 것이다. 뭔가가 궁금해 지면 '검색해 봐라'고 하게 되었다. 버스도 지하철도 언제 탈 수 있는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다 알 수 있다. 그러다 제때 오지 않으면 정보가 틀렸다고 아니면 버스나 지하철에 항의하기도 한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세계가 바뀐 것이다. 가치관도 잘못을 판단하는 기준도 다 바뀌었다. 스마트폰의 세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역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천지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그것을 사용하게 되고 또 스마트폰이 가치기준이 되고 습관이 되고 생활 자체가 되어가는 것 처럼,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습관과 가치관이 바뀌게 되고, 또한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가 창조되는 것, 즉 태초가 시작되는 것이다. 창세기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기 시작함으로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설명이 유효하려면 그 사람이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님의 천지가 열려야 알 수 있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마치 스마트폰을 들고 있어야 스마트폰의 세계에 진입한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 바로 천지창조의 마지막에 창조하신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은 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알게 되는 과정을 6일간의 과정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인 것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설명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현상계를 만드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대하다는 것에 국한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은 아직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아직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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