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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9. 3. 14:17 Writer : 김홍덕

퇴근해서 PC로 작업 중인데, 건너방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 엄마가 작은 아이에게 휴대폰 충전기를 달라고 하고 있었다.


엄마 : 성식아 엄마 충전기 가져다 줘...


아이와 아내는 같은 안드로이드 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충전기의 모양은 달라도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 아내는 자기 것이라야 하는 것으로 아는지 가져다 달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아이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아이 : 엄마! 어차피 같은 거니까 그 방에 있는 거 쓰면 돼.


그렇지만 엄마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몇 번 더 가져다 달라고 했다.


엄마 : 성식아 엄마 충전기 가져다 달라고......

아이 : 아 엄마도 참, 어차피 같은 거라고.....


두어번 대화가 계속되는 것을 듣다가 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나 : 성식아 어차피 같은 거니 바꿔주면 되는 거 아냐?


아이는 알았다고 하며 바꾸어주고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



우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들 앞에서 늘 안 하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을 우선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수고하는 것이 귀찮고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해도 되는 것이기에 조금만 수고하면 즐거울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안 해도 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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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형상을 <이미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이미지라는 것은 신존하는 형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 표현될 때 나타나는 것을 이미지라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이미지라는 이미지가 자신을 낳은 여인 곧 어머니로 형상화 된 것이다.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형상으로 실존하지 않지만 자기 육신의 어머니로 어머니라는 이미지의 성육신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 즉 우리의 이미지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현상계에서 인지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신 분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형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얼굴이 있다거나 손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얼굴과 오른손과 같은 표현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냐?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의인화 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오른손으로'라고 표현하신 것은 의로운 손, 바른 손과 같은 의미이고, '얼굴을 드사'와 같은 표현은 사람이 얼굴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만날 때 얼굴을 대한다고 하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겠다는 의미인 것이지, 하나님이 얼굴이 있다거나 손이 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은 화장실 안 가시나?'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을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엄마 혹은 어머니는 하나의 개념인 것이다. 그 개념이 형상화 된 것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라는 개념이 있고, 그 개념을 가르키는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를 실존하는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매칭 시킨 것이다. 즉 어미니의 이미지, 어머니의 형상이 각 개인의 어머니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체가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이미지가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이미지,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이라는 무형의 개념이 형상화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람은 하나님의 표현 양식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 개념은 신앙 전반에 있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은 무엇이 죄가 되며,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아는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이유 혹은 목적이 있으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표현하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형상화 된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 1:18)"라고 말씀하셨다. 그 하나님, 즉 사람으로 나타난 바 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의 천지창조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 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시점에 비로서 사람이 되는 것, 즉 사람이 지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알지 못하다가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것을 아는 세계에서 보면 알지 못하는 세계는 어두움이고, 그것을 아는 빛을 만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알기 전의 시간은 그것을 깨달은 시간이 시작되지 않은 창세 전의 세계인 것이다. 그 세계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 곧 형상임을 알게 되는 세계를 만나기 시작할 때가 바로 태초이고, 그 안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이 바로 사람이 지음을 받는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부터 사람이기 때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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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독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3. 9. 1. 10:38 Writer : 김홍덕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덕이는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경퀴즈 대회에 참석한다고 읽거나 아니면 신약은 부분적으로 반복해서 제법 읽었지만 이른바 통독은 한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덕이는 고2가 되면서 한 해 동안 성경을 다 읽어보자고 생각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창세기 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덕이는 성경을 한 해 동안 다 읽는데 성공했다. 레위기를 읽을 때는 인내가 무엇인지 배우는 듯 했다. 역사서를 읽을 때는 왜 반복된 내용이 자꾸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순서도 헷갈렸다. 어느 왕이 뭘 했느냐 하는 것 보다. 이 놈의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헷갈렸다. 그래도 억지로 읽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이 의도하는 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읽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덕이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성경 통독을 한 사람> 그 훈장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구를 해롭게 하고 얻는 것도 아니다. 어떤 각도에서는 그렇게라도 성경을 한번 읽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하지만 교회에서는 은근히 훈장 노릇을 하는 <성경 통독한 사람>이라는 훈장을 달고 싶었던 덕이는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스스로 훈장을 달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기 전에 성경을 끝까지 읽는 것에 성공을 했다.


얻은 것도 많았다. 그 얻은 것은 한마디로 의문들 뿐이었다. 머리 속에서 뭔가를 새롭게 알게 하는 것은 없었다. 있었다면, '이 말씀이 여기 있었구나?' 같은 정도였다. 성경은 사람을 위하여 쓰여진 것인데, 읽고 나니 온통 의문 투성이었다.


사사기에 여자의 시체를 12조각 내서 온 지파에 보내고 11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전쟁을 하는 일, 모세를 통해 일으키신 10가지 재앙 중에서 처음 몇가지를 따라 하는 이유(그런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왜 모세는 그깟 바위 한번 더 쳤다고 그렇게 수고했는데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지, 입다는 왜 딸을 바치는지, 하나님께 사람을 바치다니? 하는 등등의 수 많은 의문들만 얻은 것이었다.


신약도 의문 투성이였다. 언제는 부모를 공경하라더니, 또 언제는 '누가 네 부모냐?' 하는 것은 또 무엇이며, 바울과 베드로는 사도들인데 왜 책망하는지, 바울과 바나바는 왜 싸웠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해도 할 수 없는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교회에 아무리 열심히 다니며 설교를 들어도 말이다. 덕이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모든 설교는 도덕 시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의문들이 많았지만, 덕이는 아직 어리고, 또 아무도 그것을 풀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성경의 의문을 푸는 것은 묻어 두었다. 어쩌면 <성경 통독한 사람>이라는 훈장을 달려고 시작한 성경 읽기가 덕이로 하여금 성경의 의문을 하나씩 풀어가는 삶의 여정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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