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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것이라도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 최종 목적인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다 마지막 목적 안에 수렴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에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으셨다. 오히려 쉬셨다. 그것은 목적하신 바가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 천지 창조의 과정은 계속 이야기 해 왔듯이, 세상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설명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마지막 최종 창조물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을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어떤 창조물도 사람이 인지할 때 창조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그 누구라도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세상이 수 없이 창조되었다 해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을 기준으로 볼 때, 태어나는 시점이 천지가 창조된 시간인 것이다. 이런 주관적인 해석을 배척하면 성경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냥 도올 김영옥 교수의 말 처럼 그냥 이스라엘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의 최종 결과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떻게 정립되는 과정이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의미 없는 세상이 태어남으로서 시작되었고,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가 쟁점이 아니라 태어나서 어떻게 인식해 가느냐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것이 천지창조라는 것이다.


천지창조는, 한 사람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정립되는 과정


물론 객관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어떤 시점에 이 물리적인 세상의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시작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하다못해 100년 전의 일도 나에게 오늘 저녁 메뉴보다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시간의 시작은 없다고 봐야 한다. 시간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할 때, <시작>이 있다면 단순하게 생각해도 <시작 그 이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시작의 시점이 언제인지 밝혀서 그것을 <태초>라고 규정하려는 관점은 자신이 정체성인 객관성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시간의 시작이 그 세계의 <태초>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과 같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지는 한 단계 한 단계가 바로 천지창조의 하루 하루인 것이다. 바다가 어떻게 형성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의 세계로서 나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인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 나에게 하나님의 의미로 다가 올 때, 그것이 바로 나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시작과 창조과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빛이 내게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어둡던 곳에서 빛을 만나 인식을 가지게 되듯, 하나님을 모르는 어두움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첫째 날인 것이다. 성경이 이렇게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면 단언코 내가 믿을 경전은 아니다. 경배할 경전일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는 사람을 만드신 과정이다. 아니,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끝이 무엇인가 할 때, 사람이 사람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사람을 바로 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부터 만들어졌고, 무엇을 위하여 창조되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천지창조이듯이 사람을 바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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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이 이상한 자신감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3. 8. 19. 00:00 Writer : 김홍덕

덕이는 그렇게 외형적인 아이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내성적인 아이였다. 적어도 중학교 3학년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교회에서 경쟁력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외형적인 성향의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방언이라던가, 성경에 대한 지식과 같은 것에 대하여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부터 덕이는 이전과는 좀 다른 성향의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덕이는 중학교 3학년때 까지는 학교에서 크게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그러던 덕이는 교회에서 뭔가 할 줄 아는 아이가 되어가면서 그것이 사회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의 경쟁력이 세상의 경쟁력과 같다는 착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기본적인 학력은 유지하고 있었기에 고등학교 입시 시험인 '연합고사'를 무난히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수준의 성적을 얻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방언을 하기 시작한 이후 덕이의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방언이라든가, 성경 퀴즈 대회에서 입상한다는 것을 세상의 보편적인 경쟁의 승자와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덕이는 예를 들어 방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이야기해도 되는 지위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덕이의 착각은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었었지만, 덕이의 착각은 그치질 않았다. 점점 더 그런 생각에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덕이가 말 끝 마다 방언을 들먹이거나, 말 끝 마다 성경을 들먹여서 사람들을 기죽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차별을 두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행동 양식을 가지고 살았던 것은 분명했다.


한때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덕이는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덕이가 그런 말을 하겠다 싶은 타이밍이 되면 주변의 사람들이 먼저 할 정도로 입에 달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덕이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가지고 살았던 것에 기인한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쨋던 이전까지 조용한 아이였던 덕이는 이때부터 어디가도 눈에 띠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덕이는 머리가 참 좋았다. 그리고 순발력이 대단했다. 그런 덕이의 능력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말을 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나타냈는데, 덕이는 그런 자기 모습을 좋아했다. 아니 그런 자기 모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덕이는 고 1 교회 수련회를 앞두고 수련회에 가서 수련활동을 열심히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장난을 준비했엇다. 친구들을 모아서 돈을 좀 모아서 당시 유행했던 산도 과자를 사서 중간의 크림은 발라 먹고 치약을 발라 준비하기로 했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 산도가 아닌 작은 샌드과자를 사서 준비했다. 또 껌 뒷면에는 습자지를 붙이고, 교련복을 입고 가기로 하고 수통에는 보리차와, 식초 탄 물, 소금 탄 물을 따로 담아서 수련회를 출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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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 선악과를 먹다..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3. 8. 17. 22:28 Writer : 김홍덕

방언을 받은 덕이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나름 교회라는 공간이 요구하는 몇가지 자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신앙을 논하는 것에 있어 기준이 되는 것들에 있어 앞선 사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뒤쳐진 사람이라거나 모자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덕이도 그렇게 느꼈지만 교회라는 공간이 사실 그런 곳이기도 했다. 신앙적인 자격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는 없지만 불문율 처럼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신앙이 좋다는 인식이 있다.


덕이는 이제 방언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교회에서 표면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거나 아니면 덕이의 실제적인 입지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덕이 스스로가 느끼는 자부심도 있었고, 또한 아닌 것 같아도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 어린 학생이 방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훈장과 같은 것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교회가 그래서는 안된다. 교회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듣고 배우고 나누는 곳이지, 한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느냐?가 주제가 되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실제로는 그런 곳이 또한 교회이기도 하다. 겸손한 사람보다는 돈 많고, 교회 안에서 세력이 많은 사람이 장로가 되기 쉬운 곳이 교회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없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덕이는 스스로도 잘 느끼지 못했지만 마음에 자부심이 커져만 갔다. 몇번 참석하지 않은 성경공부로 실제로는 아는 것도 없었지만 자신이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도 우스운 모습이지만 자부심을 가진다는데야 뭐 할 말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다가 어른들도 하지 않는 기도회를 해 가면서 방언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선민 의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덕이의 마음에는 자신이 4대째 예수를 믿는 집안의 아들로서, 이 교회가 세워질 때 부터 다니고 있는 집안의 사람으로서, 또한 남들 못하는 방언을 하고, 성경도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다 자신의 공로나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처럼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전이나 자기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방언도 하고 성경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덕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수련회때는 성경퀴즈 대회에 1등을 했고, 2학년이 되어서는 성경 전체를 통독했다. 그 이후에도 성경퀴즈 대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하는 족족 거의 1등을 했다. 이런 덕이에게 교회 생활은 그야 말로 물 만난 고기의 모습과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누가 뭐래도 자기가 제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키우는 것이었지만 덕이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덕이 안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방언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아닌 사람,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저녁 예배를 나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같이, 덕이 자신은 하고 있는데 하지 않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하는 마음이 서서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선악과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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