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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이고 그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곧 하나님의 형상은 도무지 뭐란 말인가? 그것을 알아야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통하여 하나님 당신을 표현하셨다. 바위를 쪼개는 바람도 하나님이고, 흙을 불 사르는 화염도 하나님이시며, 바다를 가르는 능력도 하나님의 이미지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이미지, 천둥과 번개도 다 하나님의 이미지다. 욥기 후반에 나오는 욥과 하나님의 변론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기이한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현상계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들이며, 온 천지 자연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다 단 하나의 존재가 나오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존재에 수렴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 세상 만물로 표현된 것이 단 하나에게 수렴이 되는데 그 수렴되는 존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천지창조의 과정도 빛이 있기 시작해서 결국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것으로 집약되고 수렴되고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천지창조 과정의 목적이 사람이 나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르 지으시고는 안식하신 것이다. 목표하신 바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고로 사람은 천지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이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아있다고 여길 수 있는 존재이다. 시계의 세계에서 살았다는 것은 보석 박힌 시계가 아니라 시간을 알려 줄 수 있는 것이고,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스마트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듯, 하나님의 천지,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이 고스란히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빛을 만난 사람, 자신이 마실 물과 마시지 못하는 물을 구분하는 사람, 즉 하늘의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물과 같은 것으로 구분되는 사람, 궁창 아래의 물에서 땅이 드러남과 같이 바다 같은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 고백된 사람, 그리고 그렇게 고백된 자기 정체성 곧 땅이 드러남과 같이 자신이 흙과 같은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 고백 위에 먹을 수 있는 채소가 나고, 또 그 고백으로 인한 모든 것이 마치 가축이 주인에게 목적을 두듯 자신의 모든 삶의 목적이 주인에게 있다는 것이 고백된 사람,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수렴되어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이런 모든 과정이 먹어서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로서의 사람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하셨다. 생기는 호흡이고 말씀이다. 즉 천지창조의 모든 과정이 땅에 씨앗을 심듯, 하나님의 생기가 그 안에 들어와서 생령이 된 존재,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고, 하나님의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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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라는 성경은 그냥 보기에는 세상, 현상계의 시작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세계의 시작에 관한 것이고, 그 세계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는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요즘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따지고 들면 다를 수 있겠지만 이것에 대한 효시는 대부분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스티브 잡스로 말미암아 스마트폰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이것을 창세기 처럼 표현하면 <태초에 스티브 잡스가 천지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천지는 바로 스마트폰의 세계인 것이다.



<스티브잡스로 인하여 스마트폰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부터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관 안목 습관이 달라진 것이다. 뭔가가 궁금해 지면 '검색해 봐라'고 하게 되었다. 버스도 지하철도 언제 탈 수 있는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다 알 수 있다. 그러다 제때 오지 않으면 정보가 틀렸다고 아니면 버스나 지하철에 항의하기도 한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세계가 바뀐 것이다. 가치관도 잘못을 판단하는 기준도 다 바뀌었다. 스마트폰의 세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역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천지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그것을 사용하게 되고 또 스마트폰이 가치기준이 되고 습관이 되고 생활 자체가 되어가는 것 처럼,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습관과 가치관이 바뀌게 되고, 또한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가 창조되는 것, 즉 태초가 시작되는 것이다. 창세기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기 시작함으로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설명이 유효하려면 그 사람이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님의 천지가 열려야 알 수 있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마치 스마트폰을 들고 있어야 스마트폰의 세계에 진입한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 바로 천지창조의 마지막에 창조하신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은 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알게 되는 과정을 6일간의 과정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인 것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설명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현상계를 만드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대하다는 것에 국한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은 아직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아직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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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짐승 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도 한다. 짐승 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은 짐승 이상의 그 무엇을 해 낼 때 사람답다는 것이 깔려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육신이라는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들 사지 멀쩡하다고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정체성이 있다. 드라마 같은 것에서 보면 아버지의 눈 밖에 난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는 "나는 아들이 없다"고 하기도 한다. 아직 멀쩡히 살아 있지만 아버지가 그리는 어떤 아들 상이 있는데 아들이 그렇지 못할 때, 아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마음에는 육신으로 아들이 살아 있어도 그 생각과 다른 아들은 아들이 아니며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도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비로서 사람이 되고, 그 뿐 아니라 육신이 아무리 멀쩡하게 살아 숨 쉰다해도 그 정체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지구과학적인 관점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생물학적으로 생명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사람에게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비로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육신의 모양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사진을 보면 그 속에 담긴 이미지를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이고, 그것이 사람이고, 그것이 바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사진을 보면 그때 상황이 이미지로 전달이 되듯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고, 한 사람이 그런 사람으로 조성되어져 가는 과정을 천지창조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세계이고, 그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대학에 입학함으로 대학이란 세계를 인지하듯이 말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만이 그 세계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 즉 그 사람의 가치 세계 안에 그러한 세계가 새롭게 창조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창세기의 시작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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