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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채소가 <씨>가 있느냐? 아니냐? 즉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계시가 그 안에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할 수 있다면, 채소와 과목(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차이는 일년생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이 씨 있는 채소와 과목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마태복음 4장 4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이 산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에서 씨는 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한 하나님은 농부로 비유되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 갈증을 해갈하기 위하여 과학은 우주를 연구하고, 미생물의 세계도 연구한다. 아직은 큰 성과가 없어 보이는 이런 연구들의 근원은 다 사람의 기원을 알기 위한 애절한 노력이다. 기원을 알기 원한다는 것은 존재 목적을 알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 간절한 해갈을 바닷물과 같은 세상의 과학이나 문화에서 찾지 않고, 궁창 위의 물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 사람들은 바닷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명을 좇아서 뭍이 드러남과 같이 바다 수면 위로 나오게 된다. 이것을 성경은 <세례>라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은 씨 있는 채소를 낸다. 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이 내는 것 중에 채소가 있는가 하면 또한 과목이 있다. 일년 농사를 지어 또 씨를 뿌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는 채소가 있는가 하면, 한번 씨를 뿌려 나무가 되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나무가 있고, 그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이 자라게 되면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씨를 가진 열매, 즉 다시 다른 땅(사람)에 심겨져서 다시 같은 과실을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것과 같다고 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이 주는 생수를 마시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 넘칠 것이라 하셨다. 즉 자기 안에서 끊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 씨 있고 열매 있는 말씀을 맺을 수 있는 과실의 나무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창세기 1장의 셋째 날에서 <씨 있는 열매 맺는 나무>라고 하시고, 바다에서 드러난 땅과 같이 세상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그런 나무를 낼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인격체가 된다는 것을 천지창조의 과정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대한 인식이 있게 되는 것이 태초요 빛이 비치는 것이고, 빛 아래서 어두웠을 때 알지 못했던 것이 하나씩 알아가면서 인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의 해갈하는 것은 궁창 위의 물임을 알게 되고, 그것은 또한 사람이 바다와 같은 세상의 것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다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 표현 하는 것에는 사람이기에 풀과 같이 그냥 표현되어지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든 채소와 같은 말을 남겨 (하나님의)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신앙이 자람에 따라 다른 사람 안에서 계속 씨 있는 과실을 맺게 하는 나무의 씨와 같은 말씀을 내어 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셋째 날의 창조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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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드러난 땅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명하시고 그대로 되었다고 하셨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과정에 있어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는 어떤 의미인가?

 

우선 풀과 채소와 나무에 대하여 성경은, 풀과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풀과 씨 있는 채소의 차이는 <씨>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보면 씨 없는 채소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구분하고 계시다. 이 <씨>라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은 농부라고 표현한 것이다. 농부가 무엇인가? 농부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씨라는 것은 농사의 근간이다. 농사는 땅에 씨를 뿌린다. 그리고 땅에서 열매를 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신 배경도 바로 이런 농사의 법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농부시고 사람이 땅이라면, 하나님이라는 농부가 사람이라는 땅에 뿌리는 씨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땅에게 씨 있는 채소를 내라고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하시겠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 셋째 날에 나오는 땅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바다에서 드러난 땅이다. 바다에서 드러났다는 것은 세상의 물이 모인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땅이다. 즉 세례를 받은 땅이라는 것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이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조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람은 자기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라는 예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정체성을 해갈할 물이 아님을 알게 되어 드러난 땅, 곧 사람(사람이 흙으로 지어졌음)은 풀과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채소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갈을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찾지 않은 사람은 그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은 내내 <씨>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풀과 씨 있는 채소를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한다면, 사람이 내는 말들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씨 있는 채소와 같은 것도 있고, 또한 그냥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표현해 가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 하는 말 중에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이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만한 것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살아가며 표현해 가는 것이 있다. 전자가 바로 씨 있는 채소를 말씀하는 것이고, 후자가 그냥 풀이라는 것이다. 행여나 싶어 짚고 넘어 갈 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바다에서 드러난 땅과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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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바다의 생명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업과 일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즉 잘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보면 하나님이 그러실리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정말로 인정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허락과 관장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어떤 세계는 마귀나 귀신이 관장하는 세계인데 그 세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 신앙 안에서의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 의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한 부분이라도 지금 마귀가 점령하고 있다면, 세상의 어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주관을 벗어나서 귀신이 주관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역을 빼앗긴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다.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바다의 생명에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과 같이 나도 그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 되었을 때 비로서 나에게 하나님의 천지창조 5일째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도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인식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고 살아가는 중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복을 주신 일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 다섯째 날의 교훈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그것이 내가 보기에 좋은 일로 여겨질만한 이유가 내 안에 생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갸기 하면 그것이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보기는 힘든 일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안에 어떤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눈에는 종교라는 기준으로 볼 때, 신앙 없이 성공한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보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마귀와 하나님의 대결 구도로 보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감히 말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회가 세상의 어떤 종교와 다를 것은 전혀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나누고 어떤 것은 가까이 할 것으로, 그 반대편은 멀리할 것으로 나누는 모든 것은 다 이분법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이분법, 이원론적 가치관의 뿌리는 바로 <선악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을 나쁘게 규정하는 습성은 바로 선악과의 습성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는 그 이름 그대로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 심판하고 입대고 비판할 일이 있게 된다.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비판하고 있다면, 그 안에 선악과의 열매가 아직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바닷속 생명을 복 주셔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게 된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는 기준 아래서, 바닷속의 생명,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잘 먹고 잘 살게 되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같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알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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