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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되었던 다른 종교가 되었던 대부분의 경우는 어떤 것에 대한 선악을 판단하고 그 중에서 악한 것을 배제하고 삶과 생각에서 떨쳐 내는 것에 신앙적인 활동을 집중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은 그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고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만약에 교회가 동일하게 그런 모델을 신앙의 시스템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은 다른 종교화의 차별성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 즉 존재의 하나님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악한 것을 떨쳐 내기 위하여 기도와 같은 갖가지 행동을 해야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천지창조를 이야기하다가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생뚱 맞은 이야기 같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지속적으로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물리적인 세상, 현상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천지창조는 한 사람이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창조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조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은 어두움에서 빛을 만나듯 해야하고 또 어떤 것은 갈라지고 버려져야 할 것은 그렇게 되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은 한 사람이 세상에 속해 살면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 바로 천지 창조인 것이다.

 

첫째 날에 이야기 했지만, 이 천지라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관이다.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 그 사람이 규정하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가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것에서 세상이 받아들여지고 자기 만의 세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 창조이다. 어떤 이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받게 될 것이고, 어떤 이는 폭파해버리고 싶은 세상일 수 있다. 그런 중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미가 열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알게되고 수용하게 되는 세상이 바로 창세기에 기록된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다섯 째 날의 창조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또한 성경에서 바다는 세상에 비유가 된다. 그런데, 그 세상에 사는 물고기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세상이 열리는 과정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삶의 승부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세상을 만드실 때 그렇게 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종교가 세상적 가치관을 멀리하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떨쳐 내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친다. 세상의 향락과 물질 만능주의 같은 사상들을 신앙인이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멀리하고 죄악시 한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바닷속에 있는 생명체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때문인지, 세상은 날이 갈수록 타락하고 물질 만능주의는 더 왕성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종교인들이 경계하는 향락의 문화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사진은 hermeth.egloos.com가 뽑은 세계 10대 향락의 도시 1위 태국 파타야 >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복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는 것을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신앙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다섯째 날의 창조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이 이 세상의 철학과 사상이 날이 갈수록 창대해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어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 그 사람에게 다섯째 날의 창조과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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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의 다섯째 날에는 바닷속의 생물과 공중을 나는 새들을 창조하셨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은 세상의 현상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고자 함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자아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가는(회복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 곧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회복되는 과정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온갖 동물들을 데리고 와서 이름을 짓게 만드시는 장면이 나온다. 통상적으로 어떤 물건을 새롭게 만들게 되면 만든 사람이 그 이름을 부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부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모양이 아니라 정체성)을 가졌다는 말씀이다.(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의미가 새롭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재 해석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자신이 창조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날부터 지금 다섯째 날 까지 모든 과정이 세상이 현상계적으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나의 자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지에 대한 과정이고,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이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수용되는지, 아니 수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정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그럼 다섯째 날의 창조를 보자. 성경에서는 바다는 세상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과 자신이 만든 신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세상의 학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삶고 살아가는 세계를 말할 때 바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공간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공간은 하나님의 세계이고 도심 속은 세상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정체성을 두는 공간을 말한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도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가진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것에는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 곧 바다의 물은 사람이 가진 정체성의 갈증을 푸는 물이 아니라고 했다.

 



<사진 출처 : www.scienceall.com >


그런데, 그 바다에 하나님께서 생명체를 만드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축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떠나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시면서 왜 세상과 같은 바다에 생명을 만드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생명에 복을 주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바다의 생명체들을 만드셨고, 또 왜 그들에게 복을 주셨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오늘 나에게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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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우리는 낮과 밤을 하나님께서 같이 창조하심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부정하다 생각하는 것이 공존하는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심을 통하여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선하려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재고를 던져 주셨다. 그리고 그 네째 날에 창조된 밤과 낮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해를 낮을 주관하는 빛으로 달을 밤을 주관하는 빛으로 두셨다고 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낮에는 태양이 비친다. 그리고 밤에는 달이 우리를 밝힌다. 달빛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은 낮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반사되는 빛이 아니라 태양과 같이 원래의 빛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분명히 하지만 예수님께서 빛이고 낮이신 것이 태양과 같은 물리적인 빛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세계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빛이고, 밝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밝음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밝음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까지 많은 선지자와 사사들이 하나님 세계에 대한 밝음을 선포하였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시키듯 그것을 선포해 온 모든 세대가 다 달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시대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서기 3,000년이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밝음이 자기 안에 없고, 성경의 문자나 선지자와 사도들의 밝음과 같은 달의 밝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밤에 있는 것과 같다.



 

 

이 네째 날의 창조의 말씀은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낮과 같이 자신의 삶을 밝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의 빛이 밤의 달과 같이 다른 사람으로 부터 비쳐지는 것을 자신의 밝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빛을 발산하듯,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춰내기는 하지만 자신이 빛 그 자체는 아닌 존재를 통해서 인생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기 안에 확실히 밝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있는 사람은 속에서 생수가 흘러 넘침과 같이 자신이 작과 같이 밝음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낮과 같은 밝음을 가진 사람과 또한 밤에 달빛을 그 밝음으로 삼아 살아가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런 상태를 고착화 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낮과 같은 밝음을 소망하고 그런 세계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서 그렇게 되도록 하시는 것이 이 창조과정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이 천지창조는 사람이 하나님을 안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에, 모든 사람이 낮과 같이 되어지는 과정을 설명하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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