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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일상적인 것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6. 13. 18:15 Writer : 김홍덕

얼마 전에 끝난 프랑스 오픈 테니스대회가 있었다. 나달이라는 선수가 있는데, 경기가 제법 볼만하다. 특히나 프랑스 오픈의 경우 크레이코트(맨땅으로 된 테니스장)에서 하는데, 나달이라는 선수는 크레이코트에서 절대 강자다. 최근 9년간 딱 한게임만 졌다.(그 대회를 제외하고 다 우승)... 여튼 그렇다는 것이고......


테니스 경기를 보다보면 점수를 따는 Winning Shot이라는 것이 있다. 그야말로 상대가 칠 수 없는 코스로 공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선수들은 그냥 평범한 공들을 주고 받는다. 상대가 서 있는 곳에다 공을 준다. 난 왜 그러는가 싶었다. 그냥 처음부터 상대가 치기 어려운 공울 주면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티비 화면으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보이기 때문)


<2013 프랑스오픈의 나달 - 출처 : 미디어다음>


자꾸 경기를 보다가 보니 몇 가지가 이해되었다. 먼저는 보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화면으로 보기에는 그냥 돌아서서 위닝샷을 날리면 될 것 같지만 선수들의 공은 그렇게 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평범해 보이는 공을 주고 받다가 보면 위닝샷을 칠 수 있는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평범한 공들을 주고 받지 않으면 자신의 실수로 경기를 망친다. 위닝샷이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테니스 경기를 보면서 복음과 삶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생긴 이후로 부터 끊임 없이 어떻게 이 복음을 전해볼까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 같아서는 수 만명이 모인 집회를 인도하여 이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사내에 신우회를 만들어서 성경공부를 하고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싶었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단번에 복권이 당첨되듯이 삶이 변하고, 삶의 질이 좋아지면 또 얼마나 좋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든, 살아가는 일이든, 테니스 경기에서 평범한 공을 주고 받는 것과 같이 작은 일상들을 반복하는 것에 충실하지 않으면, 테니스에서 위닝샷과 같이 복음을 전하거나 삶이 개선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정말 작은 일상들을 끊임 없이 반복하는 중에 생기는 것이다. 인생을 이렇게 살다가 언제 복음을 전하겠는가? 하는 체념 같은 시간들이 쌓이고 쌍여야 위닝샷을 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처음에는 그냥 내 안에 있는 생각을 쓰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하나씩 하나씩 반복적으로 계속 써 오다보니 내 안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없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계속 써 내려가다 보니 배운 것이다. 아직은 위닝샷을 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틈이 생긴 것이다. 


그저 평범할 것 같은 일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을 반복하는 것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 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삶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해 나가는 것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삶에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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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부정함이 왜 하나님의 목적이었는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연관된 하나가 없어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없어진다면 여자라는 말 조차 무의미해진다. 이것처럼 뭔가 전혀 다른데,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 있다.


자동차는 빠르게 달리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찰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래서 공기의 저항을 줄이려고 엄청난 기술적인 노력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동차는 타이어의 마찰이 없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 저항을 줄이는 것과 마찰력은 완전히 반대의 개념인데, 절대적으로 서로를 보증하는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부정하고 연약한 사람의 정체성이 자동차의 마찰력이라면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은 저항을 줄여서 앞으로 달리는 성질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의 부정함과 연약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성품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연약함과 부정함은 이런 것이다. 사람의 연약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날 수 없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고 극복하려는 사람의 부정함과 연약함이 어떤 목적 아래에서는 발휘되어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을 벗어나서는 사람이 스스로 선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한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칼의 날카로움은 요리하는 목적 아래서는 온전한 것이다. 마찰력도 타이어의 마찰을 이용하여 속력을 내는 것에서는 유용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이나 베면 부정한 것이고, 타이어가 아닌 다른 것이 마찰이 높아지면 그것 또한 부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지고 있고, 또한 사람이 스스로 제어하려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라면 언제나 온전하다. 식욕이나 성욕은 생존과 종족보전이라는 관점에서 온전한 것이다. 그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방적인 제어의 관점이 아니다. 사람에게 어떤 것, 그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신 뜻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 아래에 두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양의 본성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성욕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것은 축복이고 또한 생명을 낳는 것은 대단한 신비이며 축복이다. 이처럼 사람이 가진 각양의 연약함과 부정하게 취급 받는 것들이 목적 안에서 영광을 얻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것이 절제되어 영광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드러내실 도구와 성품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느냐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정하게도 하고 부정하게도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처사 또한 그렇다. 아직 자기가 동침하지 않은 약혼녀가 임신했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주 아주 정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면서 보여주는 다양한 행동과 모습들은 그 자체가 부정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에 너무 적합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우리의 모습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 그것이 부정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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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은 목적이라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본성을 절제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다면, 마트에서 물건을 훔쳐도 되고, 길을 가다 맘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언제라도 모텔로 가도 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결과를 유발하기도 하는 욕망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교회에 다니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거나, ‘나는 속세를 벗어나 불가에 입문했으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앞에서 고상한 척들 하지만 실상은 너나 나나 다 그런 욕망이 있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각양의 욕망과 연약함과 감정들을 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아래에서 볼 때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위험하다. 그래서 모든 날카로운 것은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제어를 받는다. 하지만 칼을 만드는 사람은 날카롭게 만들면 만들수록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칼의 목적이 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 아래에서 보면 그렇게 제어하려 한 날카로움이 의로운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각양의 부정함과 연약함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그런 특성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달성하는데 너무 적합하다고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각양의 욕망과 감정 그리고 또 연약한 육신을 주시고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목적 안에서는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육신의 어떤 성향이라도 다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며 억제하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며, 반대로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목적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방탕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식칼이라는 것이 목적 안에 있으면 먹고 사는 것에 아주 유용한 것이지만 그 목적을 벗어나면 흉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존재가 목적 안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바로 죄의 기준이다. 즉 어떤 것이 그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면 죄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죄가 바로 이것이다.(원어로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는 의미)


그러므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죄가 아니라, 어떤 일에 화를 내느냐 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불의한 것을 보고 화를 내지 않고, 사람은 경건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각양의 모습들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겨 놓으신 목적 안에서 표현되면 의로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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