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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성경

Category : 출간 서적 소개 Date : 2013. 8. 6. 12:17 Writer : 김홍덕

그간 이곳 블로그에 연재했던 

<치유> 부분을 모아 전자책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책은 <무료>이고

거의 모든 도서 어플에서 다운 받을 수 있으며, 

책 제목은 <나를 치유하는 성경>입니다.

 

가지고 계신 스마트폰의 앱스토어나

전자책 어플에서 다운 받으실 수 있습니다.

(현재 등록 진행 중)

 

그 전까지는 upaper에서 다운 받으실 수 있습니다.

upaper는 PC용 뷰어도 제공하므로

일반 PC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upaper로 연결됩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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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목적

맹인을 고치신 예수

중풍병자의 치유

귀신 들린 자의 회복

문둥병

죽음

부활

나에게 의미 있는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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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을 태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환상으로 하늘에서 부정한 짐승을 내려 주시면서 그것을 먹으라 하셨다. 베드로가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셨다(행 10장) 베드로가 율법적인 기준으로 볼 때 기는 것과 나는 것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끗하다고 하신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 4:4)고 했다. 이러한 사도들의 사건과 관점은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바닷 속의 생명들을 복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이 땅에 두신 어떤 것, 또 어떤 일도 부정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부정하게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기준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근원이 바로 선악과인 것이다.


이는 신앙에 있어서 아주 아주 중요하고 오묘한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선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먼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일도 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경영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각양의 부정하고 죄악된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선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법률적인 측면이나 도덕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선하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기준이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모든 것,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다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가 하나님의 성호를 선하게 찬양한 것과 같이 그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이러한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생소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생소하다면 오히려 이때까지 성경을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봤다는 것일 것이다. 즉 어떤 것은 해야 하는 것으로,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봐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성경에 두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포스트한 것과 같이 세상에는 마귀에게 빼앗겨 버린 사람과 세계와 현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이고, 이원론적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은 생각보다 현재의 기독교 신앙 안에 깊숙히 스며 있다. 어쩌면 신앙의 근간, 뿌리 아니면 본성에 가깝게 스며져 있다. 교역자에게 묻는 질문을 보면, 대부분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질문에 앞서 이미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술 마시는 것이 죄인가요?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천지창조 5일째는 바로 이것에 대한 말씀이다. 사실 알고보면 천지창조의 전 과정에 이러한 것은 흐르고 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간다는 것이, 선악과를 먹고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일원론적인 안목을 가진 하나님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 바로 창조의 과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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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채소가 <씨>가 있느냐? 아니냐? 즉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계시가 그 안에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할 수 있다면, 채소와 과목(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차이는 일년생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이 씨 있는 채소와 과목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마태복음 4장 4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이 산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에서 씨는 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한 하나님은 농부로 비유되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 갈증을 해갈하기 위하여 과학은 우주를 연구하고, 미생물의 세계도 연구한다. 아직은 큰 성과가 없어 보이는 이런 연구들의 근원은 다 사람의 기원을 알기 위한 애절한 노력이다. 기원을 알기 원한다는 것은 존재 목적을 알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 간절한 해갈을 바닷물과 같은 세상의 과학이나 문화에서 찾지 않고, 궁창 위의 물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 사람들은 바닷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명을 좇아서 뭍이 드러남과 같이 바다 수면 위로 나오게 된다. 이것을 성경은 <세례>라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은 씨 있는 채소를 낸다. 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이 내는 것 중에 채소가 있는가 하면 또한 과목이 있다. 일년 농사를 지어 또 씨를 뿌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는 채소가 있는가 하면, 한번 씨를 뿌려 나무가 되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나무가 있고, 그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이 자라게 되면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씨를 가진 열매, 즉 다시 다른 땅(사람)에 심겨져서 다시 같은 과실을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것과 같다고 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이 주는 생수를 마시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 넘칠 것이라 하셨다. 즉 자기 안에서 끊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 씨 있고 열매 있는 말씀을 맺을 수 있는 과실의 나무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창세기 1장의 셋째 날에서 <씨 있는 열매 맺는 나무>라고 하시고, 바다에서 드러난 땅과 같이 세상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그런 나무를 낼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인격체가 된다는 것을 천지창조의 과정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대한 인식이 있게 되는 것이 태초요 빛이 비치는 것이고, 빛 아래서 어두웠을 때 알지 못했던 것이 하나씩 알아가면서 인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의 해갈하는 것은 궁창 위의 물임을 알게 되고, 그것은 또한 사람이 바다와 같은 세상의 것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다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 표현 하는 것에는 사람이기에 풀과 같이 그냥 표현되어지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든 채소와 같은 말을 남겨 (하나님의)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신앙이 자람에 따라 다른 사람 안에서 계속 씨 있는 과실을 맺게 하는 나무의 씨와 같은 말씀을 내어 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셋째 날의 창조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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