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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요셉의 의로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3. 6. 4. 12:00 Writer : 김홍덕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약혼녀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 겪어본 사람이 많지 않은 일이라서 논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쉬운 상황은 아님이 분명하다. 요셉은 이러한 상황에서 천사가 나타나기 전에 이것에 대하여 조용히 끊고자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1:19)


이러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만약 예수를 믿는 당신에게 요셉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이슈화 하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라는 말씀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성경은 세상의 몇 퍼센트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성경일까?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둘 수 없다고 했는데, 겨우 몇 사람을 위한 말씀을 기록해 놓았을 리는 없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단순히 예수님의 육신이 어떻게 태어나셨는가 하는 것 만을 말씀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나심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알게 하려 하심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나를 대신하여 차비를 내어주듯 십자가를 대신 진 구주가 이 땅에 어떻게 태어나셨는가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내 안에 어떤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는지에 대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통하여 알게 하시기 위한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홍길동이라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생겨나는 것은 이러하니라”> 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제 3자일 뿐이다. 그리고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내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는 말도 안 되는 맹신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요셉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로 받아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조성되어갈 때 나는 어떠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 안에 새로운 관점이 생기게 될 때는 그 갈등이 사뭇 심하다. 창세기에서는 이것에 대하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했다. 세상의 일원으로 살면서 세상에서 의로 여기는 부와 명예의 경쟁력이 목표가 되고, 심지어 부와 명예를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다가 존재의 신인 여호와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 아들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내 안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이는 마치 임산부가 겪는 각양의 힘든 일에 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오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에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면서 어떤 행동을 하면 선하고 어떤 행동과 생각이 악한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그 안에 잉태되면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라는 두 가지의 생각이 충돌하여 임산부가 입덧을 하듯 괴로운 과정을 겪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은 건강하고 부유하고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께 범죄한 인생이라 여겨 삶이 곤고할 때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 같아 낙심하고, 또한 세상에서의 성공이 실상은 자신의 이익에 관한 것임을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 축복의 증거가 되는 양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신앙이라 여기다가,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어떠함에 관심을 두시는 분이 아니시며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을 알게 하기까지 경영하시는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과 의의 기준이 도전을 받지 않고, 마음이 평안하다고 생각이 들고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산다면 그가 들은 말씀이 씨가 없는 말씀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아직 하나님이 농사를 지을 땅과 같이 겸손한 지경에 이르는 경륜이 없는 척박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안에서 갈등이 반드시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그렇다>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나 자신이 그러했고, 내가 본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들었을 때 다들 죽을 만큼 힘들어 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그렇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임산부가 입덧을 하듯, 내 안에 내가 작용하지 않은 어떤 생명의 역사함이 느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지금 요셉이 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마리아에게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이 계셔서 마리아는 임신의 징후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신 것이다. 


우리도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내 안에서 태동이 되면 내가 작용하지 않았는데 내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마치 여자가 잉태한 것과 같은 영적 과정을 겪게 되고 그러한 과정 앞에 요셉과 같이 자신을 물려서 그 역사하심 앞에 자신의 의지를 부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용히 물러서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내 심령을 변화시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갈등이 있을 때에, 그것에 대하여 나의 의지로 대응하거나, 내 공로라 여기지 않고 성령이 하신 일, 곧 하나님이 하신 일 앞에 조용히 자기 자신을 물리면 요셉에게 천사가 현몽하듯 내 안의 변화의 원인도 알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 길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셉의 의로움이고 오늘 우리가 나의 의로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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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마태복음에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특히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상황에서부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에 대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다. 이것은 육신으로 사람이 임신을 하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마리아에게도 나타난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요셉은 아직 자신이 동침하지 않았는데,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의 증상을 보이니 이를 조용히 끊고자 했다고 19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자신이 동침하지 않은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고 하면 큰일이 날 텐데, 그 당시는 더 심각한 문제라서 아마 요셉이 이를 세상에 알렸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성경이 단순히 요셉이 아주 신사적인 사람이라서 마리아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조용히 끊고자 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인가?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만약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라면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고, 이것에 관해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동침하지 않은 약혼녀가 임신하는 사건을 겪는 일이 많지 않다. 만약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것이 성경을 대하는 자세라면 이 구절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관한 것을 기록한 성경이 아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일을 다 적으려 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지 못할 것이라 했는데, 어떤 이에게는 무관한 것을 기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성경은 왜 기록된 것인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목적인가? 만일 남자를 경험하지 않은 여자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부터 예수 믿을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있는가?


성경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누가 되었던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믿기 힘든 기적이 사실이라고 믿는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신념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그리고 믿었다 치자. 성령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잉태된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출발이 이미 다른데?


성경을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예수님의 나심의 사건은 오늘 우리의 영적인 이야기가 되어 나의 모습을 비추어 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육신의 나심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심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나는 것이 예수님의 나심과 같이 성령으로 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메시야요 그리스도요 영화에서 표현하는 영웅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사람은 이래야 한다’라고 가지고 있는 사람의 표준이 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 이전에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있는데 또 올 필요도 없고, 성경은 예수님을 구원을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하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각자 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사람은 예의가 발라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은 효도를 해야 한다’와 같이 다양한 그 마음의 그리스도들이 있었고 지금도 다들 있지만 그렇게 각자가 바라는 사람의 표준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대구에 계명대학교가 있는데, 본관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 벽면에 아주 큰 빈 액자가 있다. 그것을 <타불라 라사(Tabula Rasa):헬라어로 ‘비어있는 판’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는 이 학교가 바라는 인재상이 있는데 아직 찾지 못해서 빈 것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의 상이 다 달랐고, 또한 온전한 인간의 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상(像)이요 사람의 표준이요 사람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나타날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려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기준이고 표준이 성령으로 인하여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이 마치 여인에게서 아이가 잉태되듯 하나님의 영을 품게 되면 누구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또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무한한 자유의 말씀인 것이다.


만약 예수님은 되는데 나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믿을 필요 없다. 예수님이 되면 나도 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고생스럽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어차피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생명이 잉태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아들이 태어나듯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나심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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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의 둘째 날에는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위의 물이 있고, 아래에 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창조과학회에서는 옛날에는 지구의 대기권 위에 물층이 별도로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도 물을 나눈다. 사람들이 마시는 물을 상수(上水)라고 하고, 버리는 물을 하수(下水)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먹어도 되는 물과 그렇지 않은 물로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글의 짐승들이나 미개한 시절의 인간들도 물을 이렇게 구분하지는 않았다. 상수나 하수나 구분 없이 식수원이기도 했고 하수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을 나누어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는 것은, 사람이 먹어야 하는 물과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물로 구분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물을 나누신 과정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이다. 앞의 첫째 날에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은 혼돈하고 공허한 땅과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혼돈하는 땅과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마셔야 할 물과 그렇지 않은 물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둘째 날의 창조과정이다.


물은 사람의 갈증을 해소하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생물학적으로 사람 몸의 70%가 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물은 사람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사람의 몸은 물이 없으면 갈증이 생기고 마실 물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아의 정체성에 대하여 평생 목마름이 있다. 즉,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하신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람이 그 정체성의 혼돈과 공허로 인한 갈증을 채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셔야 할 물이 있고, 마시면 안 되는 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창조의 둘째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는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이라고 하시고 또 7장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38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생수라고 말씀 하셨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은 누구에게 물을 나눠주신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고, 또 자신을 믿는 자는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리라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을 마시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즉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끝없는 정체성의 갈증을 해소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세상에서 오는 물을 하염없이 마신다. 철학과 이방신과 과학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마시지만 그런 것은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무리 마셔도 늘 목이 마르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돈을 모아도 끝이 없고, 명예를 좇는 사람도 학문을 좇는 사람도 다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해도 또 목마른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끊임없이 목마르게 하는 모든 것은 다 위대함을 좇는 것이다. 돈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돈으로 위대해지려는 것이고, 학문을 좇는 사람은 학문으로 위대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위대함은 사람이 그런 것의 아름다움을 보고 흠모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난 사람들을 네피림이라고 했다. 이는 ‘장대한 자’, ‘위대한 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할 사람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같은 것을 취하여 위대해졌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날 때 성경은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라고 했다. 즉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섞여버린 것이다. 그것이 홍수다.


홍수가 나면 아무리 물이 많아도 마실 물이 없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이론이 있어도 그것이 세상의 것으로 인한 위대함과 아름다움이라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상수도와 하수도가 합해지면 상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수가 된다. 그래서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해지면 다 땅의 물이 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변질되면 못 먹는 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의 딸을 취한 네피림으로 홍수가 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 세상의 것을 좇아서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하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궁창 위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표준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표준과 다른 것이나 이 표준을 다른 것과 혼합한 모든 것은 다 궁창 아래 있는 물이요, 마시고 마셔도 목마른 물이요, 노아 홍수 때 범람하여 마실 수 없는 물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둘째 날에 물을 나누신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사람이 마셔야 할 물이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정체성의 갈증에 대하여 마실 물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거룩함이다. 이 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지창조 이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것 같은 삶에 있다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사람의 형상으로 가는 과정에는 먼저 빛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빛으로 밝음으로 내 정체성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 무엇인지를 구분하여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수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 둘째 날의 의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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