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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경매 사태를 보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3. 7. 24. 15:47 Writer : 김홍덕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다"라는 제목으로 7월 23일 미디어 다음에 기사가 떳다.(기사 원문) 이는 최근에 경기도 성남의 <충성교회>가 경매로 나왔다는 뉴스와 연결된 시사 논평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대 명예교수 손봉호 교수는 이 현상에 대하여 "교회 경매는 타락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이참에 충성교회 뿐 아니라 제법 규모 있는 교회들의 경매 상황에 대하여도 언론에 기사화되었다.

 

 

(왼쪽)종교시설 역대 최고가로 경매에 나온 판교 충성교회. (오른쪽)인천 송도의 한 상가건물에 입주한 교회. 매물로 나와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사실 이런 문제는 어쩌면 교회가 대형화, 초호화 건물을 추구하면서 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블로그의 원래 제목이 <큰 교회는 모르는 성경>이었다. 나 역시도 이러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크고 화려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필요(needs)>라는 것도 어떤 가치관, 어떤 철학 안에서의 <필요>인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교회가 경매 나왔다는 말에 신문은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다"라고 화답하듯 기사를 썻다. 교회와 돈, 이는 어떤 관계일까? 사실 알고 보면 비단 교회뿐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도 이 돈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돈과 관련된 다양한 의견과 갈등들이 있는데, 그 원인은 한마디로 <돈>이라는 것에 대한 정체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돈과 관련해서 각종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원인은 돈의 유무를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큰 교회의 목사들은 부인할 수 있겠지만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 왔고, 또한 지금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영광으로 여긴다고 하나님의 성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또한 교회가 화려하고 대형화 되듯 사람의 삶에서 돈이라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잘 사는 것, 즉 <돈 =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암묵적 공식이 신앙의 기본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점점 더 크고 화려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크고 화려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은 것, 곧 복으로 여기신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적인 성공이 신앙의 척도가 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적 성공의 대명사가 바로 돈이니까?

 

그러므로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다>라고 하는 명제는 교회의 신앙관이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신앙관이 육신의 삶의 형식과 모양에 기준과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이는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행동은 무엇인가?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도를 열심히하고(Do)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Do) 하나님께서 복(돈과 성공)을 주신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가진 신앙관이고, 그 신앙적 오류가 교회의 경매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돈은 그저 하나의 개성이고 특성이다. 즉 어떤 사람은 돈이 많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은, 그저 어떤 사람의 성격은 급하고 어떤 사람의 성격은 느긋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돈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개성이고 특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격이 급한 것이 느긋한 것 보다 좋다고 할 수 없듯이, 돈 또한 늘 그렇다. 그러므로 돈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갈등한다는 것은 그저 사람 사이의 성격적인 갈등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돈의 정체성을 이렇듯 하나의 개성과 같이 보지 않고, 신앙의 결과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는 척도로 여기는 것에 두다 보니 많은 것이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나 노력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세상에서의 축복과 죽어서 천국이라는 상을 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교회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자신들의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인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도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개념을 세상적인 가치관 안에서 찾고 그 가치관으로 인하여 세상의 가치관 처럼 노력한 것의 결과요 성과로 돈이 주어지듯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돈으로 갚으신다는 그릇된 신앙관과 하나님과 돈에 대한 정체성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경매가 되는 일도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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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5일째에 바다의 생물들에게 축북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는 것이 이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 창조의 과정이라는 이야기인가? 아무리 성경을 개방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공부한다 해도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이 세상의 어떤 문제, 어떤 일도 다 하나님께서 다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생각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마귀가 싸운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마귀가 싸운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과정에서 다섯째 날에 바다의 물고기에 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셨다는 것이 무슨 연관성이 있겠나 싶지만, 이것은 동일 선상의 문제이다.

 

사람들, 특히나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 종파의 경우 하나님과 마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짓고 각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역사해서 복을 주신 것과 마귀가 간섭해서 해를 당하는 것으로 규정을 짓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는 두 가지 큰 오류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인데 하나님께서 관장하지 못하는 세계가 발생한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싸울 만큼 동급의 신과 같은 존재 곧 마귀가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못하고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일부를 관장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헛점이 있는 분이 아니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소부재의 하나님, 천지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틀린 말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마귀가 하나님과 싸운다는 것은 그리고 아직도 그 싸움이 끝나지 않고 세상의 종말이 되어야 그 싸움이 끝나고 최후의 승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귀가 적어도 현재까지는 동급의 존재로서 세상을 양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방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급으로 싸우는 존재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유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들은 아주 근본적인 오류가 있는 신앙의 관점이다.

 

 

 

 

 

실재로 욥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부리시는 것으로 나오고 있고, 사울왕에게도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셨다고 했으며, 예수님 역시 마귀들과 다투시거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씀 만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셨고, 또한 어떤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찬양하기도 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과 싸우는 존재나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마귀나 귀신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이와 같이 잘못되어 있듯이, 세상이 물질 만능주의나 향락으로 관영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역시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관대하시거나, 손을 쓸 수 없어서 그렇게 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노아의 시대에 온 세상을 물로 한번 쓸어버리시고 새롭게 세상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한번 만드신 이 세상을 다신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시간도 역시 천년이 하루 같은 분이시니, 이 세상의 죄악이 보기 싫어지시면 그날로 당장 이 우주를 새로 만드시면 되는 분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런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이 땅의 죄악이 점점 더해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책이 없거나,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보고서 그 척도에 따라 세상을 정화시키시는 분 역시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역사 이래로 어떤 시대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정도로 기독교인들이 잘한 시대는 없었다. 단 한번도 전쟁이 없고, 죄악이 없는 시대가 없었으니까?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창조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이나 마귀가 하나님의 무능함이나 기독교인들의 반응이 부족해서 이 모양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도 다 자기들의 세계 안에서 하루하루 창대해지도록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그 때 이미 그렇게 해 두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과정이 바로 천지창조 다섯째 날의 비밀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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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되었던 다른 종교가 되었던 대부분의 경우는 어떤 것에 대한 선악을 판단하고 그 중에서 악한 것을 배제하고 삶과 생각에서 떨쳐 내는 것에 신앙적인 활동을 집중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은 그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고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만약에 교회가 동일하게 그런 모델을 신앙의 시스템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은 다른 종교화의 차별성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 즉 존재의 하나님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악한 것을 떨쳐 내기 위하여 기도와 같은 갖가지 행동을 해야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천지창조를 이야기하다가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생뚱 맞은 이야기 같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지속적으로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물리적인 세상, 현상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천지창조는 한 사람이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창조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조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은 어두움에서 빛을 만나듯 해야하고 또 어떤 것은 갈라지고 버려져야 할 것은 그렇게 되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은 한 사람이 세상에 속해 살면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 바로 천지 창조인 것이다.

 

첫째 날에 이야기 했지만, 이 천지라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관이다.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 그 사람이 규정하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가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것에서 세상이 받아들여지고 자기 만의 세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 창조이다. 어떤 이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받게 될 것이고, 어떤 이는 폭파해버리고 싶은 세상일 수 있다. 그런 중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미가 열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알게되고 수용하게 되는 세상이 바로 창세기에 기록된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다섯 째 날의 창조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또한 성경에서 바다는 세상에 비유가 된다. 그런데, 그 세상에 사는 물고기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세상이 열리는 과정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삶의 승부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세상을 만드실 때 그렇게 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종교가 세상적 가치관을 멀리하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떨쳐 내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친다. 세상의 향락과 물질 만능주의 같은 사상들을 신앙인이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멀리하고 죄악시 한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바닷속에 있는 생명체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때문인지, 세상은 날이 갈수록 타락하고 물질 만능주의는 더 왕성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종교인들이 경계하는 향락의 문화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사진은 hermeth.egloos.com가 뽑은 세계 10대 향락의 도시 1위 태국 파타야 >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복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는 것을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신앙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다섯째 날의 창조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이 이 세상의 철학과 사상이 날이 갈수록 창대해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어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 그 사람에게 다섯째 날의 창조과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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