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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천지창조의 말씀은 세상이 창조되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창세기를 통하여 그것을 기록하신 것은 이 물리적인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가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그것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셋째 날에는 물을 한곳으로 모으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같은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땅은 사람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고, 또한 하나님은 하늘이고 사람은 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땅이 궁창 아래의 물들 중에서 드러났다는 것은, 어떤 땅은 물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 머무는 땅, 생명이신 하나님이 그 호흡을 불어넣을 인간이 머물 땅은 세상의 학문과 지식으로 정체성의 갈증을 채우는 것이 아니기에 물 위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입니다. 나는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있고 나면 빛이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넷째 날의 창조의 과정이다. 어떤 것은 어둡고 어떤 것은 밝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천지창조 첫째 날에 이미 “빛”을 만드셨다. 그런데 지금 다시 넷째 날이 되어서 낮을 주관하는 광명과 밤을 주관하는 광명 그리고 별을 만드셨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흔히 일월성신을 만드셨다고 한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다시 한번 말하고 또 이 천지창조에 대하여 마칠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는 물리적인 세상을 만드신 것을 설명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것은 낮과 밤, 밝음과 어두움에 관한 것이다. 즉 사람이 어떤 세계에 대하여 밝은 것이 있다. “이치에 밝다”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수에 밝은 사람”이라는 것 또한 같은 이야기이다. 즉 어떤 세계에 대하여 잘 아는 것을 밝다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어둡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 넷째 날의 창조과정은 사람이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물이 하나로 모이고 땅이 드러났을 때)가 되면 무엇이 밝은 것인지 또한 무엇이 어두운 것인지 알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넷째 날의 창조이고 그것을 설명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밝음은 하나님에 대한 밝음이요, 그것은 또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밝음인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어떤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또한 어떤 것이 사람에 대하여 어두운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공허한고 혼돈하던 땅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과정에는 빛이 있어 사물을 인식함과 같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고, 다음으로는 사람 안에 있는 공허함의 갈증을 채우는 것에는 두 가지 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음으로 세상의 지식인 궁창 아래의 물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땅이 물에서 드러남과 같이 고백하게 되고(이것은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임을 알게 된다는 것), 그리고 나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밝은 것이며 또한 어느 것이 어두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 하나 하나가 바로 창세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루 하루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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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셋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땅이 드러나게 하신다. 천하의 물, 곧 하늘 아래의 모든 물, 즉 궁창 아래의 모든 물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셔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해수면 위에 있는 모든 땅의 체적보다 해수면 아래의 체적이 더 크다고 한다. 즉 지구는 바다 위의 모든 땅을 다 바다 안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을 다 한곳으로 모아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이 창세기의 말씀 곧 천지가 창조되는 과정은 단순히 물리적인 세상의 기원을 밝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누차 이야기해 가고 있다. 지금 이 천지창조는 세상의 창조과정을 통하여 흙으로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하늘이나 바다나 땅과 같은 세계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태어남이 없었다면 세상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물이 어디로 모이고 땅이 드러나고 하는 모든 것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천지창조 과정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물을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누셨다. 이는 혼돈하는 땅과 같은 사람(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땅은 사람을 말함)의 공허함에 대한 갈증, 즉 자기 정체성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하여 물을 마셔야 하는데, 물은 상수가 있고 하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수도의 물을 마시고 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해갈하는 것에 대하여 하늘 아래, 즉 세상의 온갖 지식으로는 사람의 정체성이 해갈되지 않는다는 것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심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이 궁창 아래의 모든 물을 한 곳으로 모으셨다고 했다. 즉 사람이 그 정체성을 해갈하기 위하여 마셔서는 안 되는 세상의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한 곳으로 모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물을 하나로 모으신 것에는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물을 모아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 보다는 땅이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즉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이론과 지식 가운데서 사람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을 종교적인 예식으로 가져온다면 그것은 세례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셋째 날의 창조는 물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땅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다. 즉 사람이 궁창 아래의 물, 곧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하여 취하는 모든 세상의 지식들인 궁창 아래의 물에 매몰되지 않고 물 위로 드러나게 하시기 위하여 하늘 아래의 물을 모으시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허무함을 느끼고 또한 그것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이 안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같다. 세례는 밥티스마(Baptisma)라고 하는데 이는 ‘물에 잠기다’는 의미이다. 왜 사람을 물에 잠그는가 하면, 사람이 물 속에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즉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세상이 추구하는 각종 위대함을 좇는 지식과 종교와 규례 안에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인생은 허무하다고 한다. 많은 경우 세상에서 높은 정신적 세계를 이룬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추구한 모든 것이 다 하늘 아래의 물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돈을 벌어 자신을 만족시켜 보려 하고, 또 공부를 많이 하면 자신의 갈증이 해갈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고, 또 때로는 종교적인 규범을 행동으로 지켜 행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보면 그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의 모든 물을 다 한 곳으로 모으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땅이 드러났다는 것은 사람이 궁창 아래의 물 속에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궁창 아래의 물과 같은 철학과 종교와 황금을 하염없이 마시려 하고 또 마신다.


그러나 그 결국은 다 물에서 땅이 드러나듯, 궁창 아래의 물을 마시던 사람들은 결국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땅이 물 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의 물, 궁창 아래의 물을 먹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사람은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안식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해서, 다시 말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서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심으로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사물을 구분하듯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된다는 것이 첫째 날의 창조 과정이고,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실 물과 마셔서는 안 되는 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그 둘째 날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지식 가운데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고백은 인생은 세상의 것을 취하여 살 수 없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물에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것, 궁창 아래의 물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하여는 넷째 날에 말씀하고 계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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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일상적인 것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6. 13. 18:15 Writer : 김홍덕

얼마 전에 끝난 프랑스 오픈 테니스대회가 있었다. 나달이라는 선수가 있는데, 경기가 제법 볼만하다. 특히나 프랑스 오픈의 경우 크레이코트(맨땅으로 된 테니스장)에서 하는데, 나달이라는 선수는 크레이코트에서 절대 강자다. 최근 9년간 딱 한게임만 졌다.(그 대회를 제외하고 다 우승)... 여튼 그렇다는 것이고......


테니스 경기를 보다보면 점수를 따는 Winning Shot이라는 것이 있다. 그야말로 상대가 칠 수 없는 코스로 공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선수들은 그냥 평범한 공들을 주고 받는다. 상대가 서 있는 곳에다 공을 준다. 난 왜 그러는가 싶었다. 그냥 처음부터 상대가 치기 어려운 공울 주면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티비 화면으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보이기 때문)


<2013 프랑스오픈의 나달 - 출처 : 미디어다음>


자꾸 경기를 보다가 보니 몇 가지가 이해되었다. 먼저는 보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화면으로 보기에는 그냥 돌아서서 위닝샷을 날리면 될 것 같지만 선수들의 공은 그렇게 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평범해 보이는 공을 주고 받다가 보면 위닝샷을 칠 수 있는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평범한 공들을 주고 받지 않으면 자신의 실수로 경기를 망친다. 위닝샷이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테니스 경기를 보면서 복음과 삶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생긴 이후로 부터 끊임 없이 어떻게 이 복음을 전해볼까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 같아서는 수 만명이 모인 집회를 인도하여 이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사내에 신우회를 만들어서 성경공부를 하고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싶었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단번에 복권이 당첨되듯이 삶이 변하고, 삶의 질이 좋아지면 또 얼마나 좋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든, 살아가는 일이든, 테니스 경기에서 평범한 공을 주고 받는 것과 같이 작은 일상들을 반복하는 것에 충실하지 않으면, 테니스에서 위닝샷과 같이 복음을 전하거나 삶이 개선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정말 작은 일상들을 끊임 없이 반복하는 중에 생기는 것이다. 인생을 이렇게 살다가 언제 복음을 전하겠는가? 하는 체념 같은 시간들이 쌓이고 쌍여야 위닝샷을 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처음에는 그냥 내 안에 있는 생각을 쓰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하나씩 하나씩 반복적으로 계속 써 오다보니 내 안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없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계속 써 내려가다 보니 배운 것이다. 아직은 위닝샷을 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틈이 생긴 것이다. 


그저 평범할 것 같은 일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을 반복하는 것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 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삶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해 나가는 것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삶에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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