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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부활 (4)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20. 13:26 Writer : 김홍덕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육신으로도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영적인 죽음을 맛본 사람은 그 보다 더할 것이다. 세상에서 경쟁력으로 삼고, 의롭게 여기는 기준들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죽음을 맛본 사람은 그 가치관이 다르다. 살아가는 형식에 관해서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 마음 안에 돈과 명예와 고상함과 같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도 않고, 또한 신앙에 있어 부가될수록 좋은 것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그것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세계에 대하여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육신에 관하여, 육신의 어떠함에 관하여, 먹고 사는 것과 육신의 부귀영화에 관하여 죽은 자로 발견되었다면 그것에 관하여 어떤 자극에도 말이 없을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죽었으니까? 그것이 죽음이다. 부활은 육신의 어떠함에 대해 그런 죽음을 맛본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즉 육신의 경쟁력에서 패하고, 육신의 경쟁력 앞에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이다. 그런 죽음도 세례도 없이 하나님께서 살리시지 않는다. 살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던 것처럼 살려 놓아도 죽기 이전과 같이 산다면 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살리신, 또 선지자나 사도들이 죽음 가운데서 살려 놓은 사람이 역시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육신의 어떠함은 살려 놓아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런 삶과 그런 육신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생각지 않으신다. 부활은 의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는 목적이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의에 대하여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데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또 죽은 자를 살리시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교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이 자기의 삶이 되었을 때, 그 사람 안에 부활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부활이라는 것이 하나님만 아시는 때에, 예수님께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재림하시는 날 무덤에서 모든 사람이 육신을 회복하여 살아나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려면 지금 살아가는 그 사람의 삶이 부활한 생명으로 살고 있어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먼저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야 프로야구 경기에 참가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 안에 부활의 생명과 증거가 없는데, 실재적은 부활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 신앙과 부활의 시작이라면 부활은 삶의 시작이다. 육신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구원은 어떤 생명이 되는 시작이고 부활은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거듭남이라고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같이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 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구원과 거듭남은 태어남이고 부활은 장성하여 그 아버지의 생명을 표현하며 사는 삶 자체인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같이 죽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어떤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살리시는지를 알게 된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심과 같이 삶으로 보여주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부활을 보이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삶은 그 삶을 볼 때, 보는 사람이 그 스스로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삶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를 보면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의롭게 여기는 기준 앞에서는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과,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라는 죄인의 틀에 죽게 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정체성의 발견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을 때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법으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살리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듯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는 것을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삶이며,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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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부활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16. 14:50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기에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한 개인의 신앙도 피라미드의 법이 있는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맛보아야 한다. 큰물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례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에 잠겼다 나오는 것을 말함인데, 이것은 물에 들어가기 전과 물에서 나온 다음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증거 하는 예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물에 들어갔다 나와도 삶이 달라진 것이 없다면 세례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즉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해도, 그 마음 안에 예수 믿어 세상에서 주는 복을 받겠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다. 무늬만 세례인 것이다.





이렇듯 세례는 그 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다른 것이다. 홍해를 건너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과 건넌 다음의 이스라엘은 다른 백성이듯이 각 개인의 신앙도 세상의 법에 대하여 큰물에 잠겼다가 나온 것과 같이 죽은 자 같이 된 사람은 신앙 안에서 세상의 형식에 대하여 의를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사람의 형식에 관한 재물이나 지위나 예의 같은 것이 있어야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 기준이었는데,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또 다시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다시 건너 애굽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곳에는 죽음 밖에 없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이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가진 가치관과 다르게 사는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이고, 이 세계에 대한 태초가 열린 것이며, 빛이 비취어 어둡던 눈을 뜨게 된 것이며, 중풍병도 귀신 들린 것도 아닌 모습으로 온전히 하늘의 뜻이 사람의 삶에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이다. 이것이 새 생명인 것이다. 단순히 부정하던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새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례를 받아도 가치관은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신앙에도 교회 생활에도 그런 가치관으로 치장한 것이 무늬만 세례이듯, 인생을 보는 가치관과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교회만 다닌다고 새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삶을 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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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17 다윗의 자손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3. 5. 14. 17:59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개인의 구원 그 자체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한 개인의 신앙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가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다윗이 왕이었던, 다윗이 가진 마음과 의가 나라의 의가 되었던 것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의로 가진 사람들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의를 의로 삼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에는 유독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많고, 또한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다. 왕이 있다는 것은 나라와 백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나라와 같은 조직체와 정치가 필요한 나라를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시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기 안에서 시작된 사람들이 그 백성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시작이, 자신에게 태초가 하나님인 사람들이 모인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의 교회다.


이 교회는 사울이 왕인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사울과 같이 세상적인 경쟁력이 이기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나라는 다윗과 같이 그 육신의 아버지 조차 내어 놓기 꺼려하는 그런 모양을 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그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것이 다윗이 왕인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이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과 같이 세상적인 경쟁력을 가진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생명)으로 이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왕인 나라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들이 교회 건물이 세상의 건물보다 좋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면서 다투듯이 좋은 건물로 변하고 있고, 교회 안에 세상에서 경쟁력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어리석음도 모자라서 교회 안에서 그들을 그 지위 하나로 인정한다. 재산의 정도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제 고전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그런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사울의 나라이다. 사울이 다른 사람보다 어깨 하나 더 있을 정도로 경쟁력 있는 사람이었듯, 교회도 세상의 경쟁력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고 지칠 줄 모르고 그것을 향해간다. 하지만 그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단언코 교회가 세상의 경쟁력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이미 버림 받은 교회이다. 그런 교회는 세상의 조직체일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게 될 때 시작되는 세계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고 그것을 누리는 세계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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