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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부정함이 왜 하나님의 목적이었는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연관된 하나가 없어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없어진다면 여자라는 말 조차 무의미해진다. 이것처럼 뭔가 전혀 다른데,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 있다.


자동차는 빠르게 달리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찰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래서 공기의 저항을 줄이려고 엄청난 기술적인 노력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동차는 타이어의 마찰이 없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 저항을 줄이는 것과 마찰력은 완전히 반대의 개념인데, 절대적으로 서로를 보증하는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부정하고 연약한 사람의 정체성이 자동차의 마찰력이라면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은 저항을 줄여서 앞으로 달리는 성질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의 부정함과 연약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성품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연약함과 부정함은 이런 것이다. 사람의 연약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날 수 없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고 극복하려는 사람의 부정함과 연약함이 어떤 목적 아래에서는 발휘되어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을 벗어나서는 사람이 스스로 선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한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칼의 날카로움은 요리하는 목적 아래서는 온전한 것이다. 마찰력도 타이어의 마찰을 이용하여 속력을 내는 것에서는 유용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이나 베면 부정한 것이고, 타이어가 아닌 다른 것이 마찰이 높아지면 그것 또한 부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지고 있고, 또한 사람이 스스로 제어하려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라면 언제나 온전하다. 식욕이나 성욕은 생존과 종족보전이라는 관점에서 온전한 것이다. 그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방적인 제어의 관점이 아니다. 사람에게 어떤 것, 그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신 뜻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 아래에 두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양의 본성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성욕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것은 축복이고 또한 생명을 낳는 것은 대단한 신비이며 축복이다. 이처럼 사람이 가진 각양의 연약함과 부정하게 취급 받는 것들이 목적 안에서 영광을 얻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것이 절제되어 영광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드러내실 도구와 성품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느냐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정하게도 하고 부정하게도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처사 또한 그렇다. 아직 자기가 동침하지 않은 약혼녀가 임신했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주 아주 정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면서 보여주는 다양한 행동과 모습들은 그 자체가 부정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에 너무 적합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우리의 모습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 그것이 부정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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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은 목적이라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본성을 절제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다면, 마트에서 물건을 훔쳐도 되고, 길을 가다 맘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언제라도 모텔로 가도 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결과를 유발하기도 하는 욕망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교회에 다니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거나, ‘나는 속세를 벗어나 불가에 입문했으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앞에서 고상한 척들 하지만 실상은 너나 나나 다 그런 욕망이 있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각양의 욕망과 연약함과 감정들을 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아래에서 볼 때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위험하다. 그래서 모든 날카로운 것은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제어를 받는다. 하지만 칼을 만드는 사람은 날카롭게 만들면 만들수록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칼의 목적이 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 아래에서 보면 그렇게 제어하려 한 날카로움이 의로운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각양의 부정함과 연약함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그런 특성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달성하는데 너무 적합하다고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각양의 욕망과 감정 그리고 또 연약한 육신을 주시고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목적 안에서는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육신의 어떤 성향이라도 다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며 억제하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며, 반대로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목적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방탕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식칼이라는 것이 목적 안에 있으면 먹고 사는 것에 아주 유용한 것이지만 그 목적을 벗어나면 흉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존재가 목적 안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바로 죄의 기준이다. 즉 어떤 것이 그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면 죄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죄가 바로 이것이다.(원어로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는 의미)


그러므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죄가 아니라, 어떤 일에 화를 내느냐 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불의한 것을 보고 화를 내지 않고, 사람은 경건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각양의 모습들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겨 놓으신 목적 안에서 표현되면 의로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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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이 부정한 마리아를 용납함으로 나심이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사람이 보기에는 부정해 보이는 것을 용납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신 그 인생을 부정하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부정한 것을 용납하는 것, 사람이 생각할 때 부정하다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좋아하셨다는 것을 감사하고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잉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결국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그 기준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세리와 창녀들과 죄인들과 함께 다니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형당한 죄목이었고, 그렇게 예수님께 죄를 메긴 유대인의 안목은 요셉과는 달리 부정한 것을 배척하는 것이었고 심판하는 것이었다. 그 유대인이 요셉이었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듯 육신을 부인하려 한다. 육신 안에서 나오는 온갖 생각과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안에서 배척하려 하고 늘 심판하며 금하려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실수하셔서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시는 것이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일이시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들도 태운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욕망을 그대로 다 표출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가? 이 질문은, 사람이 자기 안에 욕망들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보통 종교인들이 말하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 사회적으로 아주 도덕적이고 사람들이 볼 때 칭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적인 기준에 대하여 세상적인 것으로 이긴 분이 아니시다. 즉, 사람이 세상적 가치관으로 인간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세상적인 노력이나 제도나 재물이나 권력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내가 하늘의 군사들로 저들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 그것 때문이다. 그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지는 것이다. 그 패배가 하나님 앞에서 이기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각양의 생각들, 그 생각들을 부정하게 여기는 세상적인 관점들이 있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정죄하고, 신분을 보고 사람의 가치를 메긴다. 사람이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표현할 때 천박하다 여긴다. 다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이다.


우리는 그것 앞에서 늘 죄인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늘 죄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같이. 그런데 그것을 피하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다 한 인간의 본성을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며 그것을 부인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부정한 기준 앞에 죄인이 되셨는데 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존재들의 행위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에 물든 유대인과 로마인에 의해 죄를 받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안에서 있고 표현되는 욕망들, 사람들이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는 그 욕망들이 표현됨으로 죄인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피하려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세상의 기준 앞에 죄인이 되어 드러나고 그것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비로서 그를 살리신다. 


이런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부활한 사람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흠모할 것이 나온다. 여기에 이르지 않고서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늘 부정하게 여긴 우리의 본 모습을 인정하는 것으로 어떻게 경건한 사람이 되는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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