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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부활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10. 11:28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을 못박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관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이 사람의 형식에 속한 행동에 관한 것, 사회적인 교양과 지위에 관한 것, 예의와 고상함에 관한 것을 쌓으면 쌓을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여기는 그 가치관이다. 이러한 가치관 앞에 서면 죄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그런 것은 자신에게서는 죽은 것과 같은 것임을 아는 사람, 또한 그런 것을 추구하던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았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알게 되고 고백함으로 지난 날 자신이 그런 가치관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죽어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심과 같이 그 사람의 인생을 죽은 자 가운데서 건져내셔서 온전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내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시는 것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면서 단지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다가 죽은 사람의 육신을 어느 때에 다시 살리실 것이라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 아닌 것이다.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죽음을 맛본 사람이라야 그 부활을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연장선 상에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부활 역시 육신의 부활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다. 어떤 세계에 대하여 다시 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죽음에 따르는 부활이 있는 것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어떤 부활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아갈 때 나에게도 부활이 임하게 되는 것이지, 부활절에 계란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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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부활은 구원과 같은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과정에서 처음에는 홍해를 건너고 다음에는 요단강이라는 큰 물을 건너게 되는데, 둘 다 큰 물을 건넘과 같이 구원과 부활도 어떤 측면에서는 같은 섭리인 것이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큰 물을 건넌 자”라는 의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아 거듭남이 있고, 또 하나님 안에서 부활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섭리 안에 있는 두 가지의 과정인 것이다. 마치 씨가 땅에 심겨지면 싹이 나는 것이 있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있듯, 구원과 부활도 하나님의 동일한 경륜 안에 있는 것이로되, 다만 그 과정이 다른 것이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과 같이 세상에서 종살이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각 개인의 삶이 어떤 환경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종살이와 같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신앙의 여정이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종살이라고 깨닫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라미드를 쌓은 애굽에서 종살이 했듯, 자신의 삶이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은 오르지도 못할 정상을 구성하기 위하여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때, 그때 자신의 삶이 종살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신앙은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즉 구원이 신앙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경륜이다.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팽배한 의의 기준, 그 기준 안에서 보면 부유할수록 성공한 삶이고, 세상에서 신분이 높아질수록 성공한 삶이며, 종교 안에서 그 계율을 잘 지켜 행하면 그것이 의로운 것인 세계에서는 나의 삶이 거저 피라미드의 한 조각에 불과하며, 그 정상에는 오를 수 없고, 설사 천신만고 끝에 오른다 해도, 영원히 내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죽음이다.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 앞에서 실패자로 드러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계가 시간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적어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죽은 것이다. 그 죽음이 있어야 구원이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죽음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가치관이요,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에서 돌아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회개고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활을 얻는 죽음인 것이다. 이렇게 죽지 않고 부활을 얻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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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부활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9. 10:23 Writer : 김홍덕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부활이라고들 한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근원에 대하여 더 분명히 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원이라는 것은 어떤 생명이 어떤 죽음을 당했을 때 그때 부활이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사건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같다고 여기겠지만 말 같이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같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마치 TV에 나오는 연예인은 나를 모르는데 내가 TV에서 봤다고 안다고 하듯이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니다. 


특정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죽음을 당했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들이 말하는 범죄, 살인이나 절도와 같은 죄로 인함이 아니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정체성에 대하여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른 것에서 비롯된 죽음이다.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어떤 분인지 본 적은 없지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그 메시야가 어떤 분인가 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메시야는 곧 그리스도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정치적 상황과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능력을 보여주실 분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와 정치와 같은 세상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이제 굶어 죽지 않겠구나 열광했고, 병자들을 고칠 때 열광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이제 로마는 끝장 날것이라는 기대로 환호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이 메시야라고 말씀하시니 그것은 이때껏 메시야에 대하여 온갖 노력과 공의로 쌓은 자리에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쳐온 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많던 기적과 치유와 능력은 어디에 가고 초라하게 십자가로 끌려가셔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세상에서 능력을 쌓고, 율법의 규례를 지켜 행하려 노력하고, 예의 바르고, 공로가 있어야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처형되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기대했던 예수가 힘 한번 못써보고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실망을 넘어선 배신감이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치기도 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반 군중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 마음 깊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와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청탁하는 일반 군중들과 같은 마음이 드러나서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래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간 베드로가 부인하기를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부인한 것이다. 즉, 자기의 마음속에 기대했던 예수는 어디 가고, 저렇게 매 맞고 있는 예수만 남았나 하는 마음으로 보니 매 맞고 있는 예수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 번 부인할 것은 예언하신 것은 베드로의 행위를 예언하신 것이지만, 실재로는 베드로의 마음 안에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과정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죽음을 당하셨고, 왜 하나님께서 그 죽음에 대하여 다시 살리셨는지에 대한 비밀이 이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죽임을 당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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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16-17 몸과 그림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5. 7. 15:44 Writer : 김홍덕

세상은 모든 것이 형식과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어느 것에도 예외가 없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그러하다. 이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이신 하나님, 의를 가지신 하나님이 영으로 계시고 그 성품을 세상을 통해 표현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 특히나 사람이 만든 것은 다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다.


자동차가 있다면, 자동차의 내용이 있다. 자동차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다. 존재의 이유이고 존재의 목적인 운송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자동차가 자동차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자동차의 실체는 이동이나 운송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보고, 또한 그 안에 앉을 수 있는 물체로서의 자동차가 자동차가 아니라, 이동하는 것이 자동차의 본질이고 내용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종교의 세계 안에는 이것이 더욱 중요하다. 제사를 예로 들면 제사의 절차나 예식이나 기물이 본질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목적과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있는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제사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신앙이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는 그 규례가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진정한 목적이고 실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에게서 부터 지금의 많은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법을 알지 못한 체 신앙생활을 하고 또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한계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화려해지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연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각종 규례를 정하신 것은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성전의 규례와 같이 사람이 경륜을 거쳐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규례를 주신 것이지, 성전의 모양을 규례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지금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 골로새 교회에 세상의 자연과학과 철학이 들어오기도 했고, 또한 육신을 부인하는 즉 육신은 거저 부정할 뿐이라 주장하는 영지주의도 있었지만, 또한 당시의 교회들의 시작 대부분이 아시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정한 규례를 지키는 것이 신앙의 모습이라는 주장 또한 항상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 사도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각종 종교적인 예식을 지켜야만 된다고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에 관하여 경계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은 다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림자는 본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기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절기를 주신 이유를 아는 것이 그림자가 아닌 몸체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셔서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모든 규례들이 다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가 그림자의 본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교회들도 매우 주의 깊게 봐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요,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규례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을 지키는 모든 것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 본질도 아니고 그것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것에는 목적이 있으니 그 목적을 아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신앙이 그런 것이다. 십일조를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의 예표로 드리는 것이 십일조이고,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자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든 말과 소망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절기도 절기를 지킴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것이 절기라는 의미니, 그것이 그림자가 실존이 아니라 몸이 실존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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