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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하셨다. 그 이러함이라는 것은 요셉이 육신의 안목으로 볼 때 분명히 부정한 마리아를 버리지 않고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시작인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 안에 성령이 임하시면 유대인들의 눈에 부정하게 비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안에 생겨난다는 것은 세리와 창녀를 가까이 하심과 같이, 내 안에서 사람들이 부정하다 여기는 각양의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요셉이 동침하거나 떠벌리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말에 순종했듯, 하나님의 역사에 나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순종함으로 받는 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나심과 같이 사람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육신으로 사는 자기 자신 안에서 생겨나는 마음들, 이전에는 부정하게 여기고 이기고 극복하려 하고 부인하면 할수록 경건해지는 것이라 여겼던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인정하면 그것이 어떻게 거룩한 삶이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솔직해진다면 아무리 신앙으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난데 없이 무례한 운전을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고, 또 예쁜 여자를 보는 마음도 신앙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신부나 수녀가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이겨가지 않는가? 할지 모르지만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안에 그런 것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굳이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아도 자기 안에 금해야 할 욕망이 없다면 금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인생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근본은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말 정말 중요한 포인트인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악하고 부정한 것으로 여겨 그것에 대하여 금욕하듯 작용하게 된 근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다. 즉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먹음으로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맘대로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 과일의 성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 한 마음이 그것인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먹고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고 나니 자신의 모습이 부정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먹기 전까지 하나님도 자신도 전혀 부정하게 여기지 않은 자기 모습을 갑자기 부정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 안에서 성욕과 같이 금욕시하는 것이 나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다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는 그것 때문에 어린양이 죽어 하나님이 악하게 여긴 것이 아닌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부정하게 여긴 부끄러움을 감추는 옷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 예수님의 나심은 요셉이 부정한 마리아를 용납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즉 한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싹트고 자라는 시작은 사람이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 안에 있는 각양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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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신앙 생활은 사람의 부정한 것을 버리고 이겨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신앙은 성공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설사 지난 100년간 자기 안에서 화를 내는 것이 부정하다 생각하여 화를 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음 나선 초보 운전 길에 급하게 끼어든 차에게 화를 내면 그는 화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재로 많은 종교 안에서는(교회 역시 예외가 아닌) 이렇듯 사람 안에서 나오는 화 내는 것이라던가 사람을 미워한다든가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것을 다스리고 이겨내는 것이 신앙심이라고 가르치고 또 많은 교인들이 이것을 이겨내려는 신앙 생활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종교가 존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서는 그런 것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화를 낼 수 있고,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미움이 남아 있고, 늙었다고 성욕이 없어지는 것 아니며, 화나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그와 반대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마저 부정하게 여기는 이 육신을 입고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이 부정한 육신을 용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들이 가진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육신을 가지고서 이 육신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그것이 고백이 될 때 구원이 있다는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구원을 소개하시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는 아담이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고 할 때 같이 먹는 장면에서부터 예언된 것이고, 요셉이 자기로선 부정한 여인으로 비칠 수 있는 마리아를 용납해 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다고 하시며 요셉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사실 육신을 가진 예수님은 부정했다. 당시의 종교인들이 볼 때 너무 부정한 사람이었다. 안식일도 범하고, 성전의 기물을 부수며, 부정하기 이를 데 없는 세리와 창녀들과 같이 먹고 놀고 있으니 의가 다르면 밥도 같이 먹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부정한 존재 그 자체였다.


만약 우리시대의 종교들이 가르치듯이 사람 안에서 나오는 각양의 부정함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 이겨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창녀를 멀리하고, 안식일에는 숨도 쉬지 않듯 사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전혀 반대였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와 모든 종교들의 방향이 예수님의 방향과 반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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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그 아내 마리아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에 대하여 조용히 끊고자 했다고 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천사가 현몽하여 자초지정을 알려 주기 전에는 당연히 마리아는 부정한 여인이고 자신을 배신한 약혼녀와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리아의 죄를 묻지 않고 조용히 끊으려 했다. 아담은 그의 아내였던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그것을 권하자 거부하지 않고 먹었다. 이것이 이 두 사람의 다른 듯한 공통점이다.


요셉이 마리아를 조용히 끊고자 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주목 받을만한 구절은 아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여기에는 매우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겨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이 잉태되고 그리스도의 삶으로 거듭나는 과정 안에는 요셉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시작 과정에서 아담 역시 요셉과 비슷한 과정을 보여 주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 안에는 이러한 과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한마디로 내용이 형식을 수용하는 과정이다. 물론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오해한 것이고, 아담은 범죄의 공범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 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감당했다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다 내용과 형식이 있다. 특별히 남자와 여자는 육신으로 남성 우월주의를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것이 도입이 되었는데, 남자는 내용이고 여자는 형식에 늘 대비 된다.


이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에서도 남자는 그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역할만 하고 실재로 아이는 여자의 뱃속에서 자라지만 정작 그 성씨는 남자의 성씨를 따르는 역사적인 사회 풍습도 그런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에는 그것이 아주 심해서 여자는 제사에도 참여 못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유산도 받지 못하는 문화권 속에서 성경이 기록되었다.


남자는 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고, 여자는 형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에 도입된다. 그런 맥락에서 여자는  부정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되는 것이다. 그런 여자를 더욱이 악행에 대하여 아담과 요셉은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들을 실은 것과 같은 뜻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늘 부정하게 여기는 육신을 수용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과 반대로 사람의 육신이 부정한 것이라고 부인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몸에 거하면서는 유대인의 율법과 종교적인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인이 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즉, 요셉이 자기 입장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리아를 용서하듯 자신을 물리며 조용히 물러섰고, 아담 역시 하와가 따 먹고 물귀신처럼 같이 먹자는 유혹을 뿌리치지 않고 먹은 것은, 예수님께서 늘 마음에서 부정한 생각이나 하고 화내고 모순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거듭난다는 것 역시 연약한 육신, 부정한 육신, 형식과 같은 이 육신을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셉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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