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02

(골로새서) 1:3-5 성도의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21. 11:04 Writer : 김홍덕

기독교를 학교에서 배울 때 <사랑의 종교>라고 정의한 것을 배운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큰 교회들은 나도 너도 할 것 없이 사랑을 외친다. 밥을 퍼주기도 하고, 노숙자들을 위한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고, 가난한 나라에 후원하는 등 사회적 관점에서 사랑과 봉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분명히 이런 점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장려되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이런 활동들이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사랑의 본질은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에 있다. 즉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고, 또한 그 존재의 이유가 서로의 관계에 의미가 외는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되는 것 이상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개인과 조직 아니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 본연의 존재 목적이 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다른 것을 아무리 잘 해도 소용도 없을 뿐 아니라 죽은 것이거나 아니면 버려질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목적 안에서가 아니라면 뭔가 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고 죄가 되는 것이다.


남녀사이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관계가 아닌데 애착을 가지고 계속 선물하고 만나자고 하는 것은 스토킹이고 죄며 괴롭히는 것일 뿐 아무리 마음이 간절해도 사랑이라 할 수 없고,. 해적이나 간첩이 자기들끼리 아무리 사랑하고 우정이 두터워도 가장 먼저 국민으로서 나라의 의에 동의하는 것이 선결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우정도 한낱 반역죄에 불과한 것이 그것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이다. 이 교회는 가장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명확하여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뭘 해도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외면하고 있다면 그 어떤 사회적인 기여도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에 관하여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즉, 요한 사도는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이 의미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그 의미 있는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살아가는 의미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에 바울 사도가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를 할 때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것과 또한 평강과 은혜로 문안하는 것이나 다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맥락이 바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가 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도며, 그런 삶의 모양은 그런 사람들에게 육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헌신하는 사랑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바로 그 사랑을 성도의 사랑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무엇에 감사할 것인가?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를 이어가면서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다. <감사>라는 것은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하고, 또한 그 관계가 자기에게 유익이 될 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에 감사하는 것은 감사가 아니다. 


어떤 경우 아직 감사할 일이 없는데 먼저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가르친다. 그건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더 좋지 않은 것은 그 감사의 내용이라는 것이 다 소유(Have)와 행위(Do)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은 몸이 아프지만 낫게 해 주실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면 나을 것이라며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플 때는 감사하기 어렵다. 그냥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은, 골로새 교회가 자신에게 돈을 보내 주어서도 아니고, 골로새 교회가 부유하게 되어 교회를 새로 지어서도 아니고, 교회 안에 신비한 기적들이 일어나서도 아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감사하는 대상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노라”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소유와 공로의 신이 아니라 존재의 신이시기에 바울의 육신의 문제와 관련하여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감사는 존재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감사할 것이 라는 것인데 이는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관계가 감사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간첩이 나에게 아무리 많은 유익을 준다 해도 간첩과 나는 의가 다르기 때문에 관계가 없는 상대이고, 그에게 받은 금품이나 도움은 나중에는 오히려 큰 죄가 되는 것처럼, 감사는 우선 내가 감사할 대상이 나와 상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바울 그리고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 서로 상관이 있는 관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동이나 수고나 돈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들이 죄인의 자리에서 아들이 되도록 하는 신분의 변화, 곧 정체성을 바꾸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하셨다. 또한 예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에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은 다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뿐이다. 이름이 바로 정체성이듯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소유와 역사하심을 주셨으니 감사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성경에 나오는 모든 “~ 하라”는 본능에 따라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모양과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개가 짖듯이 말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므로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심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감사한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신을 가지시고, 우리가 늘 세상에서 실패하여 죄인 되듯이 예수님도 이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바로 그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육신, 또 예수님이 죄인 되심과 같이 늘 세상에서 실패하는 인생인데 그런 인생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감사의 제목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행함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며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이다. 육신으로도 아버지의 가문과 소망과 유전적 정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성이 아버지와 동일한 육체로 나타난 것이 아들이듯, 예수님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진 모든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신바 되었기에 아들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감사할 내용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이 법을 믿기(Pistis) 때문에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에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앞에 포스트 했듯이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보고 사람이 수용하는 절대적인 수동이요 순종으로 받는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

(골로새서) 1:2 은혜와 평강(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17. 23:28 Writer : 김홍덕

2. 평강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문안하면서 사용하는 평강은 에이레네(Eiren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평화(peace)로 치환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합의”라는 의미에 가까운데, 즉 ‘서로 합의한 상태’ 혹은 ‘서로 동일한 상태’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흔히 사람들은 평강 혹은 평안하다는 것을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삶’을 이야기 하는 듯해도 실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근심이나 고민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단 한 가지, 죽음에 대한 고민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과 무엇이 하나 된 상태가 평강의 상태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긴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2)

이라고 기도하셨다. 즉, 인생에게 있어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그 관계 안에 인생들도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람이 이르러야 할 합의된 평강의 자리인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 평강하지 않는 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하나 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성품을 좇아 사는 것(창 1:26)인데 그렇지 못한 삶이 바로 평강이 없는 삶인 것이다. 


이는 사람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수행하고 있지 않으면 평강이 없는 상태인 것은 동일한 상황인 것이다. 자동차가 이동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은 사고가 나려는 상황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자동차는 평강도 안식도 없고 오히려 사망 가운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태어난 이유, 존재하게 된 이유,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이유와 목적을 모른다면 이는 평안하지 못한 것이다. 고로 안식을 누릴 수도 없다. 또한 더불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에 관해서는 안식하실 수 없다. 이는 아직 창조조차 완성되지 않은 상황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사람은 행위와 소유에 관심을 두고 살며, 선하고 악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함에도 사람은 눈앞에 펼쳐지는 아주 작은 일에도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를 평가하며 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신적인 역량이 나타나는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노력이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 창조의 목적이 달성되어 영광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은혜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은혜이다.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 목적을 발견하게 하는 것 이상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사람의 삶이 하나가 된 삶이 바로 에이레네, 곧 하나님과 하나 된 평강의 상태인 것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나이다 (요 17:23)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이 신이 된다거나, 육신을 부인하고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그 생명이 같고, 품성이 같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목적 아래에서 보면 하나님의 목적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함이고, 의(義)안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면 저도 선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면 또한 악하게 여기는 의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인생이 평안해진다는 것이며, 바울 사도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에게 문안하는 문안 역시 이러한 문안인 것이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다 보니, 육신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곤고함도 많고 불편함도 많아 그에 따른 희망사항도 많아서 그런 바람 위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다 보니, 어쩌면 자연스레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고, 또 그것이 평안이라 여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사람의 문제나 곤고함이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곤고함이자 문제는 '왜 사는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바로 그 문제가 해결된 상태, 즉 사람이 왜 사는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되어 그것이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된 상태 그것이 진정한 평안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고, 무엇보다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가장 큰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기에, 그렇게 사도된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문안했다는 것은 골로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들의 삶과 하나가 되는 평강의 상태가 되는 은혜를 기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