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0

마태가 이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시작되는 시작이라고 한 것은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도 아브라함(아브람)과 같이 다 위대함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가서 만났듯, 마태가 기록한 이 성경을 볼 때 본토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마태복음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세계로 떠나 갈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그 사람에게 열린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늘 위대함을 추구한다. 직장에 가면 더 높은 자리,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하고, 운동을 해도 그렇고, 어떤 것을 하든지 더 잘하려고 한다. 그러면 못해야 하나님의 세계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잘하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거나 그것이 사람의 의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의롭다 여긴다는 것은 위대해지지 않으면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아브람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버릴 때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생명의 아비라는 뜻이다. 즉 위대함의 세계에서 떠나 생명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즉, 생명이 모든 의의 기준이 되는 세계로 떠나는 그 출발이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마치 대학에 입학함으로 대학이라는 세계가 열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떠나라”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기도 했다. 아브람이 그것을 믿고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아브람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땅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은 낮은 땅이라는 의미의 가나안이었다. 



<고향을 떠나는 아브람>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 지명으로서 가나안이라는 것이 모든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흙과 땅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농부로 나오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씨를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 안에 심으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은 지명으로는 가나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본토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는 말씀의 본질은 “위대함을 의로 삼는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지정한, 하나님께서 정체성을 부여한  자리,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신 자리로 떠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 자리는 아브람으로는 갈 수 없고, 아브라함이 되어야 가는 자리이며, 할례를 받은 후에 아들을 낳는 사람이 가는 자리요, 그런 사람의 본성을 가진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신 말씀은 사람이 위대함을 좇는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한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위대해질수록 의롭다고 여기는 것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위대함을 좇던 자리를 떠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이는 몸이 어떤 나라에 있다고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자기의 의로 여길 때 비로소 국민이 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실재로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의로 여기고, 그 나라가 추구하는 의와 이익과 선에 동의하는 것이 입증될 때 국민이 되는 것이다. 그것에는 피부색이나 나이나 성별과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할례라는 육체적인 증거가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의 시작이 자신에게 있는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 다니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교회는 형식이다. 실제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 안에 동일하게 인정되는 어떤 의가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의로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것을 위하여 살며, 그것에 맞으면 선이 되고, 그것에 반하면 악이 되는 모든 것의 기준이 바로 <의(義)>인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어떤 시작으로 비롯된 세계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실 때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이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위대함의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너는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의 자리를 떠난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세계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그 시작이 바로 아브라함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하려 한다면 아브라함의 이 시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일> 그것이 있어야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이 세계는 어느 곳을 떠나서 어떤 곳으로 가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위대함의 아버지인 아브람에게 찾아 오셔서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하셨다. 이름이 위대함의 아버지인 아브람에게 본토 아비집이라는 곳은 아브람에게 “위대함의 아비”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가치관을 가진 조상들이다. 즉, 위대함을 좇는 세계가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을 때 아브람이 거하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라 하심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 중의 시작인 것이다.


위대함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본래 자신의 역량 이상으로 강해지고 위대해지는 것을 의로움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 아브람이 나오는 창세기 12장의 앞장인 11장에는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나온다. 바벨탑 사건은 한마디로 사람들이 스스로 하늘에 오르려고 한 사건이다. 어떻게 하늘에 오르려 했는가 하면,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그것을 쌓아서 하늘에 오르려 했다.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든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는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흙을 연단시켜서 단단하게 만든 벽돌은 바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고 했다는 것은 그 위대함을 모으고 쌓으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위대함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바로 위대함의 세계고 아브람의 본토와 아비 집은 그것을 의롭게 여기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세계를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브람일때 찾아오셔서 위대함의 세계를 떠나라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세계를 떠났던 덧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하는 일원이 되려 한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위대함>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최근 성경인 개역 개정판에는 세계가 아니라 계보라고 나오는데 이는 좀 못 마땅한 번역인듯 하다. 물론 영어로 genealogy라는 단어가 계보는 맞다. 근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지만 개역 한글에서 <세계>라고 번역한 것은 대단히 주목 받는 번역이라 여겨진다.


마태복음이 되었던 다른 성경이 되었던 그 첫절의 경우 대체로 저자가 기록하고자 하는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이렇게 시작하고, 요한복음의 경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등 그 시작은 어떤 면에서 보면 주제라고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제자가 기록하였다. 마태는 세리였고, 세리는 그 당시 매국노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마태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기록한 성경이 바로 마태복음이다. 그 마태가 기록하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은 행적 그 자체나 족보가 아니다. 특히 이 마태복음의 경우 주 독자층, 그러니까 마태가 염두에 둔 독자층은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전반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복선처럼 깔려 있다. 나라, 즉 세계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교회>라는 단어도 2회나 나온다. 즉 마태는 교회시대에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목적이 하나님의 세계요 나라인 <교회>에 대하여 기록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단순한 하나의 명제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까지 어떤 시작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그 시작으로 기록했고, 그래서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1월 1일이 시작이다. 하지만 어떤 기준에서 보면 다른 경우가 많다. 회계년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는 1월1일부터지만 미국의 경우는 10월 1일에 회계년도가 시작되고, 일본, 영국, 인도 등은 4월 1일에 회계년도가 시작된다. 이처럼 시작이라는 것이 꼭 객관적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그 시작이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재수를 한 사람과 아닌 사람은 대학생활의 시작이 다르다. 누가 되었던, 대학에 입학해서 다니기 시작할 그때 비로서 그 세계에 대하여 시작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시작은 어떤 세계가 시작이 되는 것을 시작이라고 한다. 대학에 입학하면 대학생활의 시작이 된다. 즉 대학이라는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고 기록했다. 이는 모든 유대인들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외형 즉 형식에 관하여 그러하다. 즉 육신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롬 2:28) 

라고 말했다.


유대인이라는 증거는 기본적으로 할례를 받은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태나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은 이 유대인이 아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내면적인 유대인, 즉 형식이 아닌 내용과 본질이 유대인인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마태가 말하는 “아브라함”은 육신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어떤 세계가 있는데 그 시작이 있는 사람들의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