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8

(마태복음) 1:1-17 나신 예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3. 5. 29. 18:55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1장 16절에는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되어 있고, 1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은 나시는 분(Born)이라는 이야기이다. 아마 이것을 그렇게 주목하는 교회는 많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예수께서 나셨다는 것은 만들어지거나 수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부처는 왕자로 나서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고, 단군은 곰이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되어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부처도 단군도 다 수행의 결과, 즉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만들어진 세계다.


물론 그 수행은 대단한 것이지만, 태어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존재다. 태어나는 것은 그 부모의 유전자를 가졌지만 다른 개체이고, 무엇보다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나 만들어짐 없이 날 때부터 온전한 개체 그 자체인 반면, 수련을 하거나 노력하는 것은 그 전에는 아니었던 것이 그것이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날 때부터, 눈도 못 뜨는 그런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라고 해도 온전하다. 사람이 태어나면 그 아기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사람이고, 강아지가 태어나도 나는 순간부터 개인 것이다. 그리고 난다는 것은 태어난 개체가 자신의 태어남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또한 다른 점이다.


하지만 부처는 부처 이전에는 왕자였고, 웅녀도 여자가 되기 전에는 곰이었다. 이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나신 분이시다. 이것은 시작 자체가 온전한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로 나는 것에 태어나는 존재가 관여하지 않은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그렇듯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세계이다. 이것은 생명의 세계이고, 날 때 곧 시작부터 온전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어떤 노력으로 그리스도가 된다고 하는 모든 것은 나는 세계가 아닌 가공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불교나 여타 종교와의 차별성에 관한 말씀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현재의 기독교 안에서도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만들거나 수고하여 이르는 세계가 아니라 태어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 전반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가장 쉬운 예로 성령의 9가지 열매라는 것이 있다. 많은 교회에서 이것에 대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이런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라는 맥락의 설교와 가르침이 주류를 이룬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 신앙관이 베여 나온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열매도 나는 것이다. 즉 그 안에 성령이라는 생명이 있기만 하면 나는 것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같은 열매이지 그것은 교회에 다니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기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 절로 맺히는 열매인 것이다. 사과 씨가 자라서 사과가 열리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바로 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되는 사람 역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날 때, 시작할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 세계의 태초가 시작될 그 때 이미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는 the Christ가 아니라 a christ를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만들어지거나 수련으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신념으로 되는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중요한 관점이다. 예수님도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나셨다고 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마치 농부가 땅에 씨를 심든 성령이 들어오시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태어남의 사건이 있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나심과 같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되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나심과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존재가 새롭게 되는데 변하거나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듯 거듭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시작인 것이다.


흔히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신앙의 최종목표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시작이다. 예수님께서 나심으로 하나님의 세계라는 창세기가 시작되는 태초를 맞이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거듭 난다고, 하셨다.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수고하고 노력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앙은 사람이 태어날 때 자신이 태어나는 과정에 관여하지 않고 순종하여 태어나듯, 신앙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신앙이지, 자신의 노력이나 신앙적인 공로로 완성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정체성이다. 각종 액션 영화에 나오는 모든 영웅들이 각양 세계에서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도달하고 싶은 정체성을 그려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는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꿈 같은 사람의 모습이 있다. 그 정체가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출처 : moneyamoneya.tistory.com>


<출처 : iyoousmom.tistory.com>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영웅들이 있다.

자기가 되고 싶은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이 꿈꾸는 정체성의 대명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다르다.

우리가 위에 있는 영웅이 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 그것이 바로 <빛>이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고대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메시야(히브리어)가 바로 그리스도(헬라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이 그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고, 빛이 없는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 안에 그토록 사모하고 이르고 싶은 어떤 정체성을 사모한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행동이 잘못되어서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인 것이다. 왕이라고 하면서 세금을 안내고 다니고 성전 기물을 파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전혀 하나님의 아들다운을 보이지 못하고 왕을 구해줄 병사하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것은 분명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이나 메시야의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든 영웅들은 하나같이 행동에 대하여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닌가?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의 상도 그러했다. 그런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율법을 어기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아들이라 하셨고,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도 또 많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리스도라고 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행동으로 육신을 한계를 이겨내면서 하루하루 위대해지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분명한 한계 안에서 있어서, 배고프면 안식일이고 뭐고 간에 먹을 것은 먹어야 하는 존재이고, 십자가에 끌어다 못 박으면 그냥 힘 없이 박힐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으로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모든 인생들이 실패하여 위대함을 달성하여야 상을 받는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는 그런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연약한 육신 가운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빛이 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행동을 짓는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빛인 것이다. 연약한 육신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위대함에 대하여 늘 패배하여 죄인이 되는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연약함 안에 있어서 위대해지지 못해서 신음하는 인생들이 그 예수님을 볼 때 자신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을 알고 고백할 그 때 빛이 있으라 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빛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라는 것, 그 안에서 시작이라는 것은 그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계획하신 하나님의 세계가 그 사람 안에 열리는 태초가 있는 것이고, 인생 안에서 혼돈이 걷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만나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 바로 이 창세기 1장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위대함에 도전하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나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 고백이 될 때, 우리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선언이다. 정의를 내린 것이다. ‘빛이 될 것이다’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상이 열리게 하는 태초를 선물하고 그 인생에게 <빛이 있으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 첫째 날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천지창조의 시작은 <빛>이다. 빛이 무엇인가? 시간인가? 모든 입자의 근본인가? 사실 물리적으로 빛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빛 또한 그런 물리적인 빛이 아니다. 이 빛은 어떻게 보면 인식이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캄캄한 방에 들어가면 어떤 것도 다스릴 수 없다. 그 안에서는 어떤 세계도 열리지 않는다. 공부의 세계도 놀이의 세계도 열릴 수 없다.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런 방에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인식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을 따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사용은 주인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캄캄한 방안에 선풍기가 있다고 치자. 어두울 때는 선풍기에 부딪히게 되고, 방의 주인은 그 선풍기를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빛이 비취게 되면 주인은 선풍기와 마찰도 없고, 그 선풍기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여 바람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그때 선풍기는 주인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선풍기의 존재목적, 주인이 그것을 만들거나 구매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무엇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흑암 중에 살다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하는 것을 만날 때에 빛을 만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창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있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쁜 듯 하나 공허하고 그 분주함은 그저 혼돈이며, 때로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역시 혼란스럽기만 한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기 전, 곧 천지가 창조되기 전이고, 빛이 없는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 없는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은 바로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는 것과 같이 인생을 밝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천지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한 사람에게서 열리는 것이다. 바로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이다



<출처 : kjv1611.egloos.com>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빛이 되시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광원(光源)은 아니시다. 이는 물리적인 빛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가 정말 힘들 때 “희망의 빛"을 이야기 하는데 그 빛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밝히는 것, 그것을 빛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분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빛이 되고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일면 맞는 말이지만 다분히 교리화 되어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교리는 함축된 결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은 오늘 나와 상관이 있을 때까지는 그냥 함축된 문장으로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은 진리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빛이 되시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차비나 밥값 대신 내어주듯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까지도 맞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지신 죄가 어떤 죄인가 하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인 것이다.


단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행동으로 범하는 죄에 대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신 분이 아니다. 행동이 죄가 되는 것은 시대적인 문화와 정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도 전쟁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고, 나라마다 간음에 대한 법도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행동으로 지은 죄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예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 지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도 행동으로 지은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끌려가신 분이시니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으신 것이라면 그 유효성이 빵점인 것이다.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는 행동이 너무 부실하고 그들을 화나게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내 행동으로 인한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았다고 달라질게 없다. 나와 똑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와 똑 같은 그 모습이 바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행동으로는 종교적인 규례와 로마가 원하는 법을 다 지킬 수 없으신 육신을 가지셨다는 것 그것이 나를 해방하는 것이다. 이는 육신으로 늘 범죄하고 부도덕한 육신을 가진 존재였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듯 나 또한 이 부정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인생의 빛이 되시는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