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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천지창조의 목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5. 24. 03:03 Writer : 김홍덕

천지창조의 첫째 날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중략)(창 1:2~3)


천지를 창조하기 전의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라고 하셨다. 그것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하셨는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왜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사람과 지속적으로 갈등하시고 속상해 하시며, 한때는 지으신 것을 후회하셔서 홍수로 다 쓸어버리시기도 하실 것이면서 왜 만드셨을까? 하는 것이다.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가?”하는 이 질문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천지창조가 되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를 표현할 때, <땅이 혼돈하고>라고 되어 있다. 땅은 셋째 날에야 지으셨는데 왜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 전에 땅이 혼돈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이 천지 창조가 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땅만을 만드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천지 창조의 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사람을 무엇으로 만드셨는가? 바로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는 땅이 사람이 되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gotothessc.tistory.com>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시는 과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본론이고 그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물리적인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세상의 모든 형태는 한 사람, 즉 아담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들이라는 것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 안에 혼돈함과 공허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빛이 없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세계가 아직 창조되지 않은 사람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쁘게 살지만 어느 날 문득 ‘무엇을 하고 사나?’ 자문 할 때 느끼는 허탈함이 있다. 바쁘게 살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왜 그렇게 살았는지는 희미해지는 것이 인생으로 느껴지고, 그것은 공허함을 준다.


그렇듯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하신 것은 인생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삶이 공허하고 목적을 상실하여 열심히 살지만 삶을 쉬게 될 즈음에는 무엇을 했나 느끼게 하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 바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땅이 사람이 되는 것, 즉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그런 존재가 되는 과정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물리적으로 이 땅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창세기가 쓰여졌다고 한다면 이는 경전이 아니라 그냥 물리학이나 천문학 책이 될 뿐이다. 물론 이 세상은 어떻게든 창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서 인지하지 못하면 나에게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듯, 나이가 어떻든, 몇 세기에 살고 있든 어떤 세계에 대하여는 태초가 열리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가 말하는 아니 성경이 말하는 세계는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이가 어떻든 몇 세기가 되었든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의 삶에는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지 않은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창세기의 시작에 나오는 첫째 날 그 이전의 상태인 혼돈의 상태는 인생으로서 목적을 모르고 열심히 그리고 분주히 살고 있는 모든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생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숨쉬는 존재인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이 되는 과정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한마디로 천지창조는 혼돈 가운데 있는 땅이 사람으로 창조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 하나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는 사람이 그것을 인지하게 되는 과정이다. 즉 한 사람이 자기 안에서 혼돈이 걷히고 하나님이 주신 목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천지창조라고 인지할 때,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될 때, 태초가 시작되는 것이고, 그 과정이 바로 천지 창조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 세계의 하늘과 땅과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열리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만물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천지창조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하는 것, 그리고 그 의미라는 것이, 이 온 우주만물이 한 사람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것이 목적으로 다가오게 할 때, 비로서 그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이 열리고 창조되고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천지를 만드셨는가? 그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혼돈과 공허에 쌓인 땅과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숨쉬는 인간, 땅의 흙으로 온 한 사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목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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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5. 22. 10:36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굳이 신앙이 없더라도 삶을 살아감에 있어 스스로를 낮추라고 하고, 또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그리고 신앙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고, 또한 겸손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라 생각이 된다. 그게 쉬울 것 같으면 달리 자주 들을 일도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과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아질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이라면 그저 순종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그건 아니다. 그것을 그럴수 있다고 여긴다면, 아니면 나는 그럴수 있다고 한다거나, 그러는 것을 봤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신념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게 순순히 자신을 낮출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살면서 세상적인 성공을 꿈꾸거나 어떤 바람이 있지 않았다. 다만 예수 믿는 것 그것 하나에만은 열심이었는데, 이유도 몰랐다. 어쩌면 세상에서는 경쟁력이 없으니 교회에서라도 잘난 인간이 되어보자 싶어서 그랬을수도 있겠다 싶다. 여튼 이유가 어떤 것이든 그것 역시 잘 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고, 또 예수 믿는 세월이 늘어나면서 신앙에 대한 몰입도는 점점 높아져갔다. 그러면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예수 믿는데, 이 귀한 예수 믿는데, 돈이 없으면 어떻고, 사는게 힘들면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만용이다. 인생이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형편이 어려우면 모든 것이 다 어려워진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예수 믿는 세계에서도 자신감이란 부질 없는 만용이다 싶다. 살면서 이런 저런 일 겪다 보니,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기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싶고, 돈 없으면 무슨 상관이냐? 외치던 것도 다 의지의 산물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의지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마디고 예수 믿는 것도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사람이 스스로 그 마음을 낮추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고 하지만 실상은 빼앗기는 것이다.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꺽이는 것이다. 다만 그런 하나님의 경륜 앞에 내가 순종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 그것 뿐이다. 그리고 그 순종마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쩔수 없어서, 인간이라는 육신의 한계에 갇혀 있는 그 어쩔수 없음으로 인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삶이라는 것의 시작이 그러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모양을 선택하거나 계획하여 삶으로 들어온 이가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삶이라는 것 그 전부가 어쩔수 없이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 선택의 여지 없이 강제된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아무리 스스로 어떤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낮춘다 해도 다 돗단배 안에서 돗에 부채질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시작과 끝에 이르는 전부다 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고 경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평안히 살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주어진 삶에 순종하는 것이 순종이고, 삶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평안이 있다. 존엄성? 그런 소리 필요업다. 진정한 존엄성은 존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지,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존엄성이 아니다.


삶의 가치는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어떻게 화려하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화려함이 영적인 성공이라 해도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삶의 가치는 무엇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정체성, 그 시작과 끝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강제로 된 것 같아도, 그것에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듯 선택의 여지도 없고, 하나님께서 빼앗고 낮추시는 것 그 자체, 그런 경륜의 과정 그 자체에 가치와 존엄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삶을 바로 아는 것이다. 알고 보면 내가 빼앗기는 것은 내가 삶의 주인되러 해 보려는 것 의지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사울 왕이 어디 바알에게 제사 드려 하나님께 버림 받았는가?


인생의 가치는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의지와 선택과 무관하게 삶을 주셨다는 것, 그것도 한계로 가득한 육신의 삶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 조차도 내 의지로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삶이 그러하다는 것, 아니 삶이 가치로운 것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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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부활 (5)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20. 13:55 Writer : 김홍덕

이것은 그 사람의 말과 설교를 들을 때가 아니라, 십자가 밑의 백부장과 같이 그 사람을 볼 때 보는 사람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큰 교회들의 목사들이 하는 설교를 듣고서 하나님이 누군지 지식적으로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보면서 저것이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는 잘 없다. 더욱이 그 목사를 보니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이는 더더욱 만나기 힘들다. 왜냐하면 보통사람은 신학도 하지 않았고, 목사도 아니며, 그렇게 종교적으로 고상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목사는 세례 요한과 같이 전하는 사람일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큰 교회의 큰 맹점이기도 한 것이다. 듣고 깨달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보고서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은 행위로 지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행위에 관한 죄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그 기준도 그저 세상에서 온 것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사하라고 하신 죄는 정체성의 죄인 것이다. 즉 존재가 자리를 벗어난 것에서 구원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또 부활하심으로 보여주신 우리의 정체성이 그것이고, 사하여 주신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 가치관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은, 나를 볼 때 보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죄를 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활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이다. 


계란이나 까 먹으면서 형식적으로 부활절이나 지키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되는데 너는 되지 않는 것을 주장하면 뜻이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그 정체성을 깨달아 그것으로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큰 교회의 목사와 같이 신학에다 각종 종교적 이력으로 가득한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목사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신분이 아닌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약 올리는 것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의미 없는 존재는 부활 생명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천한 신분으로 오셔서 발가벗겨진 죄인으로 죽으신 것이다. 그건 누구나 될 수 있는 자리이고, 의에 관해서는 누구나 다 그렇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로마 황제로 보낼 수 없어서 말구유에 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 황제로 오면 세상에서는 늘 한 사람만 구원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부활이란 것은 놀라운 것이다. 죽임이라는 절대적 운명을 짊어진 사람에게 있어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산다는 것은 벅찬 일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다시 산다고 했을 때, 다시 사는 삶은 분명히 그 이전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 그래야 다시 사는 것이다. 


다시 살아났는데 이전과 같은 모양으로 산다면 그것은 삶에 마디가 하나 생긴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죽기 전에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부유할수록 의롭고, 신분이 높을수록 권위가 있고, 고상할수록 대접받는다고 여기며 살고, 그것을 추구하다가, 


그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새 삶이 주어졌을 때는 이전에 가졌던 가치관은 버리고 사람이 가진 연약함을 인정하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을 악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또 다른 사람도 나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이 그 연약함으로 인하여 표현하는 각양의 까칠한 모습을 사랑하고 용납하는 삶을 살게 되는 부활한 삶이 되는 것이고, 또 그렇듯 자신이 위대해지려고도, 고상해지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용납해가는 모습을 보는 사람이 또한 그와 같이 되고 싶고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이유고 교훈이며, 모든 기적과 모든 치유를 우리 앞에 보이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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