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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이야기 하기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6. 29. 01:26 Writer : 김홍덕

얼마간 블로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이때껏 개인사업이랍시고 판 벌려 놓고 놀다시피 하다가 회사에 들어가게 되어 이전과는 주어진 시간이 좀 달라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글을 써내려가고 싶고, 그렇게 할 생각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정상일까?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 사는 이야기일까? 엄친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대화하는 두사람 중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아는 사람이 성공한 이야기, 복권 당첨류에 해당하는 이야기, 아니면 아침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람 사는 이야기일까?


언젠가 공부하는 교회 청년 격려 차원에서 점심을 대접하러 간 식당에서 보니, 우리 옆에 식탁에 4명의 남자가 앉았는데, 앉자마자 바로 각자의 스마트폰에 열중하느라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먹던 반찬이 모자라니 식당 아줌마 부른다고 한사람이 폰이 아닌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외에는 식사를 마칠때까지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는 폰으로 딴데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렇듯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실례인 세상이다. 심지어 그것은 법제화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온 세상이 그런 것은 다행이 아니다. 내가 속한 교회의 성도들은 왠만한 집의 디지탈키 번호를 다 알고 있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것도 예삿일에 속한다. 어떻게 보면 무례한 일이고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는 짓 처럼 보이지만, 이 안에는 <사생활 보호>가 예의라 여기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평안이 있다.


교회는 그래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려는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리스도는 고상한 분이 아니다. 그 시대로 보면 개판 5분전의 생활을 하신 분이다. 세리와 창년 죄인들과 밥 먹고 놀고, 안식일에 남의 밀이나 까 먹고, 성전에서 상을 엎고, 세금도 안내고, 뭐 하나 고상한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분이셨다. 그리고 그 고상하지 않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지금의 많은 교회들, 직장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안에서는 사적인 이야기가 없다. 서로 고상해진 모습으로 만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전혀 고상하지 않다. 집에서는 발가벗고 쫓아 다니는 것이 더 편한 그냥 그런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억제하고 자신은 절대 똥도 안누는 사람처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예의가 된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 좋은 것이라 여기는 교회가 된 세상이다.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그것은 어쩌면 어디서나 똑같은 인간을 이야기하고, 너와 나 모두가 다 그냥 화장실가서 똥 싸는 그런 고상하지 않는 삶도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사적인 이야기를 편히 나누며, 사람이 사람으로 안식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어디 교회만의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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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한다는 것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3. 6. 21. 17:04 Writer : 김홍덕

난 어렸을때 별다른 꿈이 없었다. 뭐 애기들의 철모를 소리로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든가, 아니면 커서 의사가 되겠다든가 뭐 그런 공허한 꿈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딱 한가지 교회 다니는 일에는 참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지금 이 블로그에 글을 써는 철학과 같이 성경을 교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이야기와 사건이 나에 대한 이야기요 내게 교훈을 주는 사건이고, 어떤 사건이든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이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예수 천당"이라고 외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기에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역사하는 것이지 밖에서 안으로 강제한다거나 생활의 패턴 속에 일주일에 한번 교회 가게 하는 것으로 사람의 삶의 형태를 바꾸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나의 생명을 분화해 내는 것이다. 먼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나를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님을 안식하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요 말씀이 육신이 된 모습으로 살게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전해져서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생명을 또 분배하는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분명히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 또한 사람들에게 사명으로 주었지만 열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한때는 큰 열정을 품고 있엇지만 아직까지도 별다른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떄를 기다리는 일이다. 가만히 잠복해 있듯이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오늘 하루 하루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이 복음을 자기의 생명으로 살아가기 까지는 수 많은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런 과정을 바라보고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과정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듯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창조되는 과정이 어디 쉽겠는가? 그것을 함께 한다는 것은 복음을 받는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 각양의 일에 대하여 섬기는 디아코니아(섬김, 봉사)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나 역시 그런 수고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새벽에 큰 소리로 이웃을 축복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잠언에서는 그렇게 하면 저주로 알 것이라고 했다. 복음은 마치 땅에 심기운 씨가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안에서 밖으로, 씨 안에 있는 것들이 나무가 되기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 많은 수고를 함께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 마음이 그 안에 싹 트고 숙성되기 까지의 세월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려 애쓴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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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역사가 거듭되면서 과학적으로 또 많은 학문 분야에서 큰 발전들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정작 사람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둡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어두움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그 하나만 알아도 그 관계는 분명해질지 모른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광명이다. 이것은 첫째 날의 빛과는 다른 의미이다. 빛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인식이다. ‘무엇이 밝은지? 또 무엇이 어두운지?’ 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 있는 모든 암흑에서 어떤 인식이 시작되는 것이 첫째 날의 빛이라면, 넷째 날의 광명들은 그것을 어떻게 비추어내는 것인가 하는 개념이다. 태양도 빛을 내는 것이지 빛 자체는 아니고, 달과 별은 태양에서 나는 빛을 반사시키는 것일 뿐이듯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에서 자신이 있는 동안은 세상이 낮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왜 빛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물리적인 어떤 광원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빛이 되신 것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생에게 있어 인생의 목적을 인식하게 해 주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이다. 공허와 혼돈 가운데 있는 인생이 인생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라고 하셨다.(요 1:14)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을 가지고 비춰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빛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태양에 비유할 수 있다. 태양은 빛을 비추어 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듯 빛이 태양이 된 것이다. 태양이 비취면 우리가 낮이 된다. 창세기의 넷째 날과 같이.


그리고 밤을 주관하는 달이 태양의 빛을 비추어 내듯, 하나님에 대하여 어두운 세계에서도 철학이나 과학이나 세상 각양의 이론들도 하나님의 세계를 비추어내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이 넷째 날의 어두움을 비추는 빛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 날의 광명들은 어떻게 보면 광명 자체가 주체가 아니라 창조의 결과는 낮과 밤, 혹은 밝음과 어두움이다.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만드신 것은 빛과 어두움인 것이다.(창 1:18)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빛은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어두움을 만들어 놓고 좋다고 하셨다는 것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사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절대적인 문제일 수 있다. 이후에 나오는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덴 동산에 악이 포함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에는 아예 부정한 짐승을 태우라고 하셨다.


또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자기 안에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했고,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에게 부정한 것들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것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반에 이렇게 낮과 밤, 선과 악,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같이 두려는 것이 늘 흐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왜 그럴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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