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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드러난 땅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명하시고 그대로 되었다고 하셨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과정에 있어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는 어떤 의미인가?

 

우선 풀과 채소와 나무에 대하여 성경은, 풀과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풀과 씨 있는 채소의 차이는 <씨>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보면 씨 없는 채소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구분하고 계시다. 이 <씨>라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은 농부라고 표현한 것이다. 농부가 무엇인가? 농부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씨라는 것은 농사의 근간이다. 농사는 땅에 씨를 뿌린다. 그리고 땅에서 열매를 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신 배경도 바로 이런 농사의 법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농부시고 사람이 땅이라면, 하나님이라는 농부가 사람이라는 땅에 뿌리는 씨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땅에게 씨 있는 채소를 내라고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하시겠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 셋째 날에 나오는 땅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바다에서 드러난 땅이다. 바다에서 드러났다는 것은 세상의 물이 모인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땅이다. 즉 세례를 받은 땅이라는 것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이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조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람은 자기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라는 예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정체성을 해갈할 물이 아님을 알게 되어 드러난 땅, 곧 사람(사람이 흙으로 지어졌음)은 풀과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채소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갈을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찾지 않은 사람은 그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은 내내 <씨>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풀과 씨 있는 채소를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한다면, 사람이 내는 말들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씨 있는 채소와 같은 것도 있고, 또한 그냥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표현해 가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 하는 말 중에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이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만한 것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살아가며 표현해 가는 것이 있다. 전자가 바로 씨 있는 채소를 말씀하는 것이고, 후자가 그냥 풀이라는 것이다. 행여나 싶어 짚고 넘어 갈 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바다에서 드러난 땅과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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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바다의 생명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업과 일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즉 잘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보면 하나님이 그러실리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정말로 인정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허락과 관장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어떤 세계는 마귀나 귀신이 관장하는 세계인데 그 세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 신앙 안에서의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 의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한 부분이라도 지금 마귀가 점령하고 있다면, 세상의 어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주관을 벗어나서 귀신이 주관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역을 빼앗긴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다.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바다의 생명에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과 같이 나도 그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 되었을 때 비로서 나에게 하나님의 천지창조 5일째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도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인식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고 살아가는 중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복을 주신 일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 다섯째 날의 교훈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그것이 내가 보기에 좋은 일로 여겨질만한 이유가 내 안에 생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갸기 하면 그것이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보기는 힘든 일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안에 어떤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눈에는 종교라는 기준으로 볼 때, 신앙 없이 성공한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보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마귀와 하나님의 대결 구도로 보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감히 말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회가 세상의 어떤 종교와 다를 것은 전혀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나누고 어떤 것은 가까이 할 것으로, 그 반대편은 멀리할 것으로 나누는 모든 것은 다 이분법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이분법, 이원론적 가치관의 뿌리는 바로 <선악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을 나쁘게 규정하는 습성은 바로 선악과의 습성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는 그 이름 그대로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 심판하고 입대고 비판할 일이 있게 된다.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비판하고 있다면, 그 안에 선악과의 열매가 아직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바닷속 생명을 복 주셔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게 된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는 기준 아래서, 바닷속의 생명,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잘 먹고 잘 살게 되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같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알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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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닷속의 생명체들에게 복을 주심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이 점점 왕성해지는 것을 독려하신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이 모양인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느냐?'라던가, '세상이 이렇게 개판인데도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은 죽었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늘 "말세"라고 하며 한탄하는 이 세상의 형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지창조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바다의 생물이 생육하고 번성하듯 세상에 죄악이 왕성해지게 하는 일이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상을 어떻데 받아 들이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들은 것이 자신의 세계가 되고,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의 첫째 날의 시작 부터 이것은 동일한 관점이다. 빛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빛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어떤 인식이라고 했다. <학문에 밝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하여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시작이다. 즉 빛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빛이 무엇이라 인식하는가? 하는 것이 사람 안에 빛이 창조된 것이듯, 다섯째 날의 창조 역시 흔히들 세상이라고 말하는 바다의 생명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문화화 가치관이 왕성해지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다섯째 날의 창조 과정인 것이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어떤 것은 선하고, 또 반대로 어떤 것은 악하다고 하는 것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이 가치관은 삶과 세상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과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나누고 되는데, 이런 것을 나누는 이유가 좋은 일, 선한 일만 일어나기 바라고 자기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본능 같은 의식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은 취할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은 버릴 것으로 여기는 본능과 같은 의식이 모든 사람들과 세상의 문화 속에 만연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철학과 학문 그리고 종교의 연구 대상이고 발전 동력이다. 즉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 추구하는 바가, 그들의 세계 안에서 선하게 여기는 것만 일어나게 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철저치 배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악한 일, 부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옛날에는 제사을 지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을의 안위를 위하여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관점에서 전 재산을 교회나 종교단체게 헌금해 버린다거나, 때로 금식한다거나 하는 힘든 의사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이 악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하는 신께 그것을 청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나쁜 것들, 즉 바닷속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향락이나, 돈, 그리고 음란함과 같은 것들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에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멀리하고 배척하는 세상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도 이것이 보기에 좋은 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다섯째 날의 창조가 자기 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보시기에 좋은 일이었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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