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2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닷속의 생명체들에게 복을 주심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이 점점 왕성해지는 것을 독려하신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이 모양인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느냐?'라던가, '세상이 이렇게 개판인데도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은 죽었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늘 "말세"라고 하며 한탄하는 이 세상의 형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지창조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바다의 생물이 생육하고 번성하듯 세상에 죄악이 왕성해지게 하는 일이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상을 어떻데 받아 들이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들은 것이 자신의 세계가 되고,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의 첫째 날의 시작 부터 이것은 동일한 관점이다. 빛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빛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어떤 인식이라고 했다. <학문에 밝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하여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시작이다. 즉 빛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빛이 무엇이라 인식하는가? 하는 것이 사람 안에 빛이 창조된 것이듯, 다섯째 날의 창조 역시 흔히들 세상이라고 말하는 바다의 생명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문화화 가치관이 왕성해지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다섯째 날의 창조 과정인 것이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어떤 것은 선하고, 또 반대로 어떤 것은 악하다고 하는 것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이 가치관은 삶과 세상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과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나누고 되는데, 이런 것을 나누는 이유가 좋은 일, 선한 일만 일어나기 바라고 자기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본능 같은 의식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은 취할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은 버릴 것으로 여기는 본능과 같은 의식이 모든 사람들과 세상의 문화 속에 만연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철학과 학문 그리고 종교의 연구 대상이고 발전 동력이다. 즉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 추구하는 바가, 그들의 세계 안에서 선하게 여기는 것만 일어나게 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철저치 배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악한 일, 부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옛날에는 제사을 지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을의 안위를 위하여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관점에서 전 재산을 교회나 종교단체게 헌금해 버린다거나, 때로 금식한다거나 하는 힘든 의사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이 악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하는 신께 그것을 청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나쁜 것들, 즉 바닷속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향락이나, 돈, 그리고 음란함과 같은 것들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에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멀리하고 배척하는 세상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도 이것이 보기에 좋은 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다섯째 날의 창조가 자기 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보시기에 좋은 일이었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자.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교회 경매 사태를 보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3. 7. 24. 15:47 Writer : 김홍덕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다"라는 제목으로 7월 23일 미디어 다음에 기사가 떳다.(기사 원문) 이는 최근에 경기도 성남의 <충성교회>가 경매로 나왔다는 뉴스와 연결된 시사 논평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대 명예교수 손봉호 교수는 이 현상에 대하여 "교회 경매는 타락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이참에 충성교회 뿐 아니라 제법 규모 있는 교회들의 경매 상황에 대하여도 언론에 기사화되었다.

 

 

(왼쪽)종교시설 역대 최고가로 경매에 나온 판교 충성교회. (오른쪽)인천 송도의 한 상가건물에 입주한 교회. 매물로 나와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사실 이런 문제는 어쩌면 교회가 대형화, 초호화 건물을 추구하면서 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블로그의 원래 제목이 <큰 교회는 모르는 성경>이었다. 나 역시도 이러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크고 화려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필요(needs)>라는 것도 어떤 가치관, 어떤 철학 안에서의 <필요>인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교회가 경매 나왔다는 말에 신문은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다"라고 화답하듯 기사를 썻다. 교회와 돈, 이는 어떤 관계일까? 사실 알고 보면 비단 교회뿐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도 이 돈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돈과 관련된 다양한 의견과 갈등들이 있는데, 그 원인은 한마디로 <돈>이라는 것에 대한 정체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돈과 관련해서 각종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원인은 돈의 유무를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큰 교회의 목사들은 부인할 수 있겠지만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 왔고, 또한 지금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영광으로 여긴다고 하나님의 성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또한 교회가 화려하고 대형화 되듯 사람의 삶에서 돈이라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잘 사는 것, 즉 <돈 =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암묵적 공식이 신앙의 기본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점점 더 크고 화려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크고 화려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은 것, 곧 복으로 여기신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적인 성공이 신앙의 척도가 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적 성공의 대명사가 바로 돈이니까?

 

그러므로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다>라고 하는 명제는 교회의 신앙관이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신앙관이 육신의 삶의 형식과 모양에 기준과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이는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행동은 무엇인가?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도를 열심히하고(Do)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Do) 하나님께서 복(돈과 성공)을 주신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가진 신앙관이고, 그 신앙적 오류가 교회의 경매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돈은 그저 하나의 개성이고 특성이다. 즉 어떤 사람은 돈이 많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은, 그저 어떤 사람의 성격은 급하고 어떤 사람의 성격은 느긋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돈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개성이고 특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격이 급한 것이 느긋한 것 보다 좋다고 할 수 없듯이, 돈 또한 늘 그렇다. 그러므로 돈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갈등한다는 것은 그저 사람 사이의 성격적인 갈등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돈의 정체성을 이렇듯 하나의 개성과 같이 보지 않고, 신앙의 결과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는 척도로 여기는 것에 두다 보니 많은 것이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나 노력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세상에서의 축복과 죽어서 천국이라는 상을 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교회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자신들의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인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도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개념을 세상적인 가치관 안에서 찾고 그 가치관으로 인하여 세상의 가치관 처럼 노력한 것의 결과요 성과로 돈이 주어지듯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돈으로 갚으신다는 그릇된 신앙관과 하나님과 돈에 대한 정체성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경매가 되는 일도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5일째에 바다의 생물들에게 축북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는 것이 이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 창조의 과정이라는 이야기인가? 아무리 성경을 개방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공부한다 해도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이 세상의 어떤 문제, 어떤 일도 다 하나님께서 다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생각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마귀가 싸운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마귀가 싸운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과정에서 다섯째 날에 바다의 물고기에 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셨다는 것이 무슨 연관성이 있겠나 싶지만, 이것은 동일 선상의 문제이다.

 

사람들, 특히나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 종파의 경우 하나님과 마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짓고 각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역사해서 복을 주신 것과 마귀가 간섭해서 해를 당하는 것으로 규정을 짓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는 두 가지 큰 오류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인데 하나님께서 관장하지 못하는 세계가 발생한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싸울 만큼 동급의 신과 같은 존재 곧 마귀가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못하고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일부를 관장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헛점이 있는 분이 아니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소부재의 하나님, 천지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틀린 말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마귀가 하나님과 싸운다는 것은 그리고 아직도 그 싸움이 끝나지 않고 세상의 종말이 되어야 그 싸움이 끝나고 최후의 승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귀가 적어도 현재까지는 동급의 존재로서 세상을 양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방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급으로 싸우는 존재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유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들은 아주 근본적인 오류가 있는 신앙의 관점이다.

 

 

 

 

 

실재로 욥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부리시는 것으로 나오고 있고, 사울왕에게도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셨다고 했으며, 예수님 역시 마귀들과 다투시거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씀 만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셨고, 또한 어떤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찬양하기도 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과 싸우는 존재나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마귀나 귀신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이와 같이 잘못되어 있듯이, 세상이 물질 만능주의나 향락으로 관영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역시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관대하시거나, 손을 쓸 수 없어서 그렇게 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노아의 시대에 온 세상을 물로 한번 쓸어버리시고 새롭게 세상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한번 만드신 이 세상을 다신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시간도 역시 천년이 하루 같은 분이시니, 이 세상의 죄악이 보기 싫어지시면 그날로 당장 이 우주를 새로 만드시면 되는 분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런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이 땅의 죄악이 점점 더해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책이 없거나,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보고서 그 척도에 따라 세상을 정화시키시는 분 역시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역사 이래로 어떤 시대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정도로 기독교인들이 잘한 시대는 없었다. 단 한번도 전쟁이 없고, 죄악이 없는 시대가 없었으니까?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창조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이나 마귀가 하나님의 무능함이나 기독교인들의 반응이 부족해서 이 모양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도 다 자기들의 세계 안에서 하루하루 창대해지도록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그 때 이미 그렇게 해 두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과정이 바로 천지창조 다섯째 날의 비밀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