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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아닌 것 같고, 또 아닌 척 해 보아도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와 같은 형식들 안에 삶의 목적을 둔 양 그렇게들 열심히 살아간다.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왜 사는가? 하는 의문을 외면한 상태로 말이다. 필자의 나이도 40대 후반인데,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나 또래의 한국 남자들은 매우 매우 삶이 심심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골프가 되었던, 술이 되었던, 어떤 운동이나 등산이 되었던 그런 것들은 다 심심한 것에 대한 대안이다. 물론 가장 평범한 대안은 퇴근하면 기다리는 스포츠 중계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퇴근해서 집에 오면 목적이 사라진 멍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국민들 중에는 <우민 정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퇴근한 사람들, 심심한 사람들이 정치판에 관심 끄고 살아라는 의미로 시작되었다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퇴근하고 나면 할 일이 없어져 버리고 공허한 상태가 된다. 매일 창세기 1장의 처음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을 만나지 못해서 ......



사람들이 형식을 위하여 살아가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982년 프로 스포츠가 시작되었다.

< 사진 출처 : m.segye.com>


이렇듯 사람들은 육신이 먹고 사는 것과, 돈과 명예와 같은 형식을 삶의 본질로 알고 살아 간다. 그러다 그것이 없어지는 삶의 마디를 만나면 허무하고, 좌절하고 때론 자살을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퇴근하면 늘 그런 허무함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회사에서 하는 일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그것에 몰입해도 늘 자아 정체성의 갈증을 가져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같은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이런 모든 형식에 관한 것들이 자아 정체성이나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대안이 없는 것이다. 사실은 이 모든 사람의 공허에 대한 해답과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할 궁창 위의 물인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미 있음에도 불고 하고 말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궁창 아래의 물, 즉 삶의 형식에 몰입해서 살다가 어떤 이들은 <"여기는 내가 살 곳이 아니다!">, <"이런 삶의 형식을 위하여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여기에 있다가는 죽겠구나?"> 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과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뭍이 바다에서 드러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라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게 되는 과정 안에는 인간이 육신의 형식에 관한 것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창세기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에서는 <세례>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둘째 날 -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을 참조하면 설명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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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형식과 내용>이라는 것이 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상관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모든 종교가 다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더 나아가서 보면 사람들의 철학과 모든 종교가 다 이 오해를 풀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가 일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인 계율과 금욕적인 생활 그리고 도덕적인 삶을 살것을 요구하면서 그 결과가 신앙의 대상인 신이 그것에 대하여 보응하고 복을 준다는 것을 그 골격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런 일관된 사고 방식에 보편적으로 순응해 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사는 이유와 불안한 내세에 대한 보험으로 이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형식에 관한 예의와 행동을 선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사람들의 가치관은 한 마디로 궁창 아래의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 양식, 그러니까 "얼마나 도덕적인가?", "종교적 규례를 얼마나 잘 지켰는가?" 하는 것들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도덕적으로 살고 내세에 천국이나 극락에 가기 위함이다?"> 이게 정말 사람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는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그렇게 행위 규범을 다스려야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사람들의 행위 양식과 그것을 표준화 한 법이나 규례는 시대와 장소, 국가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면 다 동일한 조건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재 이유나 정체성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 국가와 시대의 요구사항일 수는 있지만, 인간 본질의 정체성은 아닌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형식이란 옷과 같다. 예식장에 갈 때는 밝은 정장을, 장례식장에 갈 때는 검은 정장을 입는 것은 상황과 여건에 따라 형식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형식에 관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형식이라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예수님은 매 시대, 모든 상황, 모든 문화와 모든 나라에 다 각각 오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맥락에서 보고, 그 답을 찾아 헤매고 열심히 하는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고, 이것은 궁창 위의 물 즉 상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궁창 아래의 하수와 같은 형식으로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물을 마시는 사람은 끊임 없이 목이 마른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런 형식을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상수를 마시면 하수가 나오듯이, 본질을 알면 형식은 그냥 나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빛이 있어 하나님을 인식하고 난 다음에 내용과 형식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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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형식이라는 것, 특히나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의 목적(내용)과 존재의 형식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개념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측면보다, 신앙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 목적과 형식이라는 것이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에 대한 구분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만약 모태로 부터 나서 죽을 때 까지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아주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짧은 한마디를 하셨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히 11:3)">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은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같은 히브리서 11:3절 말씀의 앞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진 줄을 안다">고 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믿는 사람은 형식과 내용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 그러니까 천주교나 개신교나 크게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선악과에 대한 오류이고 또 하나가 바로 형식과 내용에 관한 오류이다. 참고로 선악과에 대한 것은 선악과가 나오는 시점에 아주 아주 상세하게 다루어 볼 계획이다.


신앙적으로 <내용과 형식>에 관한 오류 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것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을 바르게 겪었고 겪어가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구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아에 대한 갈증이 형식을 추구하는 궁창 아래의 물을 마심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구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둘째 날의 말씀이고,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류라고 하는 이유는 앞의 그림과 같은 것이다. 경찰복을 입어서 경찰이 되거나, 순찰차를 운전해서 경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라서 경찰복을 입고, 경찰차를 운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기독교 안에 깊이 내재된 오류이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성령의 9가지 열매에 관한 관점이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고 살자고 가르친다. 이것과 다르게 가르치는 교회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다시 한번 보라. <열매>가 아닌가? 열매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인가? 그냥 성령의 나무 이기만 하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영화 <쿵푸팬더>에서 우그웨이 사부와 시푸 사부의 대화 속에서 우그웨이가 시푸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복숭아를 심으면 복숭아 나무가 된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그것이다. 궁창 위의 물을 마시면 궁창 아래의 물은 자동으로 나온다. 상수를 사용하면 자동적으로 하수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내용과 목적을 알게 되면 형식은 자동으로 나온다.



영화 쿵푸펜더의 한 장면, 우그웨이가 시푸에게 복숭아 씨를 심으면 복숭아 나무가 된다고 했다. 

<사진출처 : hojoni.tistory.com>


여기에 신앙적 오류가 있다. 기도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령이 그 안에 있으면 아무리 말려도 기도하게 되어 있다. 복숭아 나무를 베어 버릴 수는 있어도 사과가 열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심령이 그 안에 있으면, 그것을 표현할 육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근간이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 중 무엇이 먼저이고 본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천지창조의 과정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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