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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난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영하시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람을 단련시키거나, 아니면 큰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자격을 갖추는 과정으로서 고난을 사용하시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은 사실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 친구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이유로 인하여 그 죄를 돌이키도록 사람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을 한 반면, 욥은 도무지 그 이유가 있을 것인데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고난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말에서 고난은 그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과정에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바울 사도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은 그 존재의 목적 범주 안에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성경 한 권의 이야기를 가지고 주제로 부각된 논제를 정하여 이야기하다보면 신앙이라는 것이 다양한 분야에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보기에 66권의 책이 엮여져 있지만 사실은 한 권의 책이고 무엇보다 주제 역시 하나인 책이기 때문에 그 주제를 알고서 보면 모든 성경이 청색실과 홍색실과 자색실이 잘 엮어져서 제사장의 옷이 되는 것과 같이 성경이 속사람 안에서 엮이고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모자라서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은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 그 하나입니다. 인생이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조물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것이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신 것은 아버지는 아들의 의를 가진 분이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그 뜻이 흙으로 지어진 우리 자신에게 임하여서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죽음과 죄의 자리에서 떠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유일한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하나를 안다면,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며, 어떻게든 그것을 사람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시며,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며, 존재의 목적을 아는 생명을 가진 자가 되는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안다면 최소한 성경의 어떤 말씀이라도 어떤 이유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시는지는 알고 성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존재 목적의 세계에서 만나고 알게 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이 그렇게 그 각각의 일들과 다투어 이기려 하고 원인을 알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존재의 목적을 알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 뜬 사람이 보지 못하여 몸이 상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고난이라고 여겼던 것들(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고난 자체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거나 고난을 매개로 하여 다른 목적을 이루시려고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고 또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일련의 일들일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을 이긴 것입니다. 고난을 이겼다는 것은 고난과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삶을 고난이나 곤고한 것으로 여기는 삶, 죽어서 천국 가서 평안을 누리겠다는 생각하는 이면에 깔린 이생의 곤고함과 매일 싸우는 사람은 고난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고난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목적대로 경영하심 아래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다투는 것을 그칠 수 있어야 비로소 고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다투다가 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환도 뼈가 부러지고 나니 오히려 그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겠다고 하신 것도 이것을 말씀하심이며,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는 의와 다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장하는 것에 육신을 내어 주심으로 고난을 이기셨다고 하심이 이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바울 사도가 우리가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신앙의 한 과제로 볼 것이 아닙니다. 좀 쉬게 설명한다면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해도 하나님의 경영에 육신의 소비를 불가피한 것이고 그 소비되는 과정을 우리가 이때껏 고난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에 이끌린 것일 뿐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욕심은 다름 아닌 육신을 소비하지 않고 평안히 하나님을 믿고자 하고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아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를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라마단이나 중이나 수녀나 신부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하는 것이므로 겸손하고 수도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 타락의 원조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경영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육신이 소비되는 것이지 사람이 나서서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변론하겠느냐는 것이 바로 같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란 우리에게 존재의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란, 또 고난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대로 경영하심을 인하여 우리가 겪는 일의 일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 많은 질문을 욥에게 하시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으로 나타나고 보이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 질문들을 통하여 자신에게 임한 고난이라는 것이 고난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영 속에 있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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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욥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 고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원하셔서 주신 성경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고난을 해석하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인생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이라 여기며 욥기를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설사 사람들이 가진 뜻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이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신 목적대로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 있다면 인생들은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섭리에 대하여 사람들이 인권이나 생명의 존엄성과 같은 것을 들먹이면서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그럴 것입니다. “신이 뭔데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거냐?”라는 식의 반항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의 뜻이나 공로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시작하지도 않고, 자신의 소유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존재의 목적마저 자가발전처럼 자신이 정한다는 것이 전혀 합당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가 운전자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면 우리는 “이것이 미쳤나? 자기 맘 대로네?”라고 하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인생이 겪는 고난에 대하여 전면적인 재해석이 수반됩니다. 욥기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 인권도, 존엄성도 보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고 감사하며 기쁜 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욥의 고난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은 무조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단 한 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또 무엇보다 왜 다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욥기에 흐르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이끄시는 과정에 수반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영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그 가치도 다를 수 있고, 사람의 존엄성이나 주권과 같은 것이 무시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존재하는 목적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는 큰 마찰과 그로 인한 열을 발생시키면서 자신이 소모되는 것이 일생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 바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인 것과 같습니다.


욥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인생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행여 그것이 아니었다고 쳐도 적어도 그것은 고통이나 고난이나 곤고함은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이 블로그 욥기에서 많이 강조한 바와 같이 욥의 과정에 들어서서 보면 정말로 그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빌고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모습이 아님을 안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을 발견한 것을 알게 된 것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목적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금으로 축구화를 만들면 귀한 것일까? 그것이 아닙니다. 금으로 식칼을 만든다면 요리가 불가능합니다. 그와 같이 존재는 그 목적에서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되게 살아가느냐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 인생의 모양이 세상에서 편하고 대접받고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사는 것이 귀하고 영광스러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그렇고 그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고, 또 기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그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우리가 간절히 피하고 싶은 일들을 몸소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난과 핍박은 물론이고 목숨도 다 내어 놓았습니다. 


또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일, 흔히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하는 일을 위하여 몸을 소비했습니다. 사람들을 오라하지 않고 자신들이 갔고, 옥에 갇히고 발을 씻기며 섬겼습니다.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그 존귀함은 세상에서 볼 때는 너무 천하고 외면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것에서 느끼는 갈등, 욥과 같이 진정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았고,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자랑할 정도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정작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인생이 여상할 뿐 아니라 모두가 평안을 꿈꿀 때 육신이 욥과 같이 곤고한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듯,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육신의 문제에 대하여 의지할 곳을 잃은 기분이 듭니다. ‘이전에는 기도라도 하면 최소한 마음이라도 위로되었는데…’라는 생각, ‘이렇게 귀한 복음을 알고 있는데 실수하시는 셈 치고 복음 전하기 편한 삶을 좀 주시면 안 될까?’ 같은 소망들이 마음에 들면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고난의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시간들을 지나노라면 놀랍게도 하나님의 주권이 자기 안에서 너무 분명해집니다. 욥이 하나님께 받은 질문은 형식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과정을 겪은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하나씩 보인다는 것을. 정치, 경제와 같은 문제들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경영에 속한 것임이 보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세상일 잘못되었다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인지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고 또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들이 자기에게 들린 사람은 정말로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영 아래에 있으므로 세상이 잘못된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잘못된 것은 자신의 안목 그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세상은 이래야지.’라는 그 하나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릇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시듯 자기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될수록 세상은 아름답고, 또 무엇보다 인생에서 겪는 곤고함과 수고함이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지경에 이르면 비로소 태어나지 않음보다 태어나서 살고 있음이 더 감사하고 놀라운 은혜라는 고백이 끊이질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는 인생이 되었음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성령이 증거 하실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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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후반에 나오는 하나님이 욥에게 하시는 질문에 대한 가장 큰 고찰 포인트는 왜 그 질문을 하셨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는 것에서 시작된 욥의 고난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에게 고난을 가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를 설명하셔야할 것 같은 시점인데 그런 해답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퍼붓고 있다는 것이 가장 의아한 점이고, 그렇기 오늘날 성경 욥기를 읽는 이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또 욥은 이 질문들을 받고서 자신을 회개합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무지한 말로 헤아렸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한 수 많은 질문들 어느 하나에도 답하지 못했는데 깨달았다는 것도 심히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안다면 어쩌면 욥기의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은 소위 말하는 삼라만상의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왜 그런 모양과 능력과 본성을 가졌는지를 아느냐고 물으시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사실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대부분 모르는 것입니다. 화학적으로 모든 원소는 원자와 전자로 이루어졌고, 전자는 궤도별로 2개 4개 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렇게 말고 다르게는 안 되는 이유는 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면서 그 질문 자체에 대한 답을 바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면 좋겠지만 행간을 보고 목적을 아는 것이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질문들 뒤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경영하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질문 속에 언급된 그 어떤 것도 피조물이 그렇게 기획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창조하실 때에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한 것들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단순하게 육신의 모든 것을 잃고 육신마저 병든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욥의 한탄에서도 그것을 크게 한탄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라는 것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이전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어린 것들이 자신을 멸시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같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같아 보이면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탄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음에도 삶이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세 친구들이 그렇게 행위의 범죄로 인하여 육신이 곤고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반적인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 합리적인 주자 앞에서 굴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명함은 누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욥의 과정에 이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의 과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위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시는 것임을 알게 되는 자리에 가서 보면 마치 욥기 시작에 욥이 등장할 때 온전하고 부유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듯 정말로 기쁘고 이때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알아 온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보이며 세상 부유한 사람임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내 그 기쁨,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행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 온전하고 귀한 것임에도 육신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에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이 과정은 정말로 신앙의 여정에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을 모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했을 때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엠마오로 도망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왔는데 왜 사사들의 시대가 있어 이방인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우리도 남들처럼 왕을 달라고 부르짖었는지를 알 수 없고,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왜 또 광야에 머물러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그 공부한 자격으로 설교하는 자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높은 곳에서 떠들고, 그 외침에 의지하여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은 욥기도 사사기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다 아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다 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 무한한 질문을 하시는 이유도 자기 안에 분명히 밝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너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좀 더 알아 가면 그것을 인하여 자신이 귀해지는 것을 알아 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만큼, 또 그 귀함을 아는 만큼 세상의 삶이 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큰 갈등입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신앙인들이 여기서 큰 오판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세상에서 대접을 받으려 합니다. 아니 그래야 될 것처럼 여깁니다. 대접은 아니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살아가면 세상의 문제가 자라 풀리고 같은 조건이라면 항상 자신이 좋은 것이 당첨되어야 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심을 알고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심을 아는 욥이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나님 모른다면서 핍박을 받는 것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인데 그 귀한 것의 실체를 알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천한 자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그것을 담은 육신이 세상에서 대접은 받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 삶은 영위할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평안해지겠다면서 주장하는 선악과를 먹은 주장과 의로움 앞에 육신을 더 소비하는 종과 같이 되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정작 그 아들의 아들 됨은 다른 자리가 아닌 말구유며 또 흉악범을 처형하는 형틀인 십자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가면서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육신이 자기의 평안을 추구하면서 살아왔고, 또 하나님을 알면 오히려 귀해질 것 같은 그 육신의 삶이 십자가로 끌려가는 것이라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 되기까지 사람이 겪는 갈등과 곤고함과 때로 배신감과 자괴감이 바로 욥이 당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 욥이 하나님께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항변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도 별 것 없는 것이 아니냐는 항의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가 때로는 사람을 아프시게 하신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시는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욥에게 질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사람들의 보기에는 어떤 것은 사납고 어떤 것은 놀라울 것 같아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경영하심이라는 것을 알면 욥의 그 괴로움과 고난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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