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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의 말씀 중에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예정론>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사…”(약 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약 1:5)과 같은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는 것에 있어 예정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했다.”라는 논리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그럼 선택받지 못했다면 믿어도 소용없네?”라는 반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대화가 명쾌하지 못하다면 말을 한 사람이 불분명하게 했거나 아니면 듣는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해석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충돌에 있어 하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해결책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틀린 말을 하실 리 없다.’라는 것까지는 믿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알기 쉽게 말씀하셨다.’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아리송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정론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이 큰 받침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예정을 논하는 것에 있습니다. 육신을 본질로 본다는 것은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도 눈에 보이는 세계를 예수님께 미끼로 던졌는데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의 복이고, 육신이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렵게 되면 벌이라는 생각, 그래서 육신이 평안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영광이라는 생각은 육신이 신앙의 본질이고 척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이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육신을 본질로 보는 이들이 예수님께 기도하고 사도들의 말을 좇아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하니 그마저도 육신의 삶의 단위를 예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을 하나의 예정하시는 객체로 보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으셨다는 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어떤 사람이 택하심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이 택하심을 받지 않았는지 분석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어이없게도 자신들이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하나님께서 택했다고 정의내린 사람의 삶을 좇아가는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a man에 관한 것이 아니라 the Man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 어떤 습관을 가진 사람, 어떤 신앙적 신념을 가진 사람, 어떤 신학적 수준이 있는 사람, 어떤 신비한 능력을 일으키는 사람 등으로 특정되는 한 개인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졌기에 그것을 예정하신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 사도는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성도라고 한 사람, 신실한 자라고 한 사람,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하였지, 어떤 특정된 사람을 예정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예정하셨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을 인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예정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은 어떤 정체성 곧 the Man에 관한 것이지, a man을 예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만 알아도 이것은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창조 목적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 인생의 본질이 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우리를 예정하사…”에서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예정이나 계획이라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예정도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예정됨이 증명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실현되거나 나타난 것이 없다면 예정은 그저 몽상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라고 칭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올 때 비로소 그 예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을 표현하는 자니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시고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정체성이라고 순종한 사람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받는 은혜를 입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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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바울 사도가 주제처럼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한 알의 사과가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나, 하나님께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범위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지키는 생활 안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본성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같아서 그로 인하여 자기 삶이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셨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도 오늘 우리가 보는 그런 신앙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자신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스스로 철떡 같이 믿었는데 막상 하나님 앞에서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됨을 인한 후회를 인함입니다. 그 후회가 영원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뜻대로’와 같은 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거의 상용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셨고, 하나님은 아들을 그렇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과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자기 육신의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고,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고, 자신들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봐서 간과하지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사람들은 “저가 누구 길래 이렇게 하는가?”라고 했지만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백부장은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사람들을 만드신 목적이 이루어진 순간은 예수님께서 육신이 평안하실 때가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의 뜻대로 소비하였을 때인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먼저 알고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시고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a christ이기에 the Christ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고, 오히려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예수님과 반대로 육신이 평안을 얻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고 믿어도 해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 아니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자기 존재의 목적과 정체성으로 삼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고 또한 그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그런 삶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씨를 아버지에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부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문안에서 우리 아버지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 것도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존재 자체와 존재 목적을 하나님이 주셨기에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셨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도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늘이 변하면 땅의 모든 것이 변하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땅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인생도 모든 것이 그에 따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신령하다는 것도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가지신 복이란 의미인데, 이는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신령한 영)이 바로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기에 그것을 나타내실 형상 가진 존재가 있어야하기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바로 알면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을 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는 것은 교황이 낀 어부의 반지와 같이 형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드시고, 그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시겠다고 하신 그 뜻이 바로 천국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근간입니다. 태초가 열리는 것도 물리적 세상의 시작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인데,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시작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사람으로서의 태초가 열린 것이고, 갓 입학한 학생은 학교와 학생으로서의 세계가 열린 것이듯,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므로 그 영이 가진 생명의 본성에 따라 열린 안목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가 바로 천지 창조인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거듭난 것입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났기에 어제와 같은 것을 보아도 그 의미가 다르고 목적이 달라서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켠 것과 같아서 어제까지 세상을 살면서 왜 사는지 몰랐기에 세상 일이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없고, 늘 세상이 왜 이런가 궁금하기만 하다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이 자기 안에 있어 그 영으로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이 밝아져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육신을 가진 우리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을 지으시고 살게 하신 뜻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보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지가 안에 생명이 되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된다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신령한 것입니다.


이 신령함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영이 우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목적과 이유를 알게 합니다.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기 안에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신령한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인생으로서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이기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복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세상에서 형통한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존재한 다음에 있는 일들이기에 먼저 존재의 목적부터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을 아는 복을 받고서 살아가는 삶에는 그런 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처할 줄 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복은 신령한 것, 곧 신비한 하나님의 영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기에 이 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형편을 보고 욥의 세 친구와 같이 말하지만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있으면 좋고, 닥치면 그것을 취할 수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가지는 것을 복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복이라면 예수님도 십자가가 아닌 황금 보좌에서 하나님 아들임을 나타냈을 것이고, 바울 사도도 감옥이 아닌 높은 강단에서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복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바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시고 육신의 삶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을 먼저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의인 것입니다. 그 의가 있어야 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과 육신의 형편은 그에 종속된 것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걱정할 것도 아닙니다. 자동차를 사는 사람이 기름을 넣지 않을 리 없듯이 하나님께서 그 목적하신 바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부유하게도 하실 것이고, 또 필요하다면 십자가에 매달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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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2) 은혜와 평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4. 25. 11:05 Writer : 김홍덕

‘은혜와 평강’은 바울 서신의 인사에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전 포스팅에서도 설명을 몇 번 한 바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 주어진 것을 말하고, ‘평강’ 곧 평화 혹은 평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없는 것 중의 하나로 ‘공짜’를 듭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인생 그 자체는 자기 힘으로 얻지 않은 공짜인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공짜인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든 사실 모든 것이 공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소유하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더욱이 어떤 미련한 이들은 하나님께 가서 또 자기가 원하는 삶을 기도하니 참 가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에서부터 누구나 벗을 수 없는 죽음을 이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공짜를 이야기할 때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가장 크고 유일한 일은 오히려 존재하게 된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은혜, 곧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생이란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의“ 곧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로 구분하면 완연하게 다른 것이 됩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소비하는 것에 온전한 존재로 보는 이들이 있고, 육신의 소비가 아니라 평안이 하나님의 복인데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은 육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이것을 신앙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인이란 아쉽게도 거의 다 후자에 속합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것에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인생이 소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비된다는 것은 그것에 사용됨으로 약해지고 낡아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급적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치라 여겨지는 것들을 많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가장 흔하나 말로 세상에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가 또 선교사나 주의 일에 헌금하는 것이 자기 은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단정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로서 교회나 주의 일에 기부하듯 하는 자리에 이른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은 육신을 소비하지 않는 자리, 평안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는 것이 아니라 발 씻기는 자들에게 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 모호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이 구분되니 않으면 거듭난 생명이 아닙니다. 아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육신으로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육신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여 십자가에 드리는 소비고, 반대로 육신의 정욕을 좇아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생명의 구분이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히 거듭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 사도가 은혜와 평강을 마치 한 단어처럼 항상 붙여 사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곧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생으로서는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이후에도 스스로 그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데 인생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 목적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평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안이라고 하면 육신이 무탈하고 등 따시고 배부른 평안 중에 있어 하나님을 섬기러 교회에 다니는데 지장이 없고, 또 교회가 헌금이 필요할 때 여유 있게 낼 수 있는 것이 평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심으로 육신을 소비하는 것을 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하신 분을 주라 믿으면서 정작 자신은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단지 구하는 평안은 같으면서 구하는 방법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기에 세상과 다르다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회 칠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것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눈이 어둡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눈이 어둡다는 것은 아직 빛이 없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창조조차 되지 않은 것인데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기니 더 문제인 것입니다. 뭐가 바뀌고 나아지려면 현실 인식부터 바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으니 신앙이 여전한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노력할 뿐이며,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본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 곧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가진 평안의 가치와 다르게 육신을 소비하는 것에서 평안이 있고, 그 평안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고, 따라서 인생의 목적도 하나님께 있으며, 그 인생의 목적은 세상에서 육신이 평안하게 살면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안하구나!’ 생각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육신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일로 육신을 소비하는 것임을 아는 그것이 은혜고, 그것을 은혜로 여기는 사람이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세상이 볼 때는 육신이 평안하지 않아 보이니 평안도 아니고 복도 아니며 보잘 것 없고 조롱하는 것과 같은 삶인데 그것이 자신에게 평안이 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시면서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말씀하신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가 항상 문안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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