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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3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4. 16. 22:33 Writer : 김홍덕

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 알고보면 그것은 부활의 논쟁조차 아니다. 그들은 부활이 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두개인들과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가치관이 같다는 것이 놀라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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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속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 욥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의 기준이라는 가치관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욥이 의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가치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기준이 육신의 행위에 있다고 여기기에 그 의의 보상인 복과 벌도 육신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이 겪은 고난은 단순하게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모르는데 친구들의 그 많은 책망에 꿋꿋이 소신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할 하등의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듯 육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거나 벌을 받아 고난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욥이란 사람이 당한 고난이기에 이것은 행위에 기인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행위에 기인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사업이 망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교회에 가야 해결된다.’는 식의 사고를 가지지 않은 이에게 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뭔가를 잘못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천벌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당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여 받게 된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욥이 당한 고난은 욥의 육신의 복을 몇 배나 더하여 주시기 위하여 시험하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힘든 일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혹은 복)를 주시려고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가?’라는 식의 말을 하는데 욥기에서 욥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고난의 정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욥기를 포스팅하는 내내 강조한 것 같습니다.


욥의 고난은 지속적으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로 의로움을 판단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 겪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의 끝에 고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나 수단이나 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을 경영하시므로 사람이 겪는 일을 사람이 자기 뜻과 맞지 않아서 힘듦으로 스스로 고난으로 여기는 것일 뿐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히 경영하시는 것의 증거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앞서 몇 번의 글에서 욥의 신앙 여정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고난을 바로 앞서 설명한 고난이 하나님 경영의 증거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욥이 당한 고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무엇을 의로 삼으시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방향에 대한 분명하지 않음이 신앙 여정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 그런 고통이 없었다면 아직은 하나님을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 생기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라고 반문하거나, 행사가 형통치 않은 사람을 보면서 ‘교회에 가서 예수 믿어야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거나,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행위) 좋은 신앙이 되고 그래야 육신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육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갈등의 범주에서 보는 것일 뿐, 욥이 겪는 고난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 육신에게 임한 일들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안 된다니?”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는 행위나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성경을 보며, 교회 봉사에 빠지지 않고 수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라는 막막함이 주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욥의 고난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경 읽는 것, 그리고 봉사와 같은 것을 부인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하므로 의로워진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고,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리어 본능처럼 하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왼나사와 오른나사의 차이와 같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즉 욥의 고난은 왼나사가 오른쪽으로 돌려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자기 손에는 왼나사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그 의를 인하여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문제는 받으려고 하는 복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욥기에 나오는 사탄과 세 친구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 역시 하나님께 자신이 행동으로 죄를 범함을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너무 괴로운 상태였습니다. 그의 고난은 그렇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는데 왜 육신의 삶이 이리도 곤고한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던 것이고 그것이 너무 곤고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바라며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원망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양심이 있다면 그 원망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았기에 한 원망이지, 하나님의 경영하심과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여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십자가와도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행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면 주신다고 성경에 약속하셨으니 그것을 믿었는데 주시지 않으니 원망할만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 안에 있는 사람, 즉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것을 육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것을 한다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군인(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서 군복(기도하고 성경 보며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욥의 과정과 같이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서 육신의 삶을 다시 보면 처음에 그 막막함과 참혹함은 정말로 욥의 형편에 비할 만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괜히 알았다 싶으며, 복음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괜스레 알았다 싶은지 정말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날 까지 자신의 의에서 비롯된 자식 곧 자신의 의가 형식으로 표현된 모든 것이 욥의 자식들이 죽듯 사라지고, 자신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던 모든 것이 욥의 재산이 날아가 버리듯 무가치한 것이 되고, 자신의 아내, 곧 자신이 가신 삶의 형식은 오히려 자신을 저주하며,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여기는 친구들이 이단이다, 남들처럼 믿지 않더니 ‘꼴좋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을 홀로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그 허망한 세월은 정말로 욥이 하나님께 죽기를 구한 것과 동일한 마음이 듭니다.


바로 이 여정이 욥이 겪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알아서, 인생이라는 것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고, 육신의 곤고함도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알기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완전한 무능의 상태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그 시절이 바로 욥의 고난이고, 바울 사도가 말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한탄한 세월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믿기에 기도하면 얻을 것이라고 하여 기도하려 하니 육신이 너무 안 따라주고 직장이나 혈육이 원하는 것을 하느라 메여 있어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만 육신은 세상에 종살이 하는 것 같은 것이 욥의 고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 친구들의 가치관에 뿌리를 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곤고함의 세월, 정말로 무능해서 아무 것도 자기 힘으로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정말로 복음을 괜히 알았다고 탄식하고, 하나님께서 목숨을 취하셨으면 차라리 좋을 것이라 한탄하는 세월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목적 아래 자신이 경영되고 있다는 그 하나 만으로 감사하게 되어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셨음을 감사하게 되는 전과정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극적인 변화를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이야기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 이유를 보이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인하여 사망의 몸이 벗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덧입을 것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고난이라 할지라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전하였습니다.


그 바울 사도의 반전과 같이 욥 또한 하나님의 질문들을 들으면서 세상의 모든 것,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영하심 아래 있고, 그 경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귀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곤고하게 여겼던 그 고난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었듯 사람의 행위에 대한 심판의 결과를 인함이 아니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시는데 그것을 사람이 자기 육신을 귀하게 여기는 기준으로 보니 고난이었을 뿐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욥기가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고난으로 여기는 육신의 삶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 뭔가 죄를 범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거듭난 생명이 된 처음에 육신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달라질 것 없고, 오히려 이전에 성경을 몸으로 지키면 된다고 생각으로나마 위로 받던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겪는 갈등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도 복음도 괜히 알았다 싶은 그 괴로운 시절이 고난으로 여겨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고난은 사람을 심판하심을 인함도 아니요, 성장시키시기 위함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는 삶으로 경영하심을 사람이 고난으로 여길 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 존귀한 목적 안에서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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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일부이고,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에 불과한 것이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하게 보일 수 있는 그 일 하나를 사람이 못합니다. 그것을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기도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몸에 힘을 빼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잘하려고 몸에 힘을 주면 몸이 굳어져서 제 기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 아니 아마추어 동호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다 아는 몸에 힘을 빼는 그 하나가 안 되어서 기량이 늘지 않고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가지고 씨름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은 철저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라는 그 하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전히 은혜로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뛰어 내리는 사람들과 같이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인데, 살아가면서 각종 문제들 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삶의 전반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교회에서 아니면 집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라와 세상 걱정을 하고, 삶의 파편들을 하나씩 하나님께 해결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좋은 믿음인 것 같지만 솔직하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맡겼다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기도나 다짐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맡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한 착각이며 불신입니다. 전투만 이기려하고 전쟁의 결과는 생각지 않는 바보 같은 지휘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삶을 세상을 살기에 적합하게 주셨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가진 육신의 역량과 사회와 세상의 제도와 법질서 안에서 살고 있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렇게 살면 되는데 살아가는 문제까지 일일이 하나님께 맡긴다면서 기도하고 그것으로 안 되면 돈 싸들고 기도원이나 목사에게 가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이런 망나니 같은 짓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증거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살아가는 순간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또 무엇을 할 것인지와 같은 것은 하나님께 물어볼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사건건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것은 왜 이 삶을 주셨는지에 대한 목적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게 하셨다면 온전히 경영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그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에 대하여 인생의 고난이라는 삶의 한 파편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유를 알고자 했습니다. 요즘 말로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고난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온전히 세상을 그리고 욥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고자 하시는 경영에 수반된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인데 욥은 그것을 아는 것에 인생을 걸고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나님께 항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욥이 참 신앙 없는 사람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 더합니다. 아니 욥에게 비할 바도 못됩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듯 대든 것 같아 보여도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의로 삼거나 그것을 복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살 ‘그 정도’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매개는 육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볼 때 고난이라는 한 명제는 자신에게 참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큰 그림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말 그대로 세상을 온전히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욥에게 분명하게 각인을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언제나 온전한 것이며, 그 경영 아래 있는 피조물들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도 하나님께 자기 삶의 문제를 기도하고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공부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전히 경영하시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그런 신앙,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답답함은 정말로 말할 길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한 번도 웃으셨다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될 지경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자기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영에 속한 것임을 알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존 본능을 주셨으니 물에 빠지면 살려고 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경제활동이 요구되면 치열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서 어떻게 하면 물에 빠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빠지면 수영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육신이 평안하면 교회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회 칠한 무던 속의 생각은 어떻게든 경제생활을 편하게 하면서 돈을 벌까 궁리하면서 그 각각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고 하심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응하시지 않겠다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육신으로 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의 작은 파편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의지하며 이겨가는 것을 신앙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며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을 듣고서 욥이 이전에 알지 못한 것을 말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결 같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피조물 최대의 영광인 목적대로 사용되는 생명과 빛으로 인도하시고 그 안(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바라시고 인도하시는데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는 일들을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불신과 어두움과 생명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조 목적을 모르는 삶이라는 것은 재와 티끌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수많은 질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창조하신 목적대로 온전히 경영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또 모든 일상들은 그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수반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영하시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며, 항상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니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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