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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문을 촉발한 욥의 여정 – 2


욥의 고난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분이시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 무엇을 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아라 수 있는 과정입니다. 물론 고난이라는 것이 특별히 차별화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려고 한다면 욥의 고난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ㅣ.


늘 언급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생을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음을 인한 갈등과 곤고함을 인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되는 일을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뜻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이루기가지 고난이 많았다는 말 역시 뜻하는 것이 자기 마음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너의 범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소망이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며 복이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경영 안에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만 알았더라도 욥이 “너희의 말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할 정도까지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얻고자 하는 것에서 가장 큰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삶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뜻 기특하고 힘들고 고상한 도전 같지만 그것도 무식한 짓이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바를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심으로 표현하셨는데 주신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자리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는 자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인생이라는 것이 성경을 행위로 지켜서 그 보답으로 육신의 평안을 보장 받고자 함도 아닙니다. 또한 육신의 평안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이고 의로움이라고 여기는 자리가 아닙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자리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알고서 보니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는 자리이고, 그렇게 귀한 하나님을 알았으면 삶이 달라져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갈등을 겪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욥이 당한 고난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괜히 고난을 주시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바라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 사람이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실 목적으로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과, 무엇보다 육신의 곤고함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 수행에 수반된 과정을 사람이 곤고하게 느끼는 것일 뿐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욥이 고난을 겪고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의 원천적인 의미를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신 의미를 알게 하시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이견이 있으면 욥의 고난은 한낱 더 큰 육신의 복을 받기 위한 테스트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시는 분이라 믿는 세계에 속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욥의 고난을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의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의 평안이 담보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육신은 절대적인 소비재입니다. 존재 했던 모든 인생들이 다 하나님의 뜻 아래 다 소비되었습니다.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 에녹과 엘리야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에 소비된 것이 육신이 보존되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이 보존되고, 그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고, 마음이나 생각이 원하는 대로 육신을 평안하게 하고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소비하므로 하나님 아들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라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 물론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볼 때 고난인 그 곤고함이라는 것은 벌도 아니고 테스트도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소비되어가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어지간한 사람의 안목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거듭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욥기의 내용은 거듭난 사람이 자신의 거듭난 삶에 대하여 인식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의를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것을 알면 귀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그 알 수 없음이 하나님께 원망이 되기도 하고, 한 편으로 육신의 삶은 또 곤고해지는 그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갈등이 바로 욥이 겪은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육신의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과 불의로 여기기에 육신이 곤고하게 되지 않기 위하여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신앙의 여정에서 욥기를 보면서 육신의 고난을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욥기와 무관한 자기만의 생각일 뿐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과는 완전 동떨어진 신앙인 것입니다. 아울러 죽어서 천국에 가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기에 의미 없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받은 것은 일면 욥이 그것을 질문으로 들을만한 여정을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질문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신약이든 구약이든 무관하게 행위로 성경을 지킴으로 육신의 고난이라는 불의한 일을 겪지 않아야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하는 과정은 지나야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야 답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알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자신이 겪어온 여정에 맞게 순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경영하시는 뜻대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인생의 여정을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그 과정에서 겪는 인생의 소비가 고난이 아니라 은혜인 것을 알아가는 사람들은 그 생명의 장성함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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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문을 촉발한 욥의 여정 - 1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답을 듣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부정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욥의 기를 죽여서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하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질문은 욥이 하나님께 원망하는 원망 속에 담긴 의문들에 대한 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언어구조로 보면 질문이지만 내용은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문 다음에 욥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마나 사자나 악어와 같은 짐승들의 어떠함을 욥이 알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은 애초부터 욥이 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들은 지금의 과학으로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의 목적은 욥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 원하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즉 창조의 목적을 알고 있느냐의 문제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원망을 했던 것은 하나님을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인 만큼 정말로 귀한 것이니 그 귀함에 맞는 삶의 귀함이 주어져야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오히려 고난을 받고 있으니 하나님을 바로 알아도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난은 하나님이 고의로 자신을 대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욥의 원망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삶에 고유의 곤고함이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면 욥의 말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억지로 끄집어낸 것 같지만 그것이 억지로 끄집어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육신을 가진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이 평안해야 선한 것이고 불편한 상황은 악을 인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색안경을 인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색안경이지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의 가장 기초적인 시작입니다. 출애굽의 여정으로 본다면 막 애굽을 떠나는 단계 정도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친구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생각은 욥을 시험하고자 한 사탄의 생각과도 결이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의 여정은 하나님은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으로 여기겠지만 욥기 내내 언급한 바와 같이 일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는지 돌아보는 가치관을 가졌다면 사람을 하나님은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에 속하지 자신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은 믿음만 보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착각일 뿐.


사람이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려면 먼저 자신이 드리는 행위의 제사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한 반복되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는 늘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부지불식중에 화를 내는 것이 회개하고 노력해도 반복되는 자신의 모습에 의구심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 늘 좌절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 육신이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 노력합니다. 그런 시도를 성공한 사람이 아담 이래로 아무도 없었고 성경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계속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십자가 세운 교회에 다니면서 행위를 정결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주장해도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쉽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게 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이것은 욥기가 아닌 다른 성경에서 또 다루기로 하고,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은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와야 진정한 거듭남이고 생명이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렵게 거기까지 온다면 그제야 욥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존재의 정체성, 하나님의 관계성에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 안에 욥의 원망을 이해할 수 있는 체휼함이 유전자와 같이 있음을 알게 되기에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의 생명이 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라는 프레임 안에서 신학을 하고, 그 신학 수료자에게 권세를 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행동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어 놓으라고 헌금을 하면서 그것을 듣고서 노력하는 신앙이 정통 신앙이라고 우기고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면 세 친구들과 같이 자신을 대할지라도 그것이 아님을 굳건하게 믿는 믿음이 자기 안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여기가 신앙의 본론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존재의 목적을 깨닫는 과정이고 그리고 나서 그 알게 된 것이 어떤 의미며, 그것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알아야 하는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고 난 다음 인생의 방향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는데 육신의 삶도 여상한 것 같고,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불문명한 것도 여전한 것 같은 갈등이 바로 욥이 겪은 고난이고, 그 고난 중에서 보니 하나님을 알았지만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한탄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욥의 여정과 심정은 정말로 극히 일부의 인생들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숨겨 두어서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보여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육신을 부정하게 보고, 행위로 그것을 만회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공개되었지만 자기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노라하며 목사다 신학박사다 혹은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난다며 떠들어도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정말로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심정을 알면 신학을 신봉하지도 않을 것이며, 기도하여 병을 낫게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교회에 가서 세상을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을 것이며, 육신의 평안을 강구하거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그것을 구하는 기도는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양이 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과 같기에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가항력의 심정을 알 수 없다면 욥의 고난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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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욥이 보여주는 대화의 기술


엘리후의 말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욥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신 본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이 고난이 겪는 이유에 대한 것이며, 그렇다는 것은 사탄에게 욥을 내어주시므로 고난을 겪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뭔가를 조목조목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답할 수 없는 것을 연이어 질문하시는 것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질문에 대하여 욥은 하나도 답하지 못하였는데 욥은 깨달았고, 회개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심한 복선과 암구호가 오간 상황 같으나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욥이 알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질문하신 의도를 알기 바라셨고, 욥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한 분명한 가이드를 제시해 줍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니 어찌되었든 기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뻐하려고 해 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들은 화가 나는 일들이 많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뿐인 것 같고, 슬픈 일도 태반입니다. 그렇지만 기뻐하라고 했으니 억지로 기뻐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탈출구를 찾기에 골몰합니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그렇게 생각하고 지키려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는 것이 정답이라면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조목조목 대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질문이니 그것에 답을 하여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대우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대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욥이 알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질문하신 의(도)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문장 그대로 지키기만을 하나님이 바라시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셔서 도전해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항상 기뻐할 수 없더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지키기 힘든 것을 지키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지 지킬 방법과 수단과 요령을 궁리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궁리한다고 신학이란 학문까지 만들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만드신 육신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도 주셨고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우리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순간순간 어떤 일이 있어도 기뻐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키기 힘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욥이 하나님의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질문하시는 의도를 알았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완전히 문장 그대로 지키려고 합니다. 교파가 갈라지는 것도,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종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분파되는 것도 심지어 세례를 세례라고 해야 하는지 침례라고 해야 하는지를 다투는 것도 모자라 성경은 특정한 것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모든 것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욥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예식은 이렇게 해야 한다(have to)고 가르치고 배우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욥기와 같은 성경을 가르칠 방법도 의미도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마저도 태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것에 권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질문하시고 욥은 하나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세례라고 해야 하는지 침례라고 해야 하는지에 따라 종파가 갈려져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모르는 사람들의 신앙관으로 보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기껏해야 성경에서 “하나님이 만든 동물 중에 최고라고 한 것이 뭔지 아냐?”라는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정도일 뿐.


성경은 행간을 읽는 것입니다. 세례가 맞는지 침례가 맞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이 언제인지 성탄절이 언제인지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나 바벨탑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를 따지고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청전을 읽고 어떻게 바다에 빠지고 바다 어디에 빠져야 효도를 하는 것이냐를 다투는 어리석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욥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은 욥이 그것을 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도 상황에 무관하게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람이 어떤 존재로 나갈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욥에게 하신 질문들은 욥이 알지 못했던 것, 곧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심에 있어 인생이 고난으로 느끼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뜻을 가지셨다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은 존재 자체가 기쁜 존재가 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고 욥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신 의도를 욥이 알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답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질문하신 의도를 알기 바라신 마음에 합하는 것이기에 욥의 깨달음과 회개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모습의 교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성경을 대하는 안목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안목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목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안목은 생명의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는 것이 목적 안에서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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