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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5. 10:28 Writer : 김홍덕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변하시지 않는 것은 사람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욥 33:17)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은 자기 안목 때문에 보지 못하고 무관하게 여기시지만 침상에서 졸 때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늘 말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일부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이 선교사로 간다고, 아니면 오지에 가서 선교하겠다고 헌신이라며 하나님께 그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답을 기다립니다. 목사가 되겠다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어떤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어느 지역으로 가는 것이 좋은지, 어떤 방법(총회 후원, 교회 후원, 개인 후원 등)이 좋은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답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뜻을 묻습니다. 그러나 단연코 하나님은 그런 것에 답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자기들 노력으로 인하여 얻어진 대로 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먼저 기대하시는 것은 인생을 주신 목적, 즉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신 뜻이 이미 있기에 그것을 먼저 잘 이행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살다보니 원치 않게 어떤 땅으로 가게 되거나 어떤 환경에 처하게 되었을지라도 그곳에서 주신 성품대로 살면 그것이 그 땅에 복음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신 먼저 된 뜻은 무시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하나님을 걱정하고 위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뜻을 묻습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일일이 답을 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모든 순간에 까지 늘 말씀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그 시작과 존재의 정체성 그리고 삶의 전부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뜻에 관하여 하나님은 머리털의 수를 아실 정도로 완전히 알고 계신 분이실 뿐 아니라 그 뜻하신 바를 위하여 염려할 것 없이 말씀하시고 경영하시는 존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하나님을 위할 테니 뜻을 알려 달라고 자꾸 묻습니다. 그런 질문에 하나님은 답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드시고, 그 인생이 무엇을 위해야 하는지 이미 다 밝히 말씀하시고 심지어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 까지 분명하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물을 것은 사실 거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존재 이유 그 하나만 물으면 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픈지와 같은 쓸데없는 것은 물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이 어느 대학을 갈 것인지, 직장을 갈 것인지 대학원을 갈 것인지, 의사를 할 것인지 약사를 할 것인지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 묻는 것은 정말로 영적 몰지각함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 존재하는 이유를 알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밝히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있으면 인생의 모든 것이 밝아지고 모든 것이 인식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구절절 인생이 왜 이런지, 또 무식하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은 아직 천지창조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어두운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니 욥의 각종 질문들이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더 밝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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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2 -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3. 24. 19:39 Writer : 김홍덕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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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4. 13:34 Writer : 김홍덕

이제 엘리후는 욥의 말 중에서 얼마들을 하나씩 반박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자신을 원수 대하듯 하신다고 한 말에 대하여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과 같은 사고의 체계를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 말에 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스스로 진술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시므로 피조물에 대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시는 분이지 피조물이 자기 사고 체계에서 가진 의문들에게 변론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가지신 뜻을 완연히 표현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교만해지는 것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쟁론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께 주장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창조주의 의에 순종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자기 입장을 변론하고 주장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할 존재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상이 선하니 악하니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그렇게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거나 또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겸손한 척 기도하는 것에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곤고하면 안 된다는 정의가 먼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다르다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고난 없는 삶을 보상 받을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께 행위를 드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그런 분도 아닌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는 것이 정말로 귀한 것이기 때문에 대접까지는 아니어도 고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계속 변론하려 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에 대하여 엘리후는 하나님이 그것을 진술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욥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께 궁금한 것을 물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모든 의문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의에 걸려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 자기 안에 순종이 되어서 보면 세상은 너무 온전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 뜻대로 경영되는 세상이 잘못될 리 없고, 따라서 의문이 생길 리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설계자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기계가 설계대로 잘 작동되면 ‘왜 이렇지?’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쟁론할만한 의문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물론 시작이야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려면 적어도 자신도 모르는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 가정은 함께 해야 공평한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도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열심히 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을 언제까지 해야 하지?’, ‘어느 단계가 되어야 이룬 것이 될까?’, ‘사람은 이렇게 노력만 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와 같은 의문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서 이런 의문이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욥과 같이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빠지면 안 되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된다고 하셨는데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후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의 빛을 얻기 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성품을 믿든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하나님과 쟁론하든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세상이 자기 생각에 성경적이거나 하나님을 위한다고 여기는 것도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변호가 필요하지 않은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욥도 소발의 말에 대하여 반론을 할 때 “네가 하나님을 위하여 쟁론하느냐?”고 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대부분의 교회나 성도들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도 결국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데, 왜 들어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는 항변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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