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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7. 12:11 Writer : 김홍덕

친구들에 대한 마지막 반론


욥기 27장에서부터 31장까지는 욥의 마지막 변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물론 욥의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27장에서는 세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고, 다음에 지혜에 대하여 말하고 끝으로 최후 변론 같은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7장에는 욥이 악인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친구들이나 욥이나 둘 다 동일하게 악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하고 있고, 그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욥이 말하는 악인의 어떠함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화의 주제가 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친구들의 신앙관, 가치관으로 볼 때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이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친구들은 욥의 형편은 하나님께 어떤 악을 행하였고, 그 결과 악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겼기에 지속적으로 악인이 하나님께 어떤 처벌을 받는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주장은 다릅니다. 앞서 한 번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이 다릅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자신이 의롭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욥의 행위가 그의 생애를 통틀어서 세상의 어떤 기준에도 위배된 것 없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욥도 어떤 나라에 속했을 것인데, 적국에서 보면 욥은 의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를 기준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친구들은 사람을(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의로운지 아닌지를 이야기하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욥이 마지막 변론으로서 친구들에게 악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주장하는 내용에 그것이 잘 드러나는데, 27장에 나오는 악인들은 행악자가 아닙니다. 사회규범이나 종교적으로 어떤 범법 행위를 해서 악한 자로 규정된 자들이라는 전제가 없이 단지 ‘자손 많고’, ‘돈 많고’, ‘의복 많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부질없게 만드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척결대상이기는 하겠지만 왜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평가 없이 단지 자손이나 돈이나 의복이 많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대적하신다는 것은 개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가치관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욥이 이렇게 악한 자를 규정하는 것은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육신의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돈과 의복과 자손은 모두 육신의 공로에 기인합니다. 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의복은 육신의 수고가 공로가 된 자들의 신분을 말함이고, 자손은 그 의가 다시 육신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육신의 공로를 의롭게 여기는 자들을 악한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들의 주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은 돈이 없고, 의복(신분)이 없고, 그것이 가친 있는 것이라는 의가 육신이 된 자식들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니 이유는 하나님께 행동으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공로의 평가 결과 악인이 되었고 그러면 돈도 의복도 자식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 친구들의 주장이고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것을 의로 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악으로 보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이 모이고, 신분이 높아지며, 그 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은혜와 복으로 여기겠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악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취하시면 늘어난 곡간을 보고 행복해 한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들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오늘도 성경을 행위로 지켜서 그 급부로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얻고자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수고들은 다 결국에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 하라고 사람에게 인생을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악한 자가 될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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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5-26장) 빌닷과의 세 번째 대화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6. 16:50 Writer : 김홍덕

빌닷의 세 번째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들 하나님과 같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욥은 “그런 소리를 누구에서 들은 것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무력화 시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과 같이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세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노력해도 의로워질 수 없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불의한 존재가 되거나.


문제는 욥기 안에 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오늘날 신앙인들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빌닷의 생각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노력할 뿐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 노력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연구하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생기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여주신 것조차 보여주신 행동과 말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고, 의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없고, 병자를 맘대로 고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음을 인함입니다.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 예수님과 같이 의로워지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성경의 행간과 의도를 모르고 문장 그대로를 지키려는 생각이나, 예수님의 기적을 따라 해야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금식하게하고, 정신 나간 것들이 치유의 은사 운운하면서 산에서 기도해주면서 돈 받아먹는 짓을 하게하며, 송구영신 예배 때 새 점치듯 성경구절 뽑기를 하게하며, 그것을 인하여 헌금하게 하는 짓거리들을 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그런 무식한 짓들을 하는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기에 그것을 이루고자 자기 육신이 동의하지 않는데, 때로는 가족이 걱정하는데도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명이라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이 보일지도 모르는데 생명이 없고 어두운지라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초식동물이 필연적으로 풀을 먹게 되듯 그 의롭지 못함을 인하여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율법적인 신앙이 빠지게 되거나, 아니면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영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욥기를 쓰면서 많이 강조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이 율법적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기도하라고 하시니 기도하고, 기뻐하라 하니 기쁨과 웃음을 연습까지 하면서 시늉을 내고, 감사하라고 하니 화가 나는 순간에도 억지로 감사할 명분을 찾아 마음이야 어떻든 말로 감사한 척 하는 노력들을 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이나 감사하라는 것이 신약에 또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이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무식하고 무지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율법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것입니다. 계대결혼을 가지고 와서 부활을 논한 사두개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성경을 모른다고 하신 것과 같이 오늘날 신약성경에 혹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려는 삶을 말씀대로 사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도 율법도 하나님도 인생의 의미도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문장 자체가 아닙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람의 말이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계명, 복음이라 여기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해야 어떤 반대급부가 있어 행하거나 행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율법입니다. 행위가 있어야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변호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그 말입니다.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행위는 존재가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면 그 존재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하시게 하시는 이가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이 존재하기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존재하게 하신 이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사람을 조성하신 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다는 것을 알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고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인즉 사람은 부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의롭고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위하여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도, 오늘날 사람은 노력할 뿐 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그래서 성경의 어떤 부분이라도 몸으로 지켜내려는 사람도, 아니면 지킬 것을 아예 포기한 사람도 모두 사람을 의롭지 못한 존재로 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은혜가 부족해서 사람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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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5-26장) 빌닷과의 세 번째 대화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5. 09:23 Writer : 김홍덕

이제 친구들과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빌닷과 세 번째 변론을 주고받고 나면 욥의 한탄 섞인 마지막 말이 이어지고 나면 욥기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후의 말과 하나님의 질문공세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욥이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과정으로 욥기는 전개 됩니다.


친구들과의 마지막 대화는 빌닷과의 대화입니다. 빌닷의 말은 아주 짧습니다. 이 빌닷의 말은 아주 짧고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 빌닷의 말은 오늘날 하나님을 신으로 믿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무지가 바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뿌리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을 해 보면 그 교회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벌떼처럼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보면 우리가 의롭게 될 것이 아니라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함인데 사람이 의롭다고 말하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 표현 자체가 불경스럽다고 합니다. 그 이유나 들어보고서 비난해도 충분한데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빌닷의 말과 같은 생각을 가진 오늘날의 대부분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단 하나의 성경말씀이라도 더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롭지 않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그것이 욥기에 나오는 친구들이 그렇게 욥의 책망하는 가치관입니다. 


행위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행위가 부족하면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행위가 부족하여 행여 벌이나 고난을 당할까 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은 노력하는 내내 의롭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행여 그 노력이 철저했다 해도 어느 한 순간 단 하나만 놓친다면 그 모든 것이 다 불의가 된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은 매우 겸손한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을 불의한 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는데 사람이 의롭지 않으면 하나님은 불의와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닷의 말이 가진 행간이 그렇고, 오늘 육신의 일이 여의치 않으면 교회에 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신앙 정체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는 결국 신앙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은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괴리가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장 먼저 의롭지 않다고 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아담이라는 것을 안다면 함부로 사람을 불의하게 여기지 못할 것인데, 어둡고 그런 것을 가늠할 생명이 없으므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의롭지 못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후속조치를 낳습니다. 하나는 필사적으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고, 또 하나는 포기하듯 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율법주의를 낳고 후자가 영지주의를 낳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유다서를 포스팅할 때 많이 언급했듯,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했고 뿌리가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 뿌리의 일면을 빌닷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생각은 깊이 뿌리를 잡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끊임없는 노력의 선로 위에 놓고 달리기를 채근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모두 율법주의입니다. 사람들은 이 율법이라는 것을 문장이나 어느 책에 쓰였는지를 가지고 구분하는데, 미안하지만 그 행위의 규례가 어디에서 왔던 그것을 해야만 의로워진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이야기하면 신약이라도, 심지어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개념조차도 다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성경보고, 방언을 하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 행위 자체가 기준이 아니고 그 행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구약이라도 예수가 그리스도며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면 복음이 되고,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해야 의로워진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특히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한다면 모두 율법인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이 부정하고 의롭지 못하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기도하고 해도,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자기 본성에 이끌려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하나님의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지금 없기에 구하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의롭지 못하고 부정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과 같이 그 모든 것이 온전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온전함, 그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고, 사람을 만들고 안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온전하고 의로운 존재라는 의미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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