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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5-26장) 빌닷과의 세 번째 대화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5. 09:23 Writer : 김홍덕

이제 친구들과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빌닷과 세 번째 변론을 주고받고 나면 욥의 한탄 섞인 마지막 말이 이어지고 나면 욥기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후의 말과 하나님의 질문공세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욥이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과정으로 욥기는 전개 됩니다.


친구들과의 마지막 대화는 빌닷과의 대화입니다. 빌닷의 말은 아주 짧습니다. 이 빌닷의 말은 아주 짧고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 빌닷의 말은 오늘날 하나님을 신으로 믿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무지가 바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뿌리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을 해 보면 그 교회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벌떼처럼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보면 우리가 의롭게 될 것이 아니라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함인데 사람이 의롭다고 말하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 표현 자체가 불경스럽다고 합니다. 그 이유나 들어보고서 비난해도 충분한데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빌닷의 말과 같은 생각을 가진 오늘날의 대부분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단 하나의 성경말씀이라도 더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롭지 않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그것이 욥기에 나오는 친구들이 그렇게 욥의 책망하는 가치관입니다. 


행위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행위가 부족하면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행위가 부족하여 행여 벌이나 고난을 당할까 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은 노력하는 내내 의롭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행여 그 노력이 철저했다 해도 어느 한 순간 단 하나만 놓친다면 그 모든 것이 다 불의가 된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은 매우 겸손한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을 불의한 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는데 사람이 의롭지 않으면 하나님은 불의와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닷의 말이 가진 행간이 그렇고, 오늘 육신의 일이 여의치 않으면 교회에 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신앙 정체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는 결국 신앙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은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괴리가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장 먼저 의롭지 않다고 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아담이라는 것을 안다면 함부로 사람을 불의하게 여기지 못할 것인데, 어둡고 그런 것을 가늠할 생명이 없으므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의롭지 못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후속조치를 낳습니다. 하나는 필사적으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고, 또 하나는 포기하듯 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율법주의를 낳고 후자가 영지주의를 낳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유다서를 포스팅할 때 많이 언급했듯,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했고 뿌리가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 뿌리의 일면을 빌닷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생각은 깊이 뿌리를 잡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끊임없는 노력의 선로 위에 놓고 달리기를 채근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모두 율법주의입니다. 사람들은 이 율법이라는 것을 문장이나 어느 책에 쓰였는지를 가지고 구분하는데, 미안하지만 그 행위의 규례가 어디에서 왔던 그것을 해야만 의로워진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이야기하면 신약이라도, 심지어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개념조차도 다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성경보고, 방언을 하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 행위 자체가 기준이 아니고 그 행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구약이라도 예수가 그리스도며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면 복음이 되고,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해야 의로워진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특히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한다면 모두 율법인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이 부정하고 의롭지 못하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기도하고 해도,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자기 본성에 이끌려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하나님의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지금 없기에 구하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의롭지 못하고 부정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과 같이 그 모든 것이 온전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온전함, 그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고, 사람을 만들고 안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온전하고 의로운 존재라는 의미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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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세 번째 말에서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고 말하며 욥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 말합니다. 그에 대하여 욥은 오히려 악인들이 평안하니 하나님께서 그 벌하는 때를 정하지 않으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욥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자신이 알게 된다면 그 앞에서 그것을 호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 친구들과 욥의 대화를 돌아보면 하나님께 무엇을 아뢰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람의 모든 행사를 다 아시는 분이라는 것은 대화의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일을 말하려 하나 어디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욥 23:3-5)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곧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지전능은 기본적인 성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떤 장소나 자리가 필요하다고 거의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이 말하는 이 자리는 물리적인 어떤 지점이나 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숨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와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이미 숨은 아담을 대화할 수 있을 만큼 찾았는데 왜 갑자기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셨을까? 그것은 아담이 어느 나무, 어느 숲에 숨었는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정체성, 곧 사람이 하나님이 목적한 본분을 다하고 있느냐는 것을 물으신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어차피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욥이 발견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계신 장소(지점)이 아닙니다. 이는 앞서 욥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엘리바스의 말에 답하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한다고 한 것은 악한 자들이 지계(경계)를 자기 유리하게 옮기고 남의 양 떼를 빼앗고, 고아의 나귀를 가져가고, 과부의 소를 저당 잡고 살아도 그 자식까지 먹을 걱정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욥은 자신의 길은 하나님이 아시기에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자들이 세상에서 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만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자신의 형편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함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며, 이 고난은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자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나고 나면 자신이 정금 같이 나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욥은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생은 고난이라 여기며 그 고난을 하나님께서 제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성경에 적힌 대로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하면 자신이 세상의 가치로 귀한 사람, 곧 성공하고 평안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금이라는 것은 귀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면 그 귀함을 가늠하는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한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렇고, 사탄이 그렇고, 오늘날 교회에 가서 밥 달라, 돈 달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준에 의한 정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정금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이 계신 자리를 아는 것, 그리고 왜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평안하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정금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금 같이 귀한 하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행위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바로 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겪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며, 그 끝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정금과 같이 될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고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자리라고 욥은 생각하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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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의 대화가 고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2회전까지 마쳤지만 서로의 의견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세 친구와 욥의 대화가 이렇게 고착 상태에 빠진 것은 일면 둘 다 온전하고 확실한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후에 엘리후가 말을 할 때에는 욥도, 친구들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런 중에 엘리바스는 22장에서 욥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한껏 높입니다. 말 그대로 권면이 아니라 비난에 가깝습니다. 욥이 형제의 물건을 압류하고 헐벗은 사람의 옷을 벗기고, 갈한 자에게 물도 주지 않았고,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벌을 받는 것이라고 욥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에 대하여 욥의 대답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바스와 욥이 생각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의 차이이고, 욥이 말하는 하나님이 계신 곳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의도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도가 내용이고 언어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으로서 가진 마음이나 필요가 동일하기 때문에 다른 언어 속에도 우리와 같은 의미의 단어나 문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말이라는 것은 언어가 본질이 아니라 의도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을 보는 것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보면 사람은 누구라도 살면서 ‘항상’이라는 빈도부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행위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라도.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으면 이것은 정말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이 그렇게 항상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실 것이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만드셨는데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져야 효도가 되는 것이 아니듯.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문자 그대로 성경을 지켜보려 합니다. 그것은 사실 성경 말씀이 엄중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지켜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을 얻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신념으로 성경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세 친구들이 가진 두려움이고, 욥의 기도에서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한 그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더 확장해보면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그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은 단지 두려움을 떨치려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나타난 예수님을 보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기에 그러면 육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행간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의도와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정욕을 벗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져야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다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엘리바스와 욥이 가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견해의 차이도 그렇습니다. 욥의 형편을 두고 엘리바스는 욥이 가난한 자를 외면한 것과 같이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고, 자기 형편이 아주 나쁜 상황 중에 있는 욥은 자기 형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하는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가난한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삶의 목적임을 받아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있다면 구제할 때 구제하고, 기도할 때 기도하는 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그 문자 자체나 계명으로 구체화된 행동이나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계명을 주신 본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그 문자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엘리바스와 욥의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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