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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0. 16:46 Writer : 김홍덕

욥기는 많은 경우 소설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욥기의 내용은 알고 보면 신앙의 고급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성경은 초신자에서부터 사도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의미를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출애굽의 과정으로 비한다면 가나안 땅 이후의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이 보이고 있는 태도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말과 상황을 잘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이전 글에서 많이 설명한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신을 찾기 시작하는 것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육신의 평안을 인생의 목적과 소망으로 삼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평안한 가운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돈이나 권력을 가지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이라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육신이 평안한 것이 복이라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육신이 부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이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자신이 추구하는 육신이 복을 받기에 합당한 행실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성경이나 도덕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보편적인 사람들의 가치관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의로워지려고 한다는 것은 의롭지 않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사람들을 눈이 어둡다고 하고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어두운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운명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평안을 추구하는 그 육신은 살아갈수록 평안에서 멀어지는 노쇠화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감가상각을 당하는 것과 같이. 이것이 창세 이래로 모든 인생이 겪고 있는 운명인데 그 운명이 말하는 것은 듣지 않고 사력을 다해 평안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가진 육신의 삶은 소비재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은 보존이 목적이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 한 번 살고 마는 것은 마치 종이컵과 같은 일회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란 육신을 가진 존재는 무엇인지 모를 수는 있지만 분명히 존재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위하여 소비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사람들이 성경이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하는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을 선이라고 여기는 자기 생각, 자기 의로움에 매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고 그것을 하나님 또는 신으로부터 보장 받으려니 그 육신을 정결하게 하려는 노력에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밥 달라, 돈 달라 기도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도라 하니 기도하고 기뻐하라고 하니 화 날 때 그 말씀이 생각나서 참으며 기뻐하는 신앙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같은 부류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 욥의 마음과 말과 하나님이 욥에게 한 질문이나 엘리후의 말이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 이전에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이 먼저 있어양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이기도 한데, 욥기를 보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면 먼저 그 세례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던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욥기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고 그 의미를 모르겠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욥의 마지막 변론을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의롭게 여길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론 근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은 자유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의롭다고 주장하려면 인생이 자신이 의롭다는 확신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수많은 설교자들이 한 쪽에서는 자신들도 인간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거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다가 강단에 서서 로마서라도 설교할 때는 태연하게 사람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사기입니다. 자신도 의롭지 못하면서 사람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가? 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야 성경이 그리 말씀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람이 의로워질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행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에 한계가 있기도 하겠지만 절대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릇과 같이 만드셨습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그 안에 담긴 것을 다시 내어 놓는 존재입니다. 사람도 심령에 무엇을 담으면 그것을 나타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무엇을 담을지 그 선택을 사람이 스스로 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질그릇이라고 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로움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면서 한편으로 행함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담고 있으면 그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행동을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나 가치를 그 안에 담고 있으면 그것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행동은 중심에 있는 것의 표현이고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롭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그와 같이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기에 그것이 자신을 의롭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로마서가 쓰이기 수 천 년 전에 이미 욥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욥이 왜 하나님을 원망했을까? 하는 그것이 욥기의 핵심적인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알고 욥의 원망을 알려면 먼저 자신이 의롭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욥기를 기록한 의도 중의 하나가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욥기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욥이 왜 하나님을 원망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이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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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9. 18:34 Writer : 김홍덕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지혜와 명철을 설명하는 욥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욥기를 고난을 이기면 복이 온다는 말씀으로만 압니다. 그것은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기는 그리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의인이며, 친구들에게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지 설교를 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인데 갑자기 상상도 안 되는 고난에 빠지게 되고, 그것을 본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훈계를 가장한 책망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욥기는 그냥 말 그대로 소설일 뿐입니다.


마치 영화 스포일러를 알고 있듯 무심히 예수님 오신 다음 세대를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또 욥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연구하는 신학이 정의한 대로 욥기를 정의내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곤고한 것이라 여기는 자신의 그릇된 인생관으로 욥기를 채색하여 이 육신의 곤고함이 끝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욥기를 매조지하려는 것은 아주 어두운 것입니다.


왜 멀쩡히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고 있는 욥을 성경을 대하는 모든 사람이 꺼려하는 사탄의 요구에 따라 시험을 받게 넘겨주었는지, 또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하면서 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기를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세 친구들의 말이 일면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인 것 같아서 액자로 벽에 걸어 놓기까지 하는 말인데 그것을 왜 욥은 수긍하지 않는지, 이런 것이 궁금하지 않다면 단지 욥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표현이 다소 상이하고, 또 상이한 만큼 의미하는 바가 좀 다를 수는 있지만 욥의 마지막 변론은 하나님께서 행위로 의로워지려하지 않는 자들이 한 시절 겪는 곤고함에 대하여 마무리하듯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욥의 죄악이 아니라 무지에 관한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행위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시절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욥을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그 많은 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자신이 의롭다는 그 관점에서 이 고난을 볼 수 있는 영적 단계가 아니라면 이 욥기는 완전히 딴나라 소설입니다. 물론 문자만 놓고 보면 고난을 참고 이기면 복이 온다가 되겠지만 그것은 북한이 인민 민주주의라며 민주주의를 인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을 단 한 번도 굽힌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엘리후도 그것에 대하여 별 언급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의롭다는 욥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는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엘리후와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또 욥과 같이 고난을 견뎌서 복을 받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엘리후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진 욥의 심정을 알아야 할 것이고, 적어도 그것을 알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확신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확신이 없다는 욥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욥의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으며, 엘리후와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책망을 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욥의 친구들과 같이 자신에게 어떤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반사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뭘 잘못했지?’를 돌아봅니다. 즉 적어도 그 순간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어떤 <행위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은 결국 율법주의 신앙이거나 영지주의적인 신앙이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듯 그 출발이 인생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이므로 어떻게든 의로운 하나님과 수준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이라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마음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듯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켜내려 노력하고, 어떤 이들은 그런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경험적 확신을 가지고 육신은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는 영지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고 자신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로워지려는 시도가 실패서도 아니고, 행위로 큰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욥이 겪는 고난과 의문과 갈등은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도 육신의 삶은 여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마음과 욥의 말과 욥의 항변과 욥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과 엘리후의 책망이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려면 적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 아니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확신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하면 의로워지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니 기도하자는 것이나 성경을 보고 봉사를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은 생각들도 모두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어쩌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욥기가 단지 고난을 이기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각인되고 있는 것은 그런 빈틈을 인함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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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18. 08:52 Writer : 김홍덕

지혜와 명철


욥과 친구들의 대화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혜의 논쟁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분명하고 잘 알고 있는지를 다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지혜와 명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이치를 아는 것이고, 명철은 그 분명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누가 하나님에 대하여 더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친구들은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논하고 있고, 욥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논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몰골을 보니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는 바탕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복과 벌을 주신다고 일반화하고 이것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 위하여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면 그것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대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행함에 관한 것입니다. 욥은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말이 잠언에 나오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욥은 28장에서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가치를 먼저 이야기 합니다. 금이나 보석은 사람들이 엄청난 수고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한 수고로 하나님의 지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행함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상황의 판단과 결정의 현명함으로 이해합니다. 그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 육신의 평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평안하게 하는 것일수록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결국 어떤 수고를 하는지를 결정하는 선택을 잘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전지전능하시니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한 모범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기도하고 결정하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란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나 소나 다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의는 그 만드신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또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살게 하신 뜻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과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평안을 얻으려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더 많고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어떤 것을, 무엇을 드려야 하는지를 아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찾아가서 묻고, 산에 있는 기도원에 안수 받으러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왼나사를 어떻게 오른쪽으로 넣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그 법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려 넣는 법을 십년, 아니 백년을 연구한 박사라고 해도 오른쪽으로 돌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관습으로 했을 때 되지 않으니 반대로 돌리는 어린아이보다 나사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공로나 소유의 얼마를 드리느냐에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관심사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어떤 존재로서 만나려고 하는지에 관심이 있는데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내가 원하는 금도끼 은도끼를 주시는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살게 하신 이유입니다. 또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 세상에 많은 일들이 있고, 또 천하 만물이 사람에게 인식되고 영향을 주고받게 하신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를 지으시고 살게 하신 목적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두운 방에 빛이 없어서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목적대로 사용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부딪혀서 다치는 것과 같이 세상을 살다가, 빛이 들어오면 방에 놓은 모든 물건들을 그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왜 이러냐?’ 묻고 반문하던 그 모든 것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의문과 고난과 이치를 모두 알게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와 명철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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