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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과 소발은 두 번째 대화에서 욥의 말은 자신들을 짐승처럼 여기고 부정하게 여기며 어리석은 자로 여기며 모욕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이 그렇게 자신의 상황과 관련하여 분해한다고 해서 땅이 버려지거나 바위가 옮겨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빌닷이 말하기도 합니다. 즉 욥의 말로 자신의 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욥은 오히려 친구들의 말이 자신을 괴롭게 하고 꾸짖고 학대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자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행여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문제이지 친구들 너희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대적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친구들은 욥이 악하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욥의 악은 욥의 형편으로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로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자들의 공통적인 말이며, 자기들의 경험으로 볼 때 확실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욥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으니 욥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때로 친구가 자신과 같이 곤고하면 위로할 것이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심판하듯 책망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은 하나님께 죄가 없고 단지 이 상황은 하찮은 자신을 괜히 대적하심을 인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빌닷과 소발의 말과 욥의 말에서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는데, 빌닷과 소발은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욥은 악인이 오히려 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행위, 곧 범죄를 악한 것이라 하고 있고, 욥은 악이란 친구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욥은 ‘악’은 하나님을 행위를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시는 신으로 보는 안목과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즉 행위가 어떠했는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아주 첨예한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죄나 악은 윤리적 기준과 사회의 법률적 범주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하나님이 의와 선으로 여기시는 것도 행동에 기반을 두고 판단을 합니다. 문제는 행동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심지어 교파에 따라 달라지기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 선과 악의 기준이 지극히 사람의 주관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를 사하였다.”고 하심을 두고 유대인들이 속으로 ‘참담하다.’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악한 생각>이라고 하신 것과 부자 청년이 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을 때 책망하신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모든 다툼이 생기고 죄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가진 여러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교파가 갈렸다는 그 하나만 보아도 사람들 자기 맘대로 선과 악을 가늠하는 악함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사람이 스스로 가졌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세상의 윤리와 사회 법률적 프레임 안에서 선과 악을 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행함을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같이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하려 하는 것이 원론적인 율법 신앙이고 행함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행하는 동력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여 힘을 얻어서 하게 되면 그것은 행함이 아니라고 자기 최면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최면을 학문으로 만든 것이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가진 악에 대한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생각은 사실 별것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말들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사람을 향해서 천벌(天罰)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로 판단하신다는 생각의 가장 대표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이 욥의 친구들의 생각이고, 선과 악의 기준이며,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가진 신앙의 근간입니다.


친구들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욥의 상황은 한 마디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욥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그러면 막 살아도 되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글에서 많이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악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서로의 말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욥과 친구들 각자가 가진 기준으로 악한 사람들의 행사에 대한 견해는 사뭇 다릅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악하다고 여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결국은 패망이라고 생각하고 욥에게 말을 합니다. 이는 다분히 욥의 형편이 그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욥은 21장에서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친구들이 말하듯 세상의 윤리나 사회 법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보고 판단하신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잘 된다는 의미라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경험해 본 사람은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하나님께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힘들게 지키는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보면, 그 신앙이 얼마나 마약과 같은 것이고 덧없는 것인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고서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고, 그것을 은혜라 여기며 설교와 간증을 하면서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추종하며 매몰되는 것을 보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이 별다른 저항 없이 세상에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정말로 괴로운 일입니다. 욥이 괴롭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욥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살피시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온전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박탈감을 준다고 욥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욥의 이 한탄들을 알려면 적어도 욥과 같이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은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 성경대로 기도하고 봉사한다고 의롭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야 알 수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그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것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얼마가지 않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알기까지의 시간은 욥이 한탄하듯 괴로운 시절이고 엘리후의 말처럼 죄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영을 온전히 알게 되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욥이 가진 안목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정체성은 존재의 하나님으로 보면서 정작 그 가치는 세상의 가치를 척도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 안목의 가치 척도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알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고 세상에 비길 것 없는 존귀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함을 아는 만큼 세상의 사람들이 그것을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 비길 것 없는 그 귀한 하나님의 의가 세상의 가치로 보잘 것 없고 오히려 종과 죄인이 되는 것이라는 놀라운 반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반전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 하나님의 성품과 그 품속에 있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삶이 무엇인지 보이시는 천하보다 귀한 것을 보이셨는데, 놀랍게도 그 귀함의 실체는 다름 아닌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고 종이 되고 천한 자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경영과 의를 알지 못하기에 한탄하는 것입니다.


이 반전은 사실 말이 쉽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귀함이 바로 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사수하기 위한 여정일지 모릅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 앞에 펼쳐진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욥이 악인이 형통하다고 한 그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마당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영이고 사람을 향한 의(목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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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포도원 비유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3. 11. 20:23 Writer : 김홍덕

마가복음 12장에는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갔고 때가 되어 포도원의 소출을 받고자 종을 보내니 때리고 죽이었기에 아들을 보내면 될 것이라 하여 아들을 보내었더니 그 마저도 죽였다는 내용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1장과 누가복음 20장에도 나오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여느 비유에 비하여 쉽게 보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같은 경우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께서 별도로 풀이까지 해 주셨던 것에 비하면 이 비유는 듣고 있던 유대인들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 쉬운 비유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영화의 스포일러, 즉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면 내용이 쉽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메시아라는 것을 다 알고서 성경을 봅니다. 그래서 그것에 기초하여 성경을 보기만 해도 많은 부분이 이해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하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우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들었으니 이 비유는 상당히 어려운 비유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오늘날 소위 신학을 했다는 사람들에 비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자신이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면서도 그 행동이 기도나 성경 보는 것이라서 율법 신앙이 아니라고 무덤에 회칠하듯 착각하고 있으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포도원 비유는 단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냈는데 유대인들이 그 아들을 죽여 버렸다는 의미의 한정된 내용이 아닙니다. 또 종들이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과 같은 부연 설명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중에 포도원 주인이 왔을 때 항거도 하지 못하고 쫓겨날 정도의 존재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심산이었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포도원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것은 ‘왜 포도원인가?’ 하는 것과 ‘농부들은 왜 소출을 주지 않고 오히려 종과 아들을 죽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난데없이 건축자의 버린 돌에 관한 말씀 인용이 이 포도원 비유에 왜 끼여 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하고 의문스러운 것입니다. 혹시 이런 것에 대하여 설교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참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알아들었지만 오늘날 신학을 했다는 사람들도 이것을 모릅니다. 모르니 설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포도라는 것은 또한 짓이겨지고 상할수록 더 가치가 올라가는 과일입니다. 포도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을 지은 포도원 주인은 포도를 소출로 얻겠다는 것이니 결국은 그리스도를 얻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사람에게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오는 것을 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바라심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만드신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상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시고자 세상 곧 포도원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이 농부에게 포도원을 맡기듯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그 삶을 맡기신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가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선악을 판단하며 살 것인지에 대하여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삶의 소출을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 있는지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지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밥을 주었는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그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이 그 소출을 구하러 보낸 종을 잡아서 때리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랬던 것은 포도원 주인이 구하는 소출과 그들이 생산한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건축자의 버린 돌이 성전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농부 곧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한 소출이 있었는데 주인이 다른 것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건축자가 볼 때는 전혀 쓸모없어서 버린 돌이 되었는데, 성전의 의와 가치로는 그 돌이 주춧돌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은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이 소출에 대하여 가진 가치관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드리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 맞추어 기도하는 정성, 새 돈으로 헌금하는 정성, 억지로 일어나서 봉사하는 것을 포도원의 소출로 여겼는데 포도원 주인은 그저 포도만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고 금식하며 거룩한 행세를 하고 다니며 길에 서서 기도하고 성경을 쓰고 읽고 묵상하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출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공로를 쌓는 가치관으로 보니 예수님이란 돌은 버리는 것이 마땅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수고와 공로나 제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옳다는 것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섬기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요 하나님 아들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뜻하신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금식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고(사실은 육신의 것을 구함) 성경보고(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고 공부하는 것)을 포도원의 소출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소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그것을 구하러 온 종과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이때껏 포도원 주인을 위하여 온 것을 가치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건축자와 성전의 안목과의 차이였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교회에서 경건해야 하고, 예배는 사람들이 정한 격식에 따라 드려야 하며,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열심히 해야 사람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단번에 ‘신학도 안 한 것이 어디?’라고 하거나 ‘네가 목사냐?’와 같은 반발을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이때까지 쌓은 공로가 무력화 되는 것에 크게 반발을 합니다. 소출을 구하는 종과 아들을 죽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듯 이 포도원의 비유는 세상을 만드신 창세기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일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놀라운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그 명제를 문장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이 비유를 보니 알 것 같다고 쉽게 아는 듯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해외 관광지 사진을 보고 아는 척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알아들은 유대인보다 절대적인 무지 상태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자 그리스도의 본성이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포도원의 소출을 삼으려 한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 행한다고 하니 옛날 유대인들 이야기인줄로만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그 말이 얼마나 공로주의적인 것인지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바로 그런 소출을 내는 농부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하는 하나님의 종과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포도원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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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에는 바디매오라는 소경이 나옵니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 20장과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에는 모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기적은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기자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이 기적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을 심도 있게 시작하신 변화산 사건 이후에 나오는 몇 안 되는 기적 중의 하나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자 중에 거의 유일하게 고침 받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특히 고침을 받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것입니다. 따라나선 예수님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을 향하여 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러 가는 마지막 길인데 그 길을 따라 나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면 그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마당에 이 바디매오는 죽으러 가는 예수님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자 중에 거의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라 나선 바디매오


특히 바디매오가 따라나선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가 아닌 십자가의 자리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2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앉아 있었던 곳이 바로 ‘길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목적을 가지고 육신의 눈을 뜨고 걸아가고 있는 길에서 길을 가지 않고 길가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디매오는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가지 못했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디매오가 평생 길가에 앉아 있었던 것도 아닐 테고.


길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곳입니다. 육신으로 소경이 아닌 사람들은 각자 육신의 필요에 따라 목적지를 정하고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멀쩡하다고 인생이라는 여정의 목적을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기적도 예수님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모든 소경 같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심입니다.


이 바디매오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눈을 뜬 사람들은 길을 갑니다. 하지만 소경인 바디매오는 길을 갈 수 없기에 길가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눈을 뜬 사람들은 육신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길을 가기는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모릅니다. 반면에 바디매오는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아 길을 가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예수님을 좇아갑니다. 그게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그가 보지 못한다고 여긴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길과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모릅니다. 말 그대로 태어난 김에 살면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신을 찾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자기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는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모두 소경인 것입니다. 소경이 자기 길을 가니 이곳저곳에 부딪힙니다. 그게 인생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인생의 문제들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만 알면 삶이 평안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으면 바디매오와 같이 앉아 있는 것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도 모르면서 자기가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정해서 동분서주하기에 인생이 곤고해지는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힘들다고 하나님께 인생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을 모르면 그 자리에 서야 합니다. 길이 아닌 길가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한 바른 길을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기 생각대로 길을 가듯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바디매오와 같이 앉아 있어야…



그렇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서 바디매오가 멈춰 서 있는 길이 소란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그랬더니 사람들이 답하기를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라고 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눈을 뜨고 육신의 목적지를 향해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보이지 않아 가던 길을 멈추고 있는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자기 의를 가지고 육신의 정욕을 좇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천한 나사렛 사람이었지만, 인생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왕이요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서 자기 육신이 바라는 육신의 정욕을 좇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천한 <나사렛 사람>이지만 인생의 목적을 구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왕이요 메시아>



이 바디매오의 모습은 정말로 충격적인 것입니다.(아마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맹인인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말해 주었는데 보지도 못하는 바디매오는 눈뜬 사람들의 말과 달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길에서 소리친다고 그게 얼마나 사끄럽겠습니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한 것은 시끄러워서라기보다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는 계속 그렇게 외쳤습니다. 맹인이 눈뜬 사람들에게 맞선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는 자기 안에 있는 양심에 따라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눈도 보이지 않는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뛰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겉옷도 버려두고서. 남들은 하찮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려고 맹인이 뛰었다는 것입니다.


맹인이 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데 뭘 믿고 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디매오는 뛰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것은 너무 놀랍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또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심지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자체가 그것을 방증) 어디선가 접한 온전해 보이는 복음을 향하여 가는 것을 그렇게 조심하다 일어서지도 못하는데, 맹인인 바디매오는 엄청난 위험과, 살면서 맹인으로서 급하게 움직이면서 경험한 온갖 아픔의 기억을 뒤로하고 뛰어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인생의 목적을 알고 예수님을 바로 믿고자 한다면 소경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가는 것 같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그러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알겠다 보게 해 주겠다.”가 아니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여기는 예수님을 인생의 목적을 몰라 길가에 앉아 있는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여기고 아직 보이지 않기에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서 메시아가 알려주는 인생의 목적을 보기 원한다고 했더니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 바디메오가 보고자 한 것은 육신의 눈이라기보다 다윗의 자손을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 인생의 목적이 사람들은 천하게 여기며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다윗의 자손에게 있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에 빠진 것은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 육신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에 의지하여 육신의 정욕을 좋아 육신의 안목으로 자기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바로 보여주시려 오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예수님을 보는 것이 길을 갈 수 있는 광명을 찾는 유일한 것이라고 믿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야말로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보고자 한 것은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천히 여기는 예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믿고 보고자 한 것이고 그 믿음이 인생의 목적을 보게 하는 구원으로 이끈 것



그러자 바디매오는 그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이때까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아니 보이지 않았기에 길을 가지 못하고 길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 인생의 목적인 예수님을 보았기에 그 예수님을 따라서 길을 간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이 영광이라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의 일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전까지 보이신 모든 기적의 목적이 함축된 놀라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이 글을 본다고 소경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께 인생의 목적을 보지 못하기에 소경이 온갖 것에 부딪히듯 겪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과연 소경인 주제에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달려 나간 그 믿음과 용기가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세상의 임금이 되어 영광을 누리면 그 영광을 누릴 생각을 하고 있기에 죽으러 간다는 말씀을 이해조차 못하던 시점에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을 따라 가는 바디매오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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