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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5장)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7. 17:03 Writer : 김홍덕

욥기 15장에서 21장까지는 세 친구들과의 변론 2라운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반적인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없기는 한데 2라운드는 약간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친구들은 욥의 말을 자신들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표현들을 보면


15장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말은 여러 지혜자들에게 검증된 것인데도 욥이 듣지 않는다는 의미의 말들을 하고 있고,

18장에서 빌닷은 욥의 말이 자신들을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취급하는 말들이라고 하고 있고,

20장에서 소발은 욥의 말이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즉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2라운드를 시작하면서 엘리바스는 욥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특정된 대상을 향한 주장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행위의 온전함을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죄로 여기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 친구들은 행위가 죄를 판단하는 대상이 되고, 죄를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에서 어떤 모습인가에 달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진 생각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것을 공부해서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관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 것을 자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있는데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과 같은 것은 분명히 그 당시 사회적인 법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자기 임의로 만든 법과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찬송 받으실 자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옷을 찢을 정도로 분해했는데 그것과 욥의 친구들의 모습이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영광과 평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 목적에 의거한 선과 악의 기준으로 죄를 판단합니다. 육신의 영광과 평안을 추구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어떤 행위가 판단의 대상이 되고, 영광과 평안의 기준이 세상에서 왔기에 판단의 기준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죄를 판단합니다. 그 기준을 육신으로 잘 지켜내어야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무시하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크고 강한 것이 영광이 되고, 육신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평안을 추구하는 것에 누구라도 다 동의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규모에 의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리의 진정성이 아니라 다수결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확신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세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다수결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엘리바스의 말에 욥은 자신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지만 욥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 <큰 교회>를 선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팔린 물건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렇듯 물론 세상에선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목적이나 이유나 혹은 진리나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큰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은 진리가 규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상관이 있는데, 확신은 없지만 다들 같이 가면서 서로 ‘이것이 진리’라며 위로하며 가는데 뭔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아니라고 말할 뿐 아니라 모두들 높아지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종과 같이 섬기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가진 믿음에 회의가 들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성경에 대하여 분명한 것이 있다면 공부를 그칠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공부하고 있고, ‘정말로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구나!’라는 분명한 깨달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QT다 새벽기도회다 부흥회다 다닐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알고 있으면 그 배우고 확신하는 것에 거하고, 가서 그것대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에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마치 다들 숙제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숙제 다 끝내고 노는 사람이 미운 것 같은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이후에 엘리후가 책망하기를 욥의 말에 제대로 대답도 못한다고 한 것을 보면 욥의 친구들도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다수결에 의지하고 있고, “세상을 봐라.”, “죄를 짓고 망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와 같이 자기 안에 있어 확신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엘리바스의 말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자신들이 확신은 없지만 다수결에 의지하고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욥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자신들의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조명하는 다수결의 신앙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의가 그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옷을 찢은 유대인이나, 욥의 말을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이라 듣는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은 괜히 하나님의 의를 좇아간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분명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분명한 것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떠함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의 판단 대상이 아님을 이야기 할 때 엘리바스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분명한 것이 없는 사람들, 그저 남들 가니 나도 큰 문으로 가면 그것이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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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3-14장) 욥의 기도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5. 11:48 Writer : 김홍덕

욥의 기도에는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라 여기는 욥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곤고해진 욥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친구와 달리 온전히 알았음에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가져온 곤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생각은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를 완전히 알지 못한 세월의 모습입니다. 이건 말 자체로는 참 부족한 단계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 안에서만 봐도 세 친구와는 확연히 다른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안목이 세 친구들의 안목과 같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욥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허물이라기보다 오히려 큰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 나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욥에게 이 시험을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사탄과 그냥 장난삼아 욥을 대하신 것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은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괜히 자신을 곤고하게 하신다고 줄곧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고난을 그치게 해 달라고, 또 이 고난을 인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께 뭔가를 바라기에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행위를 드리려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안다는 것은 사실 욥의 고난이 그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욥이 지금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을 위해서 육신으로 수고하고 힘든 일을 신념으로 감당하여 그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투자의 결과 자신이 바라는 평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안다고 해서 육신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겪는 것이 그저 힘들고, 그러다보니 육신의 장막을 벗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욥의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동물들의 특성들을 일일이 열거하시면서 욥에게 왜 그런 특성을 가졌는지 아느냐고 물으신 것은 육체를 가진 존재들이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표현된 형식이라는 것을 철저히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이외의 모든 동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모두 ‘그대로 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이란 하나님의 의와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도 존재의 목적으로만 본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육신을 주셨지만, 특이하게도 사람은 그대로 된 것이 아니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짐승은 아담이 이름을 붙이면 되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은 그 스스로가 선택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그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유일하게 선악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에서 보면 스스로 무엇을 옳다고 여기고 그것을 취할 수 있는 여지를 두셨습니다. 이는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대로 만들어진 모든 존재들을 보면서, 또 하나님이 주신 사고와 생각과 의지로서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와 또 인생을 주신 목적을 생각하게 하시고 그것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삶의 의미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그 경영을 보고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인식할 수 있게 하시고 그것에 순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 이외의 존재가 하나님을 알도록 애쓰신다는 말은 없지만 오직 사람은 그 스스로가 하나님의 의를 순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엘리후)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한없는 한계를 느끼고 육신이 소진되어가는 것을 힘들어하지만 그것이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육신이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가진 생각에서도 그것이 나타나는데, 육신이 평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욥은 육신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육신의 수고를 드려서 육신의 평안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육신을 가진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이 육신이 수고하고, 사람들이 고난이라 여기는 곤고함을 육신에 지니고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다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욥이 마지막에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다.’고 고백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욥의 기도는 그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엘리후를 통해서 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그 기도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우선은 하나님을 행위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참 문제이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교회가고 성경 보는 것과 같은 것은 행위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것을 언제까지 얼마나 해야 온전해질 것인지를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런 신앙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찾고서 처음에는 욥이 호사를 누렸듯 기뻤다가 욥의 기도와 같이 이 육신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더 깊이 알기 이전에 ‘하나님은 바로 알았는데 어쩌란 말인가?’라는 의문의 세월을 살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욥이 겪은 고난의 본질이고, 그 고난의 끝에는 말 그대로 정금 같이 되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온전한 목적으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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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3-14장) 욥의 기도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 09:51 Writer : 김홍덕

욥의 기도 전반에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인생인데 그냥 죽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욥의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하찮은 자신에게 손을 대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것과 세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해 주시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될 것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욥의 기도와 말 속에 있는 기본적인 생각은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육신이 겪는 고통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이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고,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께 주신 복 혹은 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자신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고난을 받는 것이라 여기면 욥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치관은 수고한 만큼 얻는다는 생각, 신이나 하늘이라 총칭되는 사람 이상의 존재가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한다는 생각, 그리고 크고 많은 것이 위대한 것이고 복을 받은 것이며, 신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하고 정직하게 사는데도 인생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 아니라 어떤 신이라도 다 원망합니다. 하늘 향해 소리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나 그의 친구들이 가진 안목과 가치관이 의롭고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적어도 자신의 행위로 인한 벌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기반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자신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인함이라기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과 달리 하나님을 그렇게 바로 안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데도 육신의 삶은 언제나 그랬듯이 힘들고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그 곤고함을 욥의 고난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를 시작할 때에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의로움을 폄훼한 명분은 세상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욥이 부유하고 평안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욥도 하나님도 서로가 아는 바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의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육신을 보전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로 인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욥은 육신이 곤고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되니 욥은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데 당하는 고난은 전혀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괜히 자신에게 힘을 빼시는 것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죽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욥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육신의 삶이 겪는 모든 것의 이유를 알게 하시고자 하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욥이 기도하는 마음이나 친구들에게 반론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아직 명확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기 후반에 수많은 짐승들을 들먹이면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것도 생각해보면 그 많은 육신을 가진 존재들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욥이 알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근원적으로 알아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아들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겠습니까?


즉 욥이 겪는 모든 고난의 뿌리는 육신의 존재 목적에 있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고난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니 그 고난이 목적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이 친구들의 말과 같이 행위로 죄를 범한 결과가 아니라 엘리후가 말한 것과 같이 생명의 빛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도 육신이 평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참 어이없는 일인데 그 모든 것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지금 욥의 기도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에 인생이 곤고하게 느껴지는 욥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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