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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13장)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24. 10:59 Writer : 김홍덕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담대함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것을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당당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구는 것이 없습니다.


행위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신 하나님께 가서 자기 육신의 행위로 성경을 지켰으니 자신이 바라는 것을 내어 놓으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통은 그런 것을 뻔뻔함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두려워하기에 공손한 말로서 구하니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가지고 겸손히 구는 것이라 여기지만 말투가 공손해서 공손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합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욥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의로우므로 자신의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고 그 급부로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이 행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지 않아서 자신이 해를 당하지나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그것에 볼모가 되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상황이 하나님 앞에 뭔지는 모르지만 죄를 범한(DO) 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뭔가 잘못하면 저런 꼴을 당한다는 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함이 아니라, 자신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과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행위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경외함은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를 인하여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기에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책임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책임 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온전히 알아가는 것은 돌이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 행동 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는 살아가면서 깨달을 때 마다 자신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그렇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앞서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생각함에 있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있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 또한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한 말 중에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쟁론하려느냐?”(13:8)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이 나서서 변호를 하려고 하느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변호가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키거나 돌봐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사람이 지켜야할 이유가 없고, 세상도 사람이 지키려고 할 이유가 없으며, 성경도 신학도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안에서 표현되는 삶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숙제를 하지 않고 등교해서 선생님을 마주한 학생과 같이 하나님 앞에 당당하지 못한 것은 결국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인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하실까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나 세상을 지키려하지 않고 결과에 순종할 것입니다. 즉 결과에 순종하는 것이 싫으니 그 결과를 가공하려 하고 그 결과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뭔가 자꾸 하나님께 드리고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과 같이 그 결과가 무엇이라도 책임지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담대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사소한 결정 하나도 스스로 하지 못해서 “목사님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라며 점집을 찾아서 묻듯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담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소비되고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이 인생의 참 목적이자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이 어떻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아는데, 그래서 청지기임을 아는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달리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그 삶이 더 온전하고,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실 때 뜻하신 것을 하나라도 더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드리는 것이 우리가 살면서 하는 유일한 근심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 말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고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외면하고 하나님께 자기 행위를 드리고 자기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뻔뻔함으로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여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는 것과도 또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그것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삶을 산다면 자기 삶에 일어나는 일과 결과를 모두 순종하며 사는 것인데 삶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당당하게 말하겠다는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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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13장)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23. 14:21 Writer : 김홍덕

욥이 당한 고난은 잘못된 행위로 인함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또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것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그것을 아는데도 인생은 왜 여전하고 곤고한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인생은 그 자체가 고난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현세에서 혹은 내세에서라도 그 고난을 벗으려면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가(DO)를 고민하는 신앙으로는 욥의 고난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무식함은 자식들이 겪는 고난을 욥의 고난과 동기화시키기는 합니다만.


욥의 세 친구가 가진 안목이 바로 욥이 당하는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히려 자기들이 가진 그릇된 신앙관으로 욥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신앙관은 바로 욥의 상황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서(DO) 생긴 결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신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 친구들의 말은 말 자체로는 잘못된 것이 없지만 그들의 말과 그들의 정체성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하다 말하면서 그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울부짖는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정체성은 모르면서 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만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맘대로 규정할 뿐 아니라 그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의 말이 내용은 없고 말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사실 여부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이 정체성과 행위(말이 대표적)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의 세 친구들은 자기 심령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도 못하는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현상을 보고 자기가 가진 의로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도 사실 바로 이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런 것은 짐승들도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짐승들도 다 아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올바른 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가면 온갖 말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 속에 없습니다. 즉 욥의 말과 같이 껍데기만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 ‘선지자 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지기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고,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합니다.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자기의 욕심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자기가 바라는 것(육신의 정욕)에 대한 가치를 높게 두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급부도 상당 수준이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자신조차도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한다는 것과 사람이 다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말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절하게 하나님께 뭔가를 해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볼 때 하나님께 온전한 행위를 드리지 못한 결과로 폭삭 망한 욥이 스스로를 의롭다 말하고, 그것을 권면(사실은 심판)하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욥에게 자신들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행위를 하나님께 내어 놓으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말이 이렇듯 내용은 없고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도 행위가 온전하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엄청난 두려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여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의 정체성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욥이 소발의 말에 대하여 반론을 하는 내용들에는 그의 친구들이 가진 신앙이 내용은 없는 빈껍데기뿐인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듯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노릇하는 것이고, 자신조차도 지킬 수 없는 행위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할 뿐 아니라 그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이 욥과 세 친구의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패턴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안다고 해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고 이렇듯 곤고하다고 말하고 있고, 세 친구들은 욥의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을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으로 보고 있는 시각 차이가 대립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욥의 이야기는 소설이라든가 아니면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도 변함없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주신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신 목적에 반하여 오히려 그 육신을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할 것인지를 궁리하고 내일 평안하기 바라며 오늘 하나님께 자기의 행위를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으로 사람을 보기에 사업에 실패하면 교회에 가자고 하고, 같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훈계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욥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말들은 다 껍데기뿐이라고.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위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이 욥의 행위를 인함이 아니었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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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9 (11:27-33)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2. 21. 16:50 Writer : 김홍덕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의미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권세는 땅으로부터 온 것

또 그와 같이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이 권세도 땅에서부터 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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