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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13장)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21. 10:37 Writer : 김홍덕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의 실체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흔히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괜한 시험이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자질을 시험하시는 테스트나, 마귀의 계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일을 사람에게 이루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그렇다고 그 수단이 사람에게 주어진 육신의 삶의 풍족함을 주시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수단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에게 행하실 뿐인데 그것이 때로 사람에게 곤고하기도 하고 또 사람에게 평안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정작 예수님은 평안은커녕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처형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과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욥기에서 보면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욥도 자신이 처한 것이 하나님께서 뭔가 심심해서 자신에게 그러시는 것 같다는 투의 말을 합니다. 자신은 죄가 없는데 죄인과 같이 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심을 믿는 사람이 하는 말로서는 어색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욥의 고난에 대하여 욥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시각이 다릅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은 가진 것이 풍족하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이 있으면 하나님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의롭지 못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오는 엘리후와 또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욥이 그것을 알도록 하시겠다는 뜻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욥의 말과 같이 괜히 그러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각들 사이에서 보면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어떤 것인지, 어느 과정을 지나기에 겪는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욥과 세친구들의 대화 속에서는 그들 모두가 상황 속에 있기 때문에 몰랐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그 모든 과정을 성경으로 대하는 우리는 욥의 고난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욥과 같은 여정을 지나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다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냥 모든 사건이 다 기록된 것을 읽고 있으니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 언급하는 바와 같이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욥기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조차도 다 율법과 같이 행동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욥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정체성과 인생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게 되는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먼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고난이 욥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것 이상의 것이 자신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겸손히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욥기를 바로 읽고 묵상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말씀들을 기준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정리해 본다면,


1) 사람이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범한 죄를 인하여 내리신 벌이고, 그를 회개하고 이겨내면 더 큰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신앙이 있고,


2) 인생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고난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욥과 같은 생각을 가진 신앙의 여정이 있고,


3) 인생이 겪는 모든 일은 사람이 느낄 때 곤고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경영하시는 것이므로 결국은 그 모든 여정이 생명의 빛임을 아는 엘리후와 같은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1)번과 같은 신앙은 우리가 요즘 자신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신앙입니다. 이는 이 욥기뿐 아니라 이 블로그 전반에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2)번과 같은 여정은 이 욥기를 통하여 명확히 나타난 부분이기도 한데, 문제는 2)번의 여정을 지나는 시점입니다. 이 시점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1)번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알기에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거나 기도해서 해결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있는 대로 양심에 화인을 맞는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겠는데 그러면 무엇을 위한 것이냐에 대하여 아직 흐릿하고, 무엇보다 인생을 살아가는 곤고함은 여상한데, 이것이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함을 인함도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너무 분명하게 알았기에 이제는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육신의 복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는 너무 좋은데, 이 자유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심령은 그렇게 기쁘지만 육신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제하던 카드 결재일 걱정이 하나님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을 알았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런데 기도할 문제라는 것도 아님도 알고, 그러나 문제는 육신의 삶이 느끼는 곤고함은 또 그대로인 상황 자체가 힘들게 다가옵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시절을 대표했던 말이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과정은 정말로 답답하고 힘듭니다. 마치 정말로 맛있지만 뜨거운 것을 입에 넣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깨달았기에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고, 이렇게 귀한 것을 알았음에도 인생은 전혀 달라지지 않기에 ‘이렇게 귀한 것을 알고 있는 인생이 이렇게 곤고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느끼는 곤고함은 정말로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상황이 욥기에서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의 시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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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1장) 소발의 첫 번째 변론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9. 10:12 Writer : 김홍덕

전능해야 하는 하나님 vs. 전능하신 하나님


소발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은 신앙의 근간입니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해야 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신으로 믿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복을 주시거나 벌을 주신다고 여기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행위를 경건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행위를 하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신 것만 잘 생각해봐도 하나님은 행위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무엇을 해서 기쁜 것은 2차적인 문제고, 가장 기본적으로 그 존재가 기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하느냐를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했는지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학원을 가면 하나님의 뜻이고, 취업을 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식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가진 신앙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욥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노하실만한 행동을 했고 그 결과로 지금 이 참담한 고난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언급하는 바와 같이 욥의 세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가진 신앙관이기도 합니다. 사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신앙인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는지 보면 압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전자제품 매장에 들어가는 사람이 외투를 구할 리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을 보고 ‘교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교인 중에 사회적인 성공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신앙이라 말하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께 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 바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바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판단해서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 합니다. 그러면서 그 지키려는 말씀이 신약성경에 있다고 그것은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치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을 지키는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행위로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보답으로 자신이 육신의 평안을 얻겠다는 그 가치관 자체가 이미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이고,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래고 장사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고 노하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게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몰지각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괘리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 행위를 드려서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담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반드시 전지전능해야 합니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 그 수익률과 안전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인함입니다. 따지고 들면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문서로 계약하시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해 주실 거야…’라고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하거나 아니면 ‘무응답도 응답’이라는 괴변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삶을 주실 때 그 모든 것을 예비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 자체가 온전하지 않아서 살면서 행위로 무언가를 매워가야 하는 것이 아님도 알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에게 삶을 주셨으니 그 뜻하신 바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있으니 어떻게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는 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로 난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또 그 본성을 의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자 만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자체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에 순종하며 삽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로 나서 남자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남자의 본성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안에서 생명과 본성이 된 사람은 그 생명과 본성이 하나님의 뜻에서 온 하나님의 성품이므로 그 하나님의 성품에 순종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하여 자신에게 삶이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과 그 놀라운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창조하시고 삶을 주셨다는 것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목이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바라는 것은 현재 자기 삶이 고난이고 평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늘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고, 그 구하는 바가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위대함을 알고, 그 위대함을 인하여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대함과 자신이 내용과 형식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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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1장) 소발의 첫 번째 변론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8. 17:28 Writer : 김홍덕

자기 경험으로 볼 때 ‘죄 없이 망한 자는 없다.’고 한 엘리바스, ‘욥의 지금 모습은 분명히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라고 한 빌닷,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발은 ‘네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우냐?’라고 욥을 힐문합니다. 이 소발의 말 속에는 은근히 ‘완전함’을 추구하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완전함이란 온전함과는 다르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 행위로서 온전해지려는 사람들은 상대가 하나님인 점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무결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순서나 예식의 모양 하나에도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완벽한 것인지 늘 고민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 완벽함의 기준이 사람의 생각과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완벽하다고 하는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제사에 지각한 사무엘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로 했으면 그 시각을 잘 지켜야할 것이라 여기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규례에 따라 지키는 것을 바라시지 않고, 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지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알기를 바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발을 비롯한 세 친구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범하면 벌을 주시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생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기도할 때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용서하여 주시옵고’라는 말로 보험을 들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조금의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그걸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솔직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입니다. 소발의 말과 같이 하나님보다 지혜롭지 않다면 말도 못하는 존재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나 그 완전함의 기준이 사람에게서 나온 기준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입니다.


온전함과 완전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온전함은 생명의 법과 목적론적 사고방식의 일환이고 완전함은 방법론적이고 형식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람이 살면서 취하는 모든 행동에 대하여 완전하지 않지만,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로서는 온전합니다. 그것도 태어나는 순간 온전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전함은 자기의 노력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완전함은 자기의 노력에 종속된 것이라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가진 가치관은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고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 복을 주시기도 하고 욥과 같은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에서 보면 욥이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소발이 ‘네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우냐?’고 반문하는 것은 ‘지금 너의 꼴은 하나님께서 딱 벌을 주신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네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너는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판단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판단을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욥이 자기 행위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보다 더 나은 것이냐는 의미이고, 이는 너의 행위가 그렇게 옳은 것이냐는 책망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발은 욥의 말을 근거로 “지금 너의 말로 보면 너의 상황은 오히려 가볍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 혹시라도 벌을 받을까 하여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하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들은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려고 하면 전해지는 의에 관심을 두지 않고 행동과 외모에 초점을 두고 전해지는 말보다 ‘네가 목사냐?’, ‘너는 이런 행동 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완전함을 추구하기에 하나님께서 온전하다고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 완전함과 온전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온전함을 모르는 것이고, 온전함을 모른다는 것은 생명의 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생명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나 행위의 완전함을 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비교되거나, 그 비교된 수준을 기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자격을 얻거나, 복음을 전할 자격을 얻거나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목적을 달성하기에 너무 적합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목적 아래 온전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창조하신 목적으로 볼 때 살아있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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