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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8장) 빌닷의 첫 번째 변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4. 13:08 Writer : 김홍덕

주관하시는 하나님 vs. 반응하시는 하나님


욥기는 언급한 바와 같이 엘리후가 나타날 때까지는 세 친구와 욥의 대화가 평행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 친구는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환난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욥은 자신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없다. 또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의롭다 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죄가 없는 내가 고난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세 친구 중의 세 번째(말한 순서로)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설득이고 권고 같지만 사실 심판의 성격이 짙습니다. 그리고 이런 심판은 오늘날 교회에도 많습니다. 곤고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한 탓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사와 다투다 병을 얻으면 ‘하나님의 종에게 대들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언젠가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들이 종에게 뭐라 한 것으로 병을 얻을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이라도 화를 내고 열을 내면 병을 얻기도 하는 것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욥기 8장에 나오는 빌닷의 말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입니다. 자식들이 죽은 것도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처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욥의 죄에 대하여 벌을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법으로 보면 지금부터 하나님께 온전히 행하면 그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나중에는 창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이 새로운 사업장을 열면 교회에서 선물을 준비하는데 그때 가장 많이 선물하는 문구가 바로 욥 8:7절입니다. 액자와 같은 것으로 그렇게 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빌닷이 한 말이라는 것이 참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지, 아니면 벌을 주셨는지 판단하는 빌닷이 한 말을 육신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기에 사업장이 하나님의 은혜로 번창하기를 바라면서 선물을 한다는 것이 왠지 너무 절묘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의 모든 말씀은 각 신앙의 단계에서 언제나 온전하게 사용되지만,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맞는 말씀들만 소위 말하듯 핀셋처럼 사용하는 것도 참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반가운 말씀인가 봅니다.


다시 빌닷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정리해 본다면,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분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은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지를 신앙의 본질로 삼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처한 형편이나 모습은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께 행한 결과에 보응하신 결과라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자기 인생을 또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대할 때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주시거나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빌닷처럼. 이것은 사람들의 그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이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 뜻을 정하시고, 그 뜻 안에서 복이든 벌이든 고난이든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마음대로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이고, 반응하시는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나 오늘날 기독교인 더 나아가서 신을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진 신에 대한 개념으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을 받거나 벌을 받아 고난에 처하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입니다. 창조주라면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으로서 겪고 인지하는 모든 것이 다 그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과 같은 가치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이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다가 그 결과에 따라 반응하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반응 이전에는 어떤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준다는 것만 있지, 그 내용에 대한 주관은 아직 미완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론적으로 창조의 미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에 보응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파편화해서 하나의 독립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리하면 곤란합니다. 로마서 2장에서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행위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행동은 그 안에 가진 의가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주요한 주제가 여기에도 녹아 있습니다. 욥이 겪는 고난이 욥의 행위에 대한 결과, 즉 빌닷이 말하고 있는 ‘인과응보’에 해당되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빛으로서 역사하시는 것이냐에 관한 것이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욥기도 본다면 세 친구는 하나님은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고 있고, 욥은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은 알지만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안목이 부족한 상태로 엘리후의 변론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관하시는 창조주라는 것은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심지어 사람이 악으로 여기는 것까지 모두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안목이 없으면 욥기 1,2장에 나오는 사탄과의 대화 같은 것은 이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욥과 같이 인생이 겪는 곤고함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인생이 만족이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만족의 동산인 점을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동차를 사서 이동을 할 때 자동차 위주로 살면 바보입니다. 운전자의 안전을 위하여 정비하고, 사용하고 운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가다가 흙탕물이 있어 차가 더러워질까 하여 돌아가는 것은 정말 바보인 것입니다. 차가 때로 악조건에서도 운행되고, 때로 과속을 하는 것은 차에게는 고난일지 몰라도 그 차를 구매하고 만든 주인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주인의 주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말 그대로 생사화복에 대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주관하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대로 행하시는 것에 순종하여 살면 때로 육신이 육신의 곤고함으로 느끼는 일들을 겪기도 하나, 그 목적 안에서 주관하심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때로 곤고한 인생이지만 그 과정조차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을 비추심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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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만족이 되는 세계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벌레만도 못한 자’라고 고백하거나 기도할 때 자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벌레보다 못한 존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양으로 내어 주는 그런 어리석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치를 알고 가치에 맞게 바꾸고 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그런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손해 보는 장사 하지 않습니다. 그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물질을 개발 했는데 그것을 담아 놓을 그릇이 없어서 구한다는 유머가 있는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나타내시려고 만드신 형식이자 형상이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이는 물질을 담을 유일한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그저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신 대로 된 것일 뿐이지만, 단 하나 이 사람이란 존재만은 하나님이 되라고 하신대로 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자기 판단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고백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뜻을 자기 삶으로 담는 그릇이 되기를 바라시므로 만든 존재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너무 온전하게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벌레만도 못하겠습니까? 그것도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여기면 그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에서 때로 벌레보다 못하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사는 죄에 빠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롤렉스시계보다는 시간 잘 맞는 수능 시계가 시계라는 목적에서 보면 더 온전하고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롤렉스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가치에서 보면 벌레만도 못한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지 못하던 시절을 회상할 때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고백할 수 있겠지만 자신을 하나님의 산제물로 드린 사람은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레나 드리려고 한다면 또 모를까. 바로 지금 욥의 고백이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도무지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사건건 간섭하시므로 사람을 이렇게 곤고하게 하시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들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친다고 한들 다 하나님의 것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인데 뭔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이러한 고백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아직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을 아프시게 하시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생명의 빛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욥 33:19~30)”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잠자는 순간에까지도 늘 말씀하시고 계신다.(욥 33:14-15)”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욥이 알지 못하는 이 한 과정을 말씀하시는 책이 바로 욥기인 것입니다.


욥기는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이 고난을 참아야 되는 이유와 명분을 주시는 책이 아닙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생각하듯이 고난을 잘 견디면 그 후에는 이전보다 더 나은 육신의 평강과 복락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이 겪는 고난은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으시기에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행위로 이를 갚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 와중에 느끼고 있는 인생의 무게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세 친구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듯이 하나님께 가서 인생의 문제, 육신의 문제, 혈육의 문제, 사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성경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를 궁리하는 애굽과 광야의 신앙이고, 욥의 신앙은 세 친구들의 신앙을 지나서 행위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물세례의 과정을 거치고 난 사람들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물세례는 여기서 말하는 물세례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물세례 아니라 불로 몸을 지지듯 불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 구하는 바가 육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시늉이요 노릇일 뿐입니다. 머리에 물을 적시는 안수나, 침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을 행위로 섬기는 것이 아님을 고백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물세례인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의 과정으로 보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그 강바닥에서 돌을 가지고 와서 쌓았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법이 삶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지시하는 대로 해야 살 수 있었다면, 이제는 살았기에 그 생명의 능력대로 발을 딛는 곳은 모두 누릴 수 있는 법이 삶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이 자기 삶의 법이 되는 것이 물세례인 것입니다.


욥은 바로 그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데 그런 중에도 곤고함은 있더라는 것입니다. 굳이 비유한다면 땅을 얻기 위해서는 육신으로 걸어가고 싸움을 해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물세례 이전 광야와 같은 신앙에서도 싸우는 것이 일이었는데 요단강을 건너서도 늘 싸우기만 하는 것에 대한 의문과 같은 것이 욥의 한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전과 같이 싸우기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생겼다는 것은 다스리는 의가 현실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의 삶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아프지만 그것이 결국은 생명의 빛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는 고난과 같이 느끼면서 살았던 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인 것을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욥이 마지막에 크게 회개하는 것은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만족이 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나 만날 수 없을 뿐이지. 그 사람들을 만나려면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절대 수치는 작겠지만 이는 좁은 문이기 때문이지만 알고 보면 엘리야의 때에 말씀하신 7,000명과 같은 사람들이 넘치고 넘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욥의 이 한탄들이 의미하는 바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머지않아 위로함이 만족이 될 것입니다. 욥의 최후 고백과 같이. 인생이 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는지 아찔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살았다는 것이 그렇게 영광스럽고 삶을 주셨다는 그 자체가 너무 감사해서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입니다. 그때는 이 삶이 주는 고난이 새로운 가치가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의 증거로서 감사할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을 그렇게 소비하여 가는 것임을 알게 되어 평안할 것입니다. 욥기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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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들…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첫 번째 변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장 20절 나오는 말씀과,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 7:20)


그리고 그에 앞서서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말씀인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7-19)

과 같은 말씀들일지 모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동안에 한 번 정도는 욥과 같은 고백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단계의 차이는 있습니다. 굳이 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그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공로를 드리는 신앙(사실 신앙도 아니지만)을 가진 사람들도 아마 욥과 같은 고백을 하긴 할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러나 욥의 고백은 말은 같아도 그것과는 사뭇 다른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욥으로선 자기가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한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는 것은 더 답답한 것입니다. 세 친구와 같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으니 받는 고난이라면 회개하면 되기라도 할 것 같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닌데 받는 고난이니 말 그대로 하소연할데도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단언컨대 모든 신앙인들이 알고 있는 마음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드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인생이 곤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막막함을 느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곤고함에 처하고,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을 때에 그 원인을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으로 보고, 무엇을 고치면 될 것인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아서 행하는 것이 해결 방법이라고 여길 때는 기도를 하든지, 새벽기도회를 나가든지, 하다못해 주기도문을 백번 쓰든지 하면 죄책감이라도 들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느끼는 그 막막함은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욥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으면 ‘기도하면 돼’라는 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시는 것은 아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자신들이 선교하러 가겠다는 것을 마음에 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시대에 어떤 종교적 행위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 경건함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 어느 하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뜻이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방향이 반대라면 목숨을 하나님께 내어 놓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 이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 중에 인생이 곤고하다고 느끼는 그 마음은 정말로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육신의 일을 구하는 신앙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신경을 쓰시는지?’ 라고 반문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이 왜 곤고한가 하는 것이나. 반대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으시니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한 들 또 무슨 상관이냐며 반문하는 이 한탄들은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여겼다면 세 친구의 말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를 찾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신앙은 분명히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 안에서는 이 욥의 고백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이 고백을 세 친구들의 권면에 빙의된 듯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려 하는데 잘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행위로 잘 섬기지도 못하는데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는지로 왜곡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다고 하나님께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일일이 간섭하신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면 이 욥의 고백은 피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는 인생의 곤고함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안목이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중에 겪는 삶의 곤고함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욥이 겪는 것과 같은 인생의 곤고함이라는 것이 기도한다고, 회개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는데 인생은 곤고하게 느껴지는 그 상황은 정말로 답답한 것입니다.


정말로 이런 상황은 말 그대로 <위로는 되지만 만족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럽지 않다고 하려니 마음에 씁쓸함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너는 돈 있냐? 나는 예수 있다!’라고 아무리 뇌까려도 마음 가득한 씁쓸함은 어쩔 수 없는데, 그것이 기도한다고, 성경 본다고, 봉사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분명해서 양심상 그럴 수도 없는 그 상황, 그 시절의 심령은 정말로 겪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적어도 인생의 곤고함이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행위를 드린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에 가서 소나무 뽑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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