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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7장)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반론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8. 18:22 Writer : 김홍덕

사실 말의 순서가 엘리바스 뒤에 이어져 있어서 그렇지 욥의 태도는 일관된 모습입니다. 그는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은 없고, 하나님께서는 맘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라 자신에게 이렇게 고난도 주실 수 있는데, 당하는 자신은 태어나지 않은 만 못하고 고난이 그친다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마음에 대하여 욥이 자기 입장에서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7장을 시작하면서 “인생은 전쟁 중에 있는 것 같고, 종살이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자기 이야기처럼 와 닿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인생을 고된 종살이나 전쟁과 같이 험한 세월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뭔가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도리어 시쳇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지고 노는 노리개 정도로 여긴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 어이없는 남의 이야기 같지만,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든 아니든 모두들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고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평안을 구한다는 것, 늘 그리고 여전히 구하고 있다는 것은 평안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역시 육신의 일상에 관한 것입니다. 


존재의 평안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것은 존재의 평안입니다. 가정의 아이들이 자기가 그 집의 아이가 아니라고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존재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구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평안은 모두가 육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평안입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언제 평안하냐 하면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평안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육신의 평안을 지속적으로 구한다는 것 자체가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존재의 신분이 늘 평안하고 성경에서 그렇게 자주 나오는 반석과 같아서 흔들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안을 구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앗아갈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가진 사람은 간혹 육신의 일에 대하여 평안을 구하기도 하지만 크게 다른 것은 언제나 결과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셨지만 결국 본성에 이끌리어 가셨던 것과 같이 육신이기에 때로 고난을 피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은 육신을 하나님이 쓰시는 대로 내어 놓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끝내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라고는 육신과 혈육과 눈에 보이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평안을 늘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을 가진 사람은 욥과 같이 인생을 고난으로 보지 않습니다. 육신을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소비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것이 본성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하여 얼마나 치밀하신 계획과, 창조주로서 미약한 사람에게 얼마나 정성을 쏟고 계신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후의 변론 이후에 절절히 전개되는 것이 욥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육신의 일로, 육신이 느끼는 것이나 바라는 것의 결과를 가지고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소비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때로 고난일 수도 있고 평안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얼마나 정성을 다하시는지를 알 수밖에 없습니다. 욥은 아직 그것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료를 마시기 위하여 구입한 그릇은 때로 쇠로 된 수세미로 문질러지기도 하고, 때론 뜨거운 몰로 소독을 당하기도 하며, 때로는 마시다가 남은 음료가 상한 것을 보관하기도 합니다. 그릇의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고난과 같지만, 어떤 처분을 받든 주인이 음료를 마시겠다는 목적 안에 있기에 존재의 평안은 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전혀 사용되지 않고 찬장에 박혀 있는 것은 너무 평안하지만 죽은 것과 같으니 우리의 인생도 이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전쟁 중에 놓인 것도 아니요, 종살이도 아닙니다. 인생이 전쟁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제 발로 전쟁에 들어가고 자기달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므로 서로 다투는 전쟁을 일으키고 참여하는 것이고, 스스로 재물과 같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도구를 목적으로 삼고 추구하고 섬기는 종이 되기는 하나, 하나님은 인생을 그런 목적으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므로 그 영과 하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순종하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운명임을 아멘으로 받아 살면 바울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의 고백이 자기 고백이 되고, 그 고백을 왜 했는지도 그 속에서부터 나와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한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신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은 것들이 자기 고백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너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내용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인생인데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 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 자기 삶의 근원이 되었다는데 어떻게 인생을 한탄하겠습니까? 그리고 고난이 어떻게 하나님의 괜한 심술이나 장난이나 벌로만 여겨지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여정으로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통하여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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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때가 많은데,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변론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6장 14장 전후의 말로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제를 떠나서 친구가 환난 중에 있으면 돕고 위로하는 것이 우선인데, (욥의 입장에서 보면) 다짜고짜 ‘너의 형편을 보니 분명히 하나님께 범죄 한 것 같으니 회개부터 해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 반문하는 부분입니다.


욥의 이 말은 사실 우리 일상 가까이에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있는데 말로서 배부르게 하라, 평안하게 하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말씀하기도 했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 안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니 배고프고 욥과 같이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교회에 가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것을 주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그것입니다.


욥의 상황만 보더라도 욥이 졸지에 자식과 재산을 잃고 몸마저 병들었는데, 설사 그것이 하나님의 징벌로 인함이라 하더라도 ‘누울 자리는 있냐?’ 라고 묻고, 약이라도 발라주는 것이 먼저이지, 그 꼴을 보고서 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서 이 꼴이 되었으니 회개해라!”라고 하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말인지 의아한 상황이긴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 더 확대해 보면,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가치 부여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가치 있는 일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최고의 가치이고, 그 가치를 가졌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대속하시고 자신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로서, 창조주의 아들과 그 의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가진 자로서 베풀 듯이, 나누어 주듯이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고 기부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행위로 범죄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삶이 환난을 당하고 있지 않은데, 그와 다르게 육신의 형편이 곤고해진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 아니면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고, 욥의 세 친구들의 모습이고, 근원적으로 보면 사탄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가치는 거듭났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거듭났을 때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신이나 자기 옳음을 좇아 구하고 신앙하는 것을 단지 하나님께 구한다고 거듭났다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믿지 않는 것 보다 못합니다. 사람이 뭔가 바뀌려면 잘못되었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에 다닌다고 거듭난 것이라 할 수 없고, 세례를 받고 교리 문답을 했다고 거듭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문답이나 면죄부나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무상이나 유상이나 다 계약이듯, 교리로 정해서 죄를 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그것이 돈을 냈던 무상이든 다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전 면죄부는 일시불이고 지금의 신앙인들은 단지 할부로 내는 차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을 믿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그 가치를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고귀한 권세를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정의한 기준에 따라 인생 최고의 악인이 달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하나님을 믿는 가치의 본질입니다. 


정말로 이 가치를 안다면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형편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거나 아니면 좋은 신앙이라고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보다 낮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섬김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보인 태도는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욥의 형편을 보고서 자기 경험으로 볼 때 이런 꼴을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욥의 처지를 염려하고 돌보는 것보다 앞세우는 가치관은 전혀 십자가와 무관하고 하나님의 마음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기에 나누어주고 베풀 듯이 행위로 선행을 쌓으려는 것은 거듭난 것조차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조차 도둑질입니다. 자기 것 아닌 것을 자기 것처럼 행사하는 것이 도둑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한 사람입니다. 이는 베푸는 것이라기보다 섬기는 것이며, 종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를 가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섬기고 순종하신 것은 제사장과 빌라도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교회의 가는 것과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며,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과 거리를 두고 등지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할 수 있는 형편의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잘 못 믿어서’, 아니면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믿는 것도 신앙도 아닙니다. 거듭남? 근처에도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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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6 (11:1-10)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2. 7. 11:30 Writer : 김홍덕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라는 것은 예수님 이전에 어떤 사람도 보여 준 적이 없는 섬김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시에 환호하던 사람들이나, 지금 교회에 가서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고 바라는 사람들은 다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버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시는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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