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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5장) 엘리바스의 변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6. 11:00 Writer : 김홍덕

(욥 4:7)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욥이 졸지에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라는 친구들입니다. 그 중에서 엘리바스가 먼저 말을 합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라며. 한 마디로 욥이 망한 것은 욥의 죄로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죄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있고 그것을 범하였다는 뜻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꼴을 보니 자신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욥이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였다고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한 번만 읽었다면 세 친구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자기 삶의 주변에서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긴 사람을 보면 교회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이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을 그리 생각할 수 있다면 성경을 자기에게 겸손하게 제대로 비추어 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욥기를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을 욥기의 흐름에서 떼어 놓고 생각해 볼까요?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처음 들을 때에 옳다 싶은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는 신에 관계없이 평소에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대로 천(하늘 天)벌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 곧 신이 그 사람의 행위에 벌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다를 것은 하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엄격하고 전능한 하나님의 옳은 행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이에 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모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당연히 예수님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말도 함께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 허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엘리바스의 말대로 세상을 보고 고난을 보고 사람의 일을 보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저 신성모독과 반역이란 자기 죄로 죽은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에게 자기 죄를 사해달라고 매일 기도하는 멍청한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설교라고 하고, 그것을 공부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울고불고합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욥기가 주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 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


엘리바스도 역시 인생은 고난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욥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욥이 가진 고난에 대한 관점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심판하여 벌을 주신 것이 아닌 것은 알지만 욥기 후반에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깨닫지 못하여 고난을 견디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존재의 신을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기뻐하시는 신으로 대하는 불의함은 아닙니다.


하지만 엘리바스는 사람이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열심히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지켜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의 원인이 인생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지은 사람의 시작부터 죄 가운데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불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나오는 것이라고 다른 글에서 많이 설명하였습니다.)


엘리바스는 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난 것이지만 그래도 징계를 받는 것은 그나마 하나님께서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5:17) 어떻게 이렇게도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말과 동일한 말을 하고 있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도무지 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을까요? 앞으로 겪을 고난을 상상하면서 즐거워하신 사이코인가요? 하나님은.


인생은 기본적으로 빈 그릇과 같아서 어떤 것을 채우기 전에는 그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욕심이라는 것도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담기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끊임없이 담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담긴 것에 따라 정체성이 정해집니다. 밥이 담기면 밥그릇, 국이 담기면 국그릇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고난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릇이 그 용도대로 사용되기 위하여 때로 뜨거운 물로 설거지 한다고 그게 그릇이 고난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바스와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고난과 인생에 대한 안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뜨거운 물에 그릇이 씻겨 진다고 인생은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존재 정체성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어두움에 있고 소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살아 온 경험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5:27) 말합니다. 태어나서 자기 안에 채운 것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라고 어리숙해 보이는 출연자를 일컫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웃고 놀리는 모든 인생들이 사실은 태어난 김에 살고, 태어났으니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 답을 가지고 자기가 태어난 목적으로 치환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면서 알게 된 것은 삶의 목적을 정의한다는 것은 돛단배 안에서 돛에다가 부채질해서 배를 가게 하겠다는 발상인데, 모두 그 수고를 열심히 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자신이 그 삶에 대하여 정의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도 자기가 만든 물건이 자기 의도와 달리 작동하면 ‘자기 맘대로 움직인다.’며 고치거나 버리는데, 하물며 이 인생이겠습니까? 이 인생은 그 누구도 스스로 시작한 이가 없으니, 그 누구도 자기의 경험이나 자기 삶의 결과물로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밥그릇으로 만들었더니 자기 맘대로 뭔가를 채우고 개가 그 안에 든 것을 먹으니 자신은 개밥그릇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것이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 어떤 수로 영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얼마나 놀라운지, 이 엘리바스를 통해서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이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계십니다. 엘리바스와 그와 같은 시각을 가진 오늘날의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죄를 위하여 죽은 것일까요? 아니면 엘리바스와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회 칠한 무덤과 같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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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장) 욥의 탄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5. 23:42 Writer : 김홍덕

욥기 3장이 시작되면서 먼저 욥의 탄식이 나옵니다. 졸지에 전 재산과 자식을 잃고, 아내는 저주하고 떠나고 혼자된 것도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인데, 온 몸은 악창이 나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상황인 자기 자신을 한탄하면서 자신이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 겪고 있는 이 고난은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동일하게 겪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일이라 그보다 더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욥이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이 주는 곤고함을 스스로 돌아볼 때 나지 않은 것 보다는 못하다고 느끼는 것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오늘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것에서 일단 태어나기만 하면 인생은 곤고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차이는 크게 다를 수 있지만 살아간다는 것을 곤고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누구나 말은 하지 않더라도 태어나지 않은 것이 태어나서 곤고함을 겪는 것보다는 나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에서 투구나 욥의 한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을 이겨낸 다음에 누리는 복락을 자신의 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고난의 정도가 중요합니다. 욥이 가진 인생의 풍요로움과 하나님의 의는 비례한다고 여기는 가치관이니 당연히 큰 고난은 큰 보상이 따른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고난이 크면 복도 크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본다는 것은 사탄의 관점과 동일한 관점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고난 자체보다도 고난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10월을 훔치나 10억을 훔치나 도둑질한 것은 같은 것입니다. 물론 비유가 과하긴 하지만 성경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가지 율법을 다 지켜도 단 한 가지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과 같다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 인생에서 겪는 곤고함을 어떤 의미로 받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육신의 평안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나은 인생을 추구하고, 더 나은 평안을 추구하고, 육신이 살아가나는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태어나서 사는 것 자체가 불만이란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저항과 불만족이 고난의 본질입니다.


또한 그 바라는 것을 전혀 중요하게 보시지 않는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구하고, 자기의 바라는 바가 얼마나 이루어지는지를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의롭게 여기는지의 척도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자신을 정죄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명분과 동력으로 삼는 악순환에 매몰됩니다.


바로 그런 모든 가치관과 노력의 뿌리에는 욥의 탄식이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욥의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사탄과, 세 친구와, 또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행위 = 의로움 = 축복>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욥은 자신에게 임한 고난은 자기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겪는 것 보다는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좋았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이러한 관점은 엘리후의 책망이 나오기까지 세 친구와 평행선을 걷습니다.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까닭 없이 자신에게 이런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점이 다르다보니 대화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사실 앞선 포스트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이 글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육신의 평안을 축복으로, 또 의로움의 보상으로 생각하는 사탄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견주거나 빗댈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욥은 엄연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지금의 신앙인들은 사람의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같은 수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욥이 고난을 보는 관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신앙과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사실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점입니다. 인생을 나지 않는 것이 태어나서 겪는 고난을 하나님이 감찰하여 주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다는 것입니다. 단지 고난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여기는 거듭나서도 태어난 것이 오히려 감사한 지경에 이르는 것에 이르는 것은 또 다른 신앙의 여정인 것입니다. 욥기가 말씀하시는 핵심 중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그 수고로움을 십자가의 삶으로 알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생에게 그것이 가장 가벼운 짐으로 알며, 태어났다는 것이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감사함으로 아는 신앙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육신의 풍요함을 하나님의 복으로 알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곤고함과 세상에서의 실패는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없는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사탄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이 자기 삶이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인생의 풍족함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이들에게 고난은 오직 채찍질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인생 자체와 고난을 연결하여 묵상할 이유나 여력도 없습니다. 곤고하다 싶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를 하든, 성경을 보든 아니면 굿을 하든 뭐라도 해야 한다고만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욥은 달랐습니다. 자기가 행위를 달리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 행위로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를 고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 친구들은 그 욥의 말을 꺾어 보려고 긴 변론을 하지만. 그렇게 보면 적어도 고난의 의미를 논하려면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 고난의 크기가 어느 정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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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성경의 분류에서 시가서에 속하고 소설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역사학적으로 욥이라는 사람의 실존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객관적 실체인지를 따지는 사람들의 안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심청이란 사람이 없으니 그것은 소설이고, 문학적 가치는 어떻고를 따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도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성경을 문자대로 보는 것입니다. 행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록하신 의도는 무시하고 표현된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는 문학적 관점이나 역사적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소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욥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더더욱 욥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는 여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재산과 자식들을 다 잃어야 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앞서서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런 질문이 생각난다면 아마도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생명의 안목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은 한 마디로 졸지에 폭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의 잘못을 인함이 아닙니다.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잘못된 <행위>를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육신의 풍요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면 육신의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가치관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니 욥이 폭삭 망한 것입니다. 그렇게 욥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는 사업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교회에 가야 한다.’, ‘절에 가야 한다.’ ‘점집에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DO)를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육신이 추구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그 육신의 행위가 신 앞에서 올바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신적 존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 묻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은 하나의 가치관입니다. 육신과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하는 가치관입니다. 교회를 크고 잘 지었다고 하면 교회가 발전했다고 하는 것이 그렇고, 인생이 풍요로우면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하고,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이루어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그 가치관입니다.


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그 세상의 가치 있는 것들을 얻으려고 합니다. 믿음을 드린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부터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거나 신앙생활을 잘해서, 아니면 노숙자에게 교회의 이름으로 밥을 제공하는 봉사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하나님이 그 보답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잘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또 세상 사람들이 잘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신이나 신앙보다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시며, 사람이 구하는 모든 것을 지은 분인데 그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런 말과 생각들이 욥기에 줄줄이 널려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하는 말들이 바로 그런 말이고, 그 시작은 다름 아닌 사탄입니다. 욥의 의로움이 욥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앞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과 사탄의 생각은 정확히 궤를 같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욥의 신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은 엘리후가 책망을 하고, 하나님께서 질문 공세를 하시기 전에도 적어도 사탄이나 세 친구와 같이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를 잘못해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어떤 것을 의로 여기시지도 않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의롭다고 하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욥은 오늘날 세상에서의 평안과 영광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과는 격이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세상이 귀하게 여기고 육신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고난을 이기면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빗댈 수준의 대상은 사실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기를 통하여 단지 그것만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아닙니다.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육신의 어떠함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만을 말씀하시고자 함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엘리후의 변론과 하나님의 질문, 그리고 욥의 회개 과정에서 육신의 정욕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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