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5

(욥기 11장) 소발의 첫 번째 변론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7. 13:33 Writer : 김홍덕

모든 것이 거짓인 세 친구의 말


욥기에 나오는 세 친구 중에서 마지막으로 소발이 말을 합니다. 엘리바스는 자기 경험으로 볼 때 ‘죄 없이 망한 자는 없다.’고 했고, 빌닷은 ‘욥의 형편은 욥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말들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은 신앙인들이 읽으면 그들의 말도 틀린 것이 하나도 없게 여겨질 것입니다. 


물론 그 말들을 욥기에서 분리해서 따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욥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 안에서 세 친구의 말을 보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노하신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욥 8:7)’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노하신 빌닷의 말인 것도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발은 욥에게 “네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우냐?”로 함축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소발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껴야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이라는 것이 신체적으로 말을 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말은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그 말이 참된 말이 되거나 거짓말이 됩니다. 사람들은 사실과 다른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과 말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남아일언 중천금’과 같이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하시고, 선지자 노릇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시늉했다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아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그 중에서 “~~하라!”고 하신 것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저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문장으로 된 계명을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으로 여기는 신앙을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모든 순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행위의 공로나 소유의 드림을 좋은 신앙이라 여기시는 분이 결단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심은, 그것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존재적이란 것은 존재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 관의 관계만 정해지면 어떤 행위를 어떻게 할  지는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부부가 되고, 부부가 되면 서로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되었기에 같이 자고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지면 안 되는 것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질그릇과 같이 속을 채워야 온전해지는 존재로 지어진 사람은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이냐에 따라 그 정체성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행위의 공로나 소유를 드려서 의로워지려는 생각을 채운 사람이 있고, 좁은 문을 지나듯 적은 수지만 그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의와 뜻을 담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채워진 것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도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채워진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하라!”는 자신이 싫어해도 하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형편을 보고서 하는 그들의 말 속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그릇 안에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어떤 말씀을 어떻게 지켜 행할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형편이 고약해진 사람을 보면 ‘교회에 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신약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오셔도 그 말만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친구들의 말은 문장 자체로는 틀리지 않았으나 그들이 욥의 형편을 보면서 욥이 당한 일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서 일어난 일이라는 안목을 가진 정체성을 심령에 담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말은 전부 거짓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욥도 소발의 말에 답변을 하면서 ‘너희의 말을 누가 모르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욥기 9-10장) 빌닷에 대한 욥의 반론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6. 16:54 Writer : 김홍덕

욥의 변론은 계속 이어집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한다고 생각합니다.(10:2)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불의하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은 죄가 없는데,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모습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지려 한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듯 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욥의 변론 속에는 다분히 하나님이 고의로 그러신다는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원망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이 육신은 이를 어떻게 보는지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고 본질 중의 본질입니다. 육신을 주신 이유는 인생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인생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정체성은 존재의 목적이고, 육신은 그 존재의 목적을 나타내는 수단인 것입니다.


그 목적은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용한다는 것은 소비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소비되고 사용되어진다는 것은 일면 곤고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곤고함을 겪으며 그것이 힘듭니다. 이 곤고함은 결국 육신의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두 가지 큰 관점이 있는데 먼저는 사람이 육신을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평안하지 않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고 이를 바꾸려고 하는 관점이 있고, 다른 한 관점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주신 목적대로 사용됨에 있어 순종하는 관점입니다. 그 관점 안에서는 인생이 겪는 일들이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여정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육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육신을 자신의 소유로 보기에 평안한 것이 정상이라고 보는 세 친구에게나,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육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욥에게나 곤고함은 동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평안해야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육신의 어떠함은 존재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과정에서의 현상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육신이 평안한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평안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며,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지키는 공로를 늘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사도들이 크게 경계하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파생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 욥은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지만 인생의 목적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욥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욥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내용을 알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전반적인 행간을 보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는 안목으로 욥기를 보면 결국 세 친구의 안목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떤 물건을 구입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물건을 만들거나 구매하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여 자신이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지, 그것을 보존하고 아끼기 위하여 만들고 사지 않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그가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주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육신이 살면서 겪는 일을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도 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행위를 의로 여기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흑암이 혼돈하고’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자신의 평안을 담보하여 주는지 늘 어둡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뭘 해도 인생은 늘 수고스럽기 때문입니다. 또 인생을 늘 고난으로 보기에 어떻게 봐도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못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해 봐도 언제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모든 행위가 부정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육신이 된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즉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단지 존재만 바뀌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마치 온 몸이 문둥병으로 희게 되면 오히려 정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보게 되면 그 때부터는 인생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이나 삶의 형편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짧지 않는 시간 하나님을 아는 귀한 존재인데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에 힘들어 합니다. 이 시점은 신앙의 여정에서 아주 힘들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욥과 같은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형편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데 삶이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 갈등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 시절에는 정말로 욥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지 않았다면 나았을 것을…’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의를 아나 모르나 하나님은 동일하게 대하신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외람되나 이 과정은 겪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 교회에 가서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 친구를 보면 알지 못한 사람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야 육신의 삶이 무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 서면 늘 죄인이 됩니다. 행위로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따를 수 없으니 그 가치관 앞에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다른 의를 가지면 의가 다르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공산주의자가 민주국가 안에 가만히 있어도 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세 친구 앞에 있는 욥의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욥기 9-10장) 빌닷에 대한 욥의 반론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15. 09:2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보는지, 아니면 반응하시는 분으로 볼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두 가지 태도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 같지만, 그 선택은 어떤 의를 가졌는지,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신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 즉 본질적 의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볼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마저도 자신이 옳다는 대로 믿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볼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가진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을 어떤 신으로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복이나 벌을 주신다고 여기는 것은 언뜻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 같지만 실재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종속된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종속되었지만 능력이 더한 신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초한지에 나오는 유방이 한신을 보는 것 같은 것입니다.


욥의 친구 빌닷은 그 말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절대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이라는 의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 처한 상태를 보니 필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고, 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셔서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나중을 크게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그 창대함은 육신의 복락에 관한 것입니다.


빌닷의 말을 기준으로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을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는 사람(시절)이 있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시절)이 있고, 하나님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보는 사람(시절)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욥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세 친구는 하나님을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대변하고, 욥은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고, 후에 나오는 엘리후는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 엘리후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의 안목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자신이 죄가 없다고 주장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분명히 많은 지탄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탄에 맞서서 ‘예수님이 죄를 다 사했는데 왜 죄가 있어야 하느냐?’라고 반문한다면 아마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의 모든 행위를 다 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죄를 사했다고 네가 죄를 짓지 않느냐?’, ‘예수만 믿으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것이냐?’ 등등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함 받고, 그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누리는 곳이 교회이고, 그래서 교회에 가는데, 정작 교회에 가서 죄를 사함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저항에 부딪힌다는 것이 정말로 어이없는 것입니다. 그럴 값이면 왜 교회에 가겠습니까? 교회에 가서 사회보다 더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죄 사함 받았다면서 사함 받았다고 말도 못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 마디로 죄를 사람의 행위에 기준을 두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농담 삼아 하는 거짓말, 이른바 하얀 거짓말이 죄냐 아니냐와 같은 실로 어이없는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잠깐 답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논쟁을 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이러한 안목의 차이가 가진 대립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반응하신 결과라고 보는 세 친구의 시각과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위하여 베푸신 은혜의 경영이라는 엘리후의 시각이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반응하시는 분은 아닌 것은 알지만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하여 주관하신다는 것을 온전히 다 알지 못하는 욥의 모습이 그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욥이 겪는 고난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 행위로 죄를 범하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살면서 겪고 느끼는 모든 것이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시고 그 선하시고 의로운 뜻을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기 위한 경영으로 보지 못할 때 삶이 고난으로 여겨진다는 것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의 본질인 것입니다.


욥기의 시작에서 하나님께서 왠지 고의로 욥이 고난을 받게 되도록 사탄을 꾀듯 한 분위기마저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생을 전적으로 경영하신다는 것과, 그 하나님의 경영을 은혜로 알지 못하면 인생은 그것을 고난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욥이 자기 형편을 고난으로 여기고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9장에서 자신은 하나님이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분이라고 믿는데도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런 구분 없이 자신을 대하신다고 한탄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를 사람을 향한 은혜로 알지 못할 때 사람이 인생을 정의내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바라고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육신의 평안이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라면 바울도 베드로도 스데반도 야고보도 심지어 예수님도 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뜻에 무관하게 다른 사람, 다른 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육신의 복락과는 아주 무관할 뿐 아니라 육신이 아주 폭삭 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서 그것을 믿어서 육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바로 도적질이고,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말씀이 섞이는 간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인생을 주신 것은 그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삼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이라면 때론 평안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대부분은 수고를 하고 살아가는 것이 용도요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 육신으로 다른 사람이 옳다는 의 앞에서 종과 같이 섬겨 수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저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성품이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이 가장 농축되고 본질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결국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로 드러나심과 같이 우리도 육신을 그렇게 사용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어 그 육신으로 본이 되시고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과 같이 산다는 것은 육신이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육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어리석은 의와 가치관 앞에 종과 같이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 육신이 평안하기만 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욥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