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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4. 13:34 Writer : 김홍덕

이제 엘리후는 욥의 말 중에서 얼마들을 하나씩 반박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자신을 원수 대하듯 하신다고 한 말에 대하여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과 같은 사고의 체계를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 말에 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스스로 진술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시므로 피조물에 대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시는 분이지 피조물이 자기 사고 체계에서 가진 의문들에게 변론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가지신 뜻을 완연히 표현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교만해지는 것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쟁론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께 주장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창조주의 의에 순종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자기 입장을 변론하고 주장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할 존재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상이 선하니 악하니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그렇게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거나 또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겸손한 척 기도하는 것에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곤고하면 안 된다는 정의가 먼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다르다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고난 없는 삶을 보상 받을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께 행위를 드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그런 분도 아닌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는 것이 정말로 귀한 것이기 때문에 대접까지는 아니어도 고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계속 변론하려 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에 대하여 엘리후는 하나님이 그것을 진술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욥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께 궁금한 것을 물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모든 의문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의에 걸려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 자기 안에 순종이 되어서 보면 세상은 너무 온전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 뜻대로 경영되는 세상이 잘못될 리 없고, 따라서 의문이 생길 리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설계자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기계가 설계대로 잘 작동되면 ‘왜 이렇지?’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쟁론할만한 의문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물론 시작이야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려면 적어도 자신도 모르는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 가정은 함께 해야 공평한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도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열심히 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을 언제까지 해야 하지?’, ‘어느 단계가 되어야 이룬 것이 될까?’, ‘사람은 이렇게 노력만 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와 같은 의문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서 이런 의문이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욥과 같이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빠지면 안 되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된다고 하셨는데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후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의 빛을 얻기 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성품을 믿든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하나님과 쟁론하든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세상이 자기 생각에 성경적이거나 하나님을 위한다고 여기는 것도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변호가 필요하지 않은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욥도 소발의 말에 대하여 반론을 할 때 “네가 하나님을 위하여 쟁론하느냐?”고 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대부분의 교회나 성도들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도 결국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데, 왜 들어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는 항변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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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3. 10:05 Writer : 김홍덕

우리는 쉽게 욥기라는 책을 1-2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로 인하여 괜히 큰 고난을 받게 된 욥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자기 마음 같이 되지 않는 모든 인생의 갈등과 곤고함이 욥이 겪는 고난인양 생각합니다. 그리고서 욥기의 마지막에 욥의 모든 것이 회복되고 몇 배의 복을 받음과 같이 자신도 이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지만 성경대로 살면 욥과 같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속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인생을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삶이 육신의 평안을 바라는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가치를 몸소 실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기 육신이 바라는 것에는 반하지만 성경을 지키려는 그 과정을 고난이라 맘대로 정의하고 그렇게 잘 견디면 욥이 받은 곱절의 복과 같이 자신들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욥기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의 주제는 절대로 그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이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신이 아닙니다. 육신의 공로나 소유의 드림을 의롭게 여기시지 않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그 이름에서부터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술을 관장하거나, 농사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의 풍요를 얻으려면 하나님께 소유를 아까워하지 말고 드려야 한다거나, 공로를 드리면 될 것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가 아니라 장사고 거래입니다. 사람들은 그 거래의 일환으로 성경을 지키고, 그 반대급부로 육신의 정욕을 채우려 합니다. 그 사이에 괴리를 메우는 과정이 고난의 과정이고, 욥기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책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욥기의 본론은 어쩌면 엘리후의 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욥이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한 편으로는 자신의 곤고함을 벗기 위하여 오히려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한탄하는 한탄이 주제의 단초입니다. 그 단초에서 시작해서 엘리후의 책망에 가까운 말이 있고, 이어서 하나님의 엄청난 질문 공세를 받은 욥이 자신의 모든 한탄과 말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하는 모습 이면에 깔린 복선이 바로 욥기의 본질이고 주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욥기는 신학적으로나 앞서서 아주 많이 언급한 것과 같이 육신이 바라는 것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고 이것을 이기기 위하여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내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책입니다.


따라서 앞선 글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욥기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면 적어도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그 의로움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욥의 원망이 육신의 고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데도 달라지지 않는 삶에 대한 고찰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는 이르러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읽는데 욥의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앙이 아직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은혜로운 것입니다.


물론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의롭지만 하나님의 정체성을 그렇게 바로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는 어떤 귀함도 주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의문으로 곤고함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이 욥기는 엄청난 소망을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반전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은 너무 곤고한 상황인데 이 상황에서 누가 건져줄지 모르겠다고 하는 한탄이 갑자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왜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바뀌었는지 신학자건 목사건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모릅니다.


욥이 단지 질문 공세와 엘리후의 책망을 들었을 뿐인데 회개하게 되었는지, 또 그리고 그것이 곱절의 복으로 이어졌는지의 속뜻도 바울 사도의 반전 고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곤고함과 욥의 곤고함이 궤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소유의 드림과 육신의 공로를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알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의와 내용이며 우리는 그의 형식이요 그릇이요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의 과정을 욥기가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안다는 것이 너무 귀한 것이라서 그것을 알면 세상 귀한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정말 존귀함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욥이나 제자들이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권력으로 귀해지고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돈이 아닌 말씀으로 사람들에게서 권세를 부여 받고, 돈이나 의술이 아닌 능력으로 병자를 치료하고, 사람의 군대가 아닌 하늘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행위로 섬기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지혜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라는 것이 세상 초라하게 사형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욥도 하나님을 바로 알았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엄청난 곤고함뿐이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욥은 의를 주장함과 동시에 원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초에 사탄에게 시험에 욥을 내어주신 이유가 바로 그 이유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엘리후의 책망에서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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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7-31장) 욥의 마지막 변론 –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22. 06:30 Writer : 김홍덕

욥의 고난과 원망 그리고 마지막의 깨달음은 사람들이 쉽게 체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에 진입장벽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의미는 모르면서 쉽게 자신이 이해했다거나 또 겪은 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육신이 바라는 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고생한 것을 욥의 고난에 비교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욥은 처음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서부터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은 정의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부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에 부합되어 나타난 것은 주로 사람들의 눈에 정의롭게, 또 선한 행실로 보이기도 하지만 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죽어야 할 사람으로 보였듯 사람들이 볼 때는 악한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로운 것은 민주주의를 의의 뿌리로 하는 나라의 정체성에 부합된 것인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성경에서 의롭다는 것은 존재의 신이신(신이라고는 하나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의에 부합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욥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의에 부합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행위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누렸는데, 사탄이 볼 때는 반대로 욥의 평안하니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의 생각은 욥이 평안하고 부유하니 하나님 앞에 행위로 죄를 범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먹고살기 평안하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평안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이 먹고 사는 것이 평안해지는 것을 바라는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며 그것을 바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덤에 회칠한 것에 불과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만당하지 않는다고 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욥이 그런 의로움을 가졌는데 왜 고난을 당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얼마간은 엄청 평안하고 놀랍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느끼는 세월을 보내지만 육신의 삶이 지속되면서 그 존귀함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달리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존귀함인데 그 존귀함이 세상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답답함에서부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열렸는데 그러면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확실히 밝아지기까지 이전에 하나님께 행위를 드리면 보응이 온다는 어두움에 속한 생각과는 다른 나름의 흐릿함과 같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마음속에는 이 귀한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은데 정작 현실은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있어서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던 시절에 성공하기 바라며 다투던 그 세상 가치의 기초에 세워진 삶의 구조는 여상하여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는 세월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겪는 고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안다고 삶이 바뀌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행위의 결과가 육신의 먹거리와 또 도덕이나 선함에 대한 삶의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은 여전함을 알게 되는 시점부터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알게 된 삶이 가진 가치에 대하여 온전히 알게 될 때까지는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게 귀한 것이 있는데 삶은 귀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깊은 고민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제자들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도 왕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에게 잡혀갈 때 그 놀라운 기적은 버려두고 잡혀가시니 제자들이 다 도망 가버렸고,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질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었던 것과 욥의 고난은 비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에서 욥의 고난과 원망은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엠마오로 도망을 가고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들의 심정은 정말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재방송처럼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을 성경에서 읽으니 제자들의 모습이나 행동과 생각이 때로 이해되지 않기도 하지만 스포일러 없이 지금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제자들이 겪는 당황스러움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3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듣고 본 것은 너무 놀랍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었는데,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도 하였는데, 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치기도 했는데, 그렇게 귀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당연히 세상에서도 그 존귀함에 합당한 귀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일 텐데 난데없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시고 정말 그렇게 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꿈속의 상상에서도 해 본적 없는 상황이 현실이 된 상황은 욥이 자녀와 재산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은 상실과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이 당황스러움, 어떻게 보면 경험해보지 막막함은 정말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본심을 알았는데 그것이 세상에서 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크게 당황스러움과 상실은 분명히 욥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은 고난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이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정말로 인생의 본질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놀라운 뜻과 계획이었고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 기쁨도 욥의 10명의 자녀와 풍족한 재산으로 평안을 누린 세월 같이 너무 기뻤는데 이상하게 그 가치가 세상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친구들이 욥을 비난하듯, “그것은 예수 잘 못 믿는 것이야!”라며 비난하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세상 귀한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세상에서 가장 천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에 순종해 가는 갈등의 과정을 겪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것이 인생에게 생명의 빛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욥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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