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4

(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9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4. 3. 06:58 Writer : 김홍덕

엘리후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또 때로 사람을 아프시게 하신다고, 그리고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말과 같이 들립니다. 욥이 모르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친구들의 말과 결이 크게 다르지 않은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말에 꼬박꼬박 반박하던 욥이 엘리후의 말에 한 마디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시다는 것은 욥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괜히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과 같이 옹졸하고 생각 없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을 아프시게 하신다는 것은 아픔을 주어 사람을 각성시키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용하시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육신이 평안한 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아픔과 고난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선 몇 회의 글이 이것을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을 절제하시고 행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든 그것은 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람을 죽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은 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에도 악한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기를 설명하면서 민주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해가 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행하든 절대로 악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지 않고, 반박하고 싶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또 창조주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역이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후의 말은 이렇듯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신앙 안에서 상투적인 말들인 것 같지만 어떤 신앙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의미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육신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을 보고 ‘교회에 다녀야 해결된다.’고 말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엘리후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겪는 일들을 고난으로 보지만 인생이 태어난 그 자체가 감사한 사람에게 인생이 겪는 일련의 일들은 모두 감사한 것입니다. 적어도 그 정도의 확신은 있어야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엘리후의 말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본다면 성령이 자기 안에 없다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잘 몰랐던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거나 모르거나 인생이 겪는 것은 같다는 것을 몰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인생이 겪는 일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어 인생을 바꾸고 심지어 역전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도들을 격려하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바꾸고 역전시킨다는 것은 그 이전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아는 것은 언급한 바와 같이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성령의 잉태하심이 없다면 불가한 것입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성경을 수려하게 설명해도 그것을 아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먼저 된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각혈하듯 쏟아내며 설명을 해도 그것을 듣는 사람 안에 성령이 없으면 절대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온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표현해도 성령이 없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그렇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고난을 설명해도 성령이 자기 안에 없으면 길가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얼마가지 않아서 인생이 겪는 것을 부지불식중에 죄를 범한 것을 인함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신념을 가지고 고난도 감사함으로 억지로 생각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이 자기 안에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간주하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겪는 일들을 힘겨워 합니다.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고통과 괴로움, 무엇보다 원치 않는 일이 생기지 않기 바라는 것이 바로 육신의 장막을 벗고자 함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난을 견디려 합니다. 그리고 견디는 힘을 견딘 다음에 보상을 믿는 것에서 얻으려 합니다.


육신이 겪는 곤고함은 엄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벗어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벗어나거나 극복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하게 창조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행위에 따른 결과로 인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육신의 삶을 고통으로 또 고난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그런 생각을 인함입니다. 육신이 겪는 일이 아니라 엄연하고 당연한 것을 부정하려는 그 갈등이 바로 사람들이 고난이라 여기는 것의 본질입니다. 결국 고난은 육신이 소비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데 그것을 벗고자하는 그릇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주는 희망고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경영하심은 육신이 반드시 수고하고 소비되며 육신을 일으켜서 움직이고 그런 움직임을 종이나 하는 천한 것이라고 여기는 안목들 앞에서 죄인과 같이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살다보면 그것이 때로는 아픔과 같이 여겨지지만 하나님을 정말로 바로 알고 보면 그 아픔이 바로 인생에게 생명의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욥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8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4. 3. 00:00 Writer : 김홍덕

엘리후의 책망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욥이 알기를 바라시는 것은 고난의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세 친구들과 같이 회개하여 해결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욥과 같이 자신이 죽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함께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어떻게 인식하든,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든 아니면 범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로 이해하든 인생이 늙어가고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힘듭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세금도 내야했고, 배도 고팠으며 성경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화장실도 다녀야 했으며 씻기도 해야 했습니다. 육신을 가진 이상 그런 것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도 힘겨워하는 그 육신이 바로 하나님이 목적하신 아들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나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전하지 못하게 여기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그 육신을 가진 사람뿐입니다. 


사람이 육신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을 사용하면 할수록 손이라도 한 번 더 씻어야 하는데, 흔히 이야기하듯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사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보듯 육신을 사용하지 않고서 원하는 것을 하나라도 더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또 복으로 또 은혜로 여기는 것은 육신이기에 해야만 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부정한 마음은 육신이기에 겪는 일들을 고난으로 여깁니다. 병드는 것, 늙어 가는 것, 인생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하여 힘들어지는 것, 세상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과 같은 것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고, 누구라도 그런 자리에 있기 마련인데 단지 자신이 그것에 처하면 안 되고, 그렇게 자신이 처하면 안 되는 자리기에 그렇게 된다는 것은 불행이며 죄악의 결과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반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렇게 사람들이 불행이며 고난이며 죄악이며 고난이며 형벌이라고 여기는 것의 상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십자가 사건 하나의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이라는 것이 겪는 모든 수고와 소비에 대한 정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수고와 소비와 정죄되는 것과 불의한 존재가 되어 육신이 소비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고 그 십자가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필연적으로 겪는 병들고 늙고 힘겨운 삶의 여정은 필연적인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온전하지 못함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에 따라서 인생이 고난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삶을 주신 그 자체가 감사요 은혜요 영광이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인생인 늘 고난이라고 말하면서 생일을 축하합니다. 고난인 삶으로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인 관점으로 봐도 의당 모순입니다. 한 가지 여지가 있다면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 다른 달음박질을 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축하한다는 것 정도가 되겠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에는 반하는 것입니다. 생일을 축하하고 인생 자체를 감사함으로 여기든지 아니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옳은 것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육신을 가진 존재들이 자기 입장에서 겪는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때로는 각자의 신께)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한 것과,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결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욥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면 그것이 없어질 것으로 여기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를 모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기도 어디까지나 성경 안에 있는 책이고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미를 말씀하시는 책인데 욥기만 난데없이 우리 육신을 괜히 시험해 보고 잘 견디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욥이 겪는 고난과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대한 책망과 같은 내용들은 인생이 육신이 살면서 겪는 곤고함, 모두가 벗고 평안해지고하는 그것을 고난으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 창조의 목적과 섭리와 경영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답을 유도하고 계신 말씀인 것입니다.


인생이란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할 형식으로 육신을 주시고 그 육신의 소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운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인생들이 그렇게 벗고 싶어 하는 육신의 소비가 영광스럽고 감사한 것이라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들은 곤고함으로 일관된 삶에 대한 견해를 벗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소비재로 창조하셨고 그 육신이 소비되고 연약해지고 힘겨운 삶을 사는 것이 복이요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을 괴변으로 알아듣거나 문자 그대로 들어서 육신을 오히려 자신이 괴롭게 하고 제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쉽게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자식과 온 재산을 잃고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몸소 그 육신을 소비하는 것을 보이면서까지 말씀하셨는데도 엉뚱하게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기도하는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것은 사람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은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육신이 소비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잉태하심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엘리후의 책망은 일면 성령의 역할이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욥기 31-37장) 엘리후의 책망 – 7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3. 31. 12:50 Writer : 김홍덕

고난에 대한 올바른 정의


욥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고난의 올바른 정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의 원인은 사람이 죄를 범하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단련하시기 위해서 괜히 고난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범한 것을 인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 친구들의 생각이고, 괜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욥의 생각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생에서의 고난에 대하여 가진 개념을 종합적으로 두 가지로 욥기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그 고난에 대한 생각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생을 경영하시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엘리후를 통해서 또 하나님의 질문들 통해서 알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욥기가 말씀하시는 고난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견디면 그 고난의 반대급부가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병마를 싸워 이기면 건강한 삶을 주신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하나님을 믿으면 경제적인 풍요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은 남들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감수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자신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잘못된 행동을 인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학습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 학습의 목적은 당연히 자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의 변호가 필요한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들었다면 그것은 단지 괴변일 뿐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가진 고난의 정의는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이거나 하나님께서 더 큰 육신의 복을 주시기 위하여 자격을 검증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난은 오직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관문이고, 테스트며 육신의 복에 합당한 행위로 정결해지는 회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복을 얻는 자격에 관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단지 투자 목적일 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함이나 인생의 의미와 무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육신을 보존하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은 쇠약해지거나 늙거나 죽거나 병들지 않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창조주의 목적에 귀속된 존재이지 창조주가 피조물의 보존을 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에 눈이 어두워져서 육신이 늙고 또 죽어가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주목하지도 않고 왜 그런지에 대하여 생각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육신의 곤고함, 즉 고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본질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보존하시려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고자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것입니다. 사용하신다는 것은 당연히 소비가 된다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렇듯 소비는 보존이 아니라 닳고 약해지며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 치명적인 모욕 같지만 피조물의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오히려 피조물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것을 안다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들이 자신들 만의 선과 악으로 세상과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지극히 자신의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것 이전에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을 망각하고 스스로 자기 삶에 특히 육신의 평안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선악과를 보기 좋고 먹기 좋은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난은 기본적으로 죄를 인함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육신의 평안이라는 당근을 주시기 위한 채찍질도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일상적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을 경영하시므로 인생이 소비되는 과정에 수반된 열화(약해지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인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음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쁨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 안에 자신의 삶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인생의 존재 자체를 감사하게 됩니다. 존재 자체를 감사하는 사람은 살아 있다면 그 자체가 감사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 삶 속에 때로 슬픔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도 그냥 감사한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삶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니 교회 생활 한다고 남들 누리는 것 포기하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고난을 견디면 육신의 평안이라는 복을 주시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인생이 복음 안에 있다면 인생이 쇠약해지는 고난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볼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육신의 운명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평안을 보존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에 육신을 드리신 것을 보고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평안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정말로 어이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도 인생이 피조물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므로 육신에게 임한 고난의 의미도 모르며 그저 그것을 이기고 싶어만 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잘 이겨지지 않으니 그것을 미화해서 이것을 견디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덧칠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관계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