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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서신서 시작에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는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평강의 주체, 곧 주시는 이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듯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기서 ‘우리’와 ‘주’는 앞서 편지의 수신자가 단어가 아닌 그 심령으로 지정되어 있듯, 어떤 사람에게 이 은혜와 평강이 임할 것인지를 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바울 사도가 편지의 내용을 마치 암호나 암구호처럼 기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 편지를 기록했지만 그 의도한 바는 바울 사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을 많은 사람들이 읽지만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이러한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예정론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단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같은 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들끼리의 말입니다. 즉 형제들이 그 아버지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주(Load)’ 또한 같은 말입니다. 같은 분을 동일하게 ‘주’로 부른다는 것은 그 또한 같은 주를 섬기는 종들 간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한 형제로서 서로를 인정할 때 함께 부르고 알아듣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편지의 수신자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신실한 자라는 것도 바울 사도를 외모로 보지 않고 그에게 있는 계시를 보고 그를 사도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듯,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정체성으로 보는 사람들이어야 ‘우리’라는 말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하나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교파가 갈라질 일이 없겠지요. 교파가 갈라졌다는 것은 마치 자신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갈라져서 싸우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파가 다르고 세례와 침례를 가지고 다투는 이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서로에게 우리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때로 사람들 생각에 그 원하는 바가 성경에 기초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여겨 자신의 기도가 자신의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의 변호가 필요한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회칠한 무덤처럼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소망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렇듯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면 누가 주인입니까? 사람들의 생각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자기 힘으로 되지 않고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집주인이 전기 기술자를 불러서 공사를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내 힘으로 얻을 수는 없어서 누구를 불러서 그것을 내가 차지했는데 부른 사람이 그것을 해 주었고 그 일에 대하여 주관하고 있다고 그 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하인처럼 부리며 능멸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입이 설사 예수님을 주로 부른다고 해도 예수님이 주권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저 알라딘의 램프 안에 있는 요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정이 램프 밖으로 나오도록 성경을 자기 육신으로 지켜서 불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또 예수님을 주님이라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 또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바울 사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 그것을 인하여 바울을 사도로 보는 사람, 즉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보는 사람들이어야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함께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이며, 또한 그런 사람들이어야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그렇게 버릇에 가깝게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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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2) 에베소서의 수신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4. 23. 09:56 Writer : 김홍덕

이제 에베소서를 시작합니다. 에베소서는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쓴 편지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고, 예정론이라고 말들 하는 말씀도 있고, 천로역정에도 나오는 전신갑주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 에베소서의 주제를 축약하면 아마도 <그리스도 안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비단 이 에베소서뿐 아니라 모든 성경은 신실한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신실하다(faithful)는 것은 신앙의 수준이 높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보다 나은 순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된 사본에 수신처가 에베소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수신자가 에베소 교회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주목한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본문에도 있는 의문, 곧 성경이 의문스러워서 아직도 학문(신학)으로 만들어 연구하는 하나님이 장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관점일 것입니다.


성경을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듣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저자가 설령 특정한 수신자(예 데오빌로)를 지정하였다고 해도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들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에베소서도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은 기록한 사람과 읽는 사람이 같은 세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한 것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라는 의미이고 ‘신실한 자들에게’ 라는 것은 신실한 사람이 수신자라는 것입니다. 즉 이 편지이자 성경은 성도이고 신실한 사람일 때 진정한 수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부르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제 아무리 에베소서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원어로 다 외운다고 해도 수신자가 아니지만 바울 사도가 의도한 것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된 사람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더라도 이 편지의 수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의 서신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사람이 바로 신실한 사람이며 성도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서신이 지역적으로 어디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라고 보는 관점을 가진 사람, 그것을 연구랍시고 하는 사람, 또 그것을 공부해서 시험치고 학위 따는 사람, 또 이 말씀대로 살아서 육신의 영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은 읽을 수는 있지만 수신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대부분의 바울서신이 그렇듯 시작과 함께 바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사도라는 것을 늘 천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성도들을 핍박했던 과거를 인한 것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인하여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인하여 그것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그런 조건에 있던 바울을 사도로 인정한다는 것이 신실한 사람이고 또 성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바울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의심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한다는 것은 육신의 어떠함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그의 말씀과 능력에만 기준을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의 어떠함을 보지 않고 말씀과 능력만을 보고 사람을 용납하고 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울러 천명한 것이 바울 사도의 인사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은 어쩌면 면죄부 사건 이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학을 하지 않았다면 그 말씀의 온전함을 가늠도 해 보지 않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과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전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신학교를 나왔는지, 그가 어떤 신비한 능력을 행했는지, 그가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인지, 무엇보다 사회에서 얼마나 성공한 사람인지를 말씀을 전하는 자격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신학으로 공부한 사람, 바울 사도가 율법의 의문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 사람들이 아니면 설교를 할 수 없다고 천명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강도권과 같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권한을 만든 것이 그것입니다. 의문이 풀렸다면 공부하지 않을 텐데 아직도 신학교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고, 그래서 아직도 신학으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격이 있어야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장로도 그렇습니다. 장로가 되려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장립식 때 헌금을 할 정도의 재력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은 이제 불문율과 마찬가지인데, 그런 것도 역시 교회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을 열고 말을 하는 것에 자격을 부여하고 그 자격이 말씀을 전하는 권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핍박하던 자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싫어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당시 유대인들이 밥도 같이 먹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사도로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과 전혀 다른 의미인데, 그렇게 바울을 사도로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서 성도가 되고, 신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 안에서도 자신은 옥에 갇힌 사람이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밝히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런 자신의 형편이나 과거나 삶에 무관하게 그에게서 나오는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이어야 이 편지의 수신자가 되는 것이고 성도가 되는 것이며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쓰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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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를 마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4. 21. 09:18 Writer : 김홍덕

일반적으로 욥기는, 욥이라는 의인을 사탄이 시험하려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가하시므로 욥이라는 의인이 잘못한 것 없이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을 잘 이겨내므로 하나님께서 고난 이전보다 더 큰 복을 주신 것을 말씀하시므로 욥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원치 않게 닥친 고난을 잘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욥기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는 인생에서 사람들이 고난이라 여기는 일이 왜 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견해가 다릅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힘들어 하는 것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이 여기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자기 맘대로 해보고자 하는 그 욕심이 사망에 이르게 하여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에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욥의 세 친구들의 말 속에 녹아 있습니다. 세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신다는 뿌리 깊고 잘못된 신앙관이 굳건하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하면 인생이 바라지 않는 고난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도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고난은 사람에게 있어 벌을 받는 것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육신의 삶에 고난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라는 것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이 꾸준히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엘리후가 하나님께서는 때로 사람을 아프게도 하신다는 말에서 육신의 고난은 벌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 육신의 소망이 육신의 평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고난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개념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더 나은 삶을 주시기 전에 그 사람이 그 삶에 합당한 역량을 가졌는지, 신앙을 가졌는지 시험하시고 또 합당하게 되도록 연단하신다는 개념입니다. 이것도 세 친구들의 말 속에 있습니다. 욥이 회개하면 더 나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고난이란 하나님의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위로 죄를 범한 것에 대한 벌이나 응징도 아니고, 고난이라는 것을 도구로 하여 인생의 업그레이드하시고자 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위로 죄를 범한 것에 대한 벌로 고난을 주신다면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존재의 신이 행위를 의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것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조차 않으십니다. 그것은 욥이 그것에 대하여 분명한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세 친구들과 끝이 없을 것 같은 논쟁을 한 대부분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도구로 사람을 업그레이드하시려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만약 고난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업그레이드 하는 수단이라면 하나님의 창조는 온전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큰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명제에도 완전히 어긋날 뿐 아니라,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도 단순한 립서비스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난은 무엇인가?

욥이 겪은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신으로 알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난 다음에 겪는 영적 갈등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욥의 고난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러니까 육신의 삶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겪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 받는 벌이나 값이 고난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이라는 것이 죄의 결과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육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고난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욥의 고난이 무엇인지, 욥기가 어떤 내용인지 알려면 적어도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며 창조주이신 것이 온전히 자기 안에 있어야 비로소 이해할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고난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욥기를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욥의 고난에 관심이 간다는 것은 그 생명이 거듭났다는 것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단지 범죄에 대한 벌이나, 연단의 수단으로 욥의 고난을 본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욥이 겪은 고난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을 알게 된 다음 직면하게 되는 영적인 갈등이 본질이고, 그 고난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엘리후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욥기를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그 주제는 고난을 이기면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세 친구들의 견해에 대한 설교도 듣기 힘듭니다.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들의 설교가 세상에서 육신이 평안하고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는 것을 고난이라 정의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것도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난 생명이 되면 처음에는 그 기쁨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머리 속에 사이다를 부은 것 같이 성경이 자기 안에서 명쾌해지고 욥기 처음에 설명된 욥의 모습처럼 자신의 영혼이 너무 풍족하게 보입니다. 바울 사도가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낸 것이 그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풍족해질 것 같았는데 그렇게 온전히 알려고 했던 하나님을 바로 알았는데 인생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 누적되면 그것은 정말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곤고한 시간이 됩니다.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 외치게 되고, “이 복음을 괜히 알았노라!”한탄도 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겪은 사람은 욥의 모든 한탄이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이 되어가는 필수적 과정입니다. 경부선을 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대구, 대전을 반드시 거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또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굿보다 싸고 간편하게, 아니 공짜로 신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는 것이 교회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값없이 육신의 문제를 의지할 신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닌데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는 것은 신앙도 아니며, 그런 신앙은 욥의 고난을 바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에서 떠나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의 문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치관과 안목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이 주는 안목이 없으면 그렇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바뀐 안목으로 세상과 육신의 삶을 보면 우선 자신이 몰랐던 세계가 밝아진 기쁨이 너무 크지만 세상에서 자신이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신의 일상은 숨 쉬는 동안 끊이질 않는데, 그런 일상이 가져온 각양의 문제들, 사람들과의 갈등, 경제활동과 같이 살아가면서 뗄 수 없는 문제들이 이전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하나님께 그것을 기도하거나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 됩니다. 인생이 겪고 있는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왜 있는 것이며 어떻게 마주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한탄하고 항의하며 죽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온전한 존재의 신으로 알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마음이 가득한 세월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땐 아마 ‘하나님을 괜히 알았다.’ 싶은 마음이 넘쳐나고, 욥과 같이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필연적인 과정일지 모릅니다.


이 여정은 심히 곤고한 여정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의 삶이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적어도 위로는 되었지만 이젠 하나님은 그것을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분명히 알기에 무엇을 먹을지 마실지 입을지를 기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데 육신은 여전히 그 문제와 하루도 빠짐없이 씨름을 해야 하는 현실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알면 욥이 왜 죽기를 바랐는지 충분히 알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 이 곤고하게 여겨지는 육신의 삶이 주어진 이유를 깨닫는 것으로 이끕니다. 육신의 삶 그 안에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육신에게 반영된 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상과 벌을 가늠하고, 상을 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 육신의 수고를 감수하며 그것을 현재의 고난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며, 그 상태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지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육신이란 진정한 하나님의 도구이며, 그 도구로서 너무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많은 질문들은 하나 같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위하여 얼마나 온전한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란 존재도 오직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 안에서 소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단지 하나님의 도구라면 그것을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건 자윱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마음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존재함으로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이전에 왜, 누가 존재하게 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면 누구라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마다하겠습니까?


욥기는 바로 이것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그 목적 아래 있는 것으로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보기에는 곤고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온전히 알고 보면 욥의 최후 고백과 같이 하나님께 고백하게 되고, 그것은 진정 인생의 감사함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욥의 최후 고백과 같은 말씀이 성경에 너무나도 많은데 특히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하신 말씀이 대표적이며, 고린도후서에서 육신의 장막(고난)은 벗는 것이 아니라 덧입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고후 5:4)이 그것이며,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육신의 곤고한 삶을 포함)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심이 그것이며, 끝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안(고난을 이기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는 말씀도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 우리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목적 아래 온전한 것이며, 육신도 세상도 삶도 모든 것이 온전하기에 그 주신 목적만 온전히 알면 욥의 마지막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고 바울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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