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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육신의 삶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운명론적 개념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의문스러운 것일 수 있지만, 이 예정하심은 사람의 정체성, 곧 존재 목적을 정하심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이 예정하심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할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도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 역시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분명한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라는 한 영이 사람 안에 있어 같은 말씀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달라도 영이 같고, 그 정체성이 같다면 이것은 동일하게 이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학과 같이 공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고 있고, 그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실수도 없이 온전하다는 것도 믿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것도 믿고 있고,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도 믿고 있는데, 기도하면서 ‘왜 그러냐?’고 하나님께 묻거나 항의하는 것은 절대적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이므로 왜 만드셨는지를 알면 사람으로선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할 것이 없고, 하나님을 학문으로 공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남은 것은 순종의 문제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100% 타협의 의도입니다. 자기가 가진 뜻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동의하시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 순종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하나님께 일치하는지, 더 나가서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께서 동의하실 수는 없는지를 궁리하는 것에서 모든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살면서 당면한 문제들도 ‘내가 그냥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별로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갈등이나 고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기준으로 있기 때문에 자기 바라는 것을 기준으로 두고 나머지 문제를 해결하려들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즉 자기 육신이 평안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준에 다른 것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신 것이 이것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 그것이며, ‘이스라엘아 들으라!’ 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이며, 심지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도 이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수동적인 것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다시 말해서 인생을 지으신 뜻이 자신을 본성과 같이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믿음이고,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같은 내용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땅은 하늘이 변하는 대로 반응하는데 그것이 순종입니다. 땅이 하늘의 변화에 이류를 묻지 않습니다. 하늘이 여름이 되면 땅이 더워지기만 하지, 그것에 의문을 가지거나 저항하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통일되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늘 비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것은 비밀이며 그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고 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경륜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이 서신을 읽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앞선 글에서 언급한 성도와 신실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예정인 인생의 목적을 예정하신 것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고 있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극히 수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한대로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기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수고와 보살핌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내가 선교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이에게는 의문이 없지만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생각을 기준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를 봐야 하고 뜻한 대로 되지 않으면 의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진 이는 알 수 없는 비밀이지만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것, 하나님이 예정하신 창조의 목적과 그 안에 담긴 의와 뜻이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어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이것은 진정한 기쁨입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보다 존재하게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 기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게 은혜고, 이것을 기쁨으로 아는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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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생각에는 육신이 평안하고 육신의 삶이 존중 받는 것이 선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람도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존재이므로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그 안에서 평안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브레이크는 그 목적이 마찰을 이용하여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마찰로 인한 열과 고통을 멀리하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가 됩니다.


그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 안에 있으면 그 존재 자체가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상해고 찢겨도 온전한 것이지만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전혀 무관하게 사용이 된다면 그것은 아주 불행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의 인생도 육신의 평안이 기쁨이고 성공이며 선한 것이 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육신이 소비되고 때로 종과 같이 수고하여도 그것이 보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종과 같아 보여도 존재 목적 아래서 온전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택하심을 말씀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기쁜 듯대로 된 것(엡 1:5)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져서 그로 인하여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시험에 합격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종속된 존재가 아닙니다. 인생이 고달파도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합당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하고 무엇보다 유일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겠다고 하는데, 그들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자리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찢기시고 상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인생을 지으신 목적대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께 가서, 또 그 이름으로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것이 과연 온전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쁨에 대하여, 또 만족함과 평안에 대하여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육신의 삶에 기준을 둘 것인지 아니면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에 기준을 둘 것인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 기쁨이라고 하셨는데 우리에게는 악몽과 같은 인생이 된다면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뜻으로 우리를 예정하셨다면 그 예정 안에 들어 있는 사람도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고 하고, 살면서 겪는 일들마다 ‘괴롭고 힘들다.’ 한탄하면서 그것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말 자체로도 모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자체가 모순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이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적어도 인생은 기쁨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믿는 여부와 무관하게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아니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기쁨과 평안을 목적 안에서 볼 것이냐 육신의 상태로 볼 것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브레이크와 같이. 브레이크가 창고에 적재만 되었다가 불용품으로 분류되어 버려지면 그 삶이야 평안하기 그지없겠지만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듯 인생도 육신의 평안을 기쁨의 기준으로 삶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하심 = 세상에서의 평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의 삶이 나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은 제 아무리 사는 형편이 나아져도 육신이라는 그 근본이 세월에 의해 약해지고 소비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이란 존재는 소비되는 존재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인정해도 신앙은 아주 달라집니다.


우리가 언제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예정하신 뜻을 가장 온전하게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오늘 내가 추구하고 기도하고 바라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인지를 늘 반추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즉 소비하여 하나님 아들이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보이셨는데, 나는 그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한다면,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서 회칠까지 해서 구하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희롱당하지도 않지만.


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입니다. 육신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부모의 의와 생각이 육신을 가진 자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뜻, 곧 하나님의 성품을 형상 있는 존재로 하여금 표현하게 하시겠다는 그 뜻이 예정하심이고, 그 예정하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진 의가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주시고, 그 육신이 세월과 함께 노쇠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살면서 다양한 감정으로 해석되는 일들을 겪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인생의 목적이라는 예정 안에서 살면, 그 삶에서 겪는 일이 사람이 보기에는 화난 것이고, 또 우는 것이고, 때론 불행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그 예정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우리 삶의 모양이 어떠하더라도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순종하면.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자기 삶으로 표현이 되면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로서, 하나님 아들로서 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생명을 얻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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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것”(엡 1:4)이라고 말씀한 것에서부터 에베소서 1장의 말씀들에서 더 확정이 됩니다. 물론 이 확정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서 온전한 유일신으로 섬길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는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선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하나의 ‘의’며 그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예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a man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the Christ라는 정체성을 예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라는 공간적 울타리에 있다거나 아니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니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집에 있는 사과나 마트에 진열된 사과나 모두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할지 말지에 대하여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아예 먹지 못하게 만드시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죽은 자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된다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없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지만 성경 말씀을 듣고 사고할 수 있는 육신은 살아 있는 상태인 것은 오직 그 육신의 기능으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두신 것입니다.


이는 금은방에 있는 시계가 멈춰 있지만 주인에 의하여 선택이 되어 시각을 맞추면 그 때부터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인이 정해지기 전에는 시계로서 온전하나 아직 존재의 목적으로 볼 때는 죽은 것이다가 주인이 정해지면서 그 목적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목적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육신이 살아서 기능을 발휘하는 그 기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주신 삶의 기간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 곧 인생의 목적을 자기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예정하신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서 그가 보이신 것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드리고 사용하고 소비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인생의 온전한 의미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라도 의미 있는 이들 사이에선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추행이나 범죄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게 그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사랑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랑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시고 또 그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와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 사랑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예정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거룩함이라고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니 목적대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먼지도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도 형식이나 육신의 삶의 행위가 어떠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에 흠이 없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 생명이 있는 자로 보는 사람이 거룩한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곧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예정하심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된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구분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시려고 지은 그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예정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우리 인생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게 되는 영광과 감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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